어려서부터 나는 세련된 것을 좋아했다. 소리 내며 음식을 먹거나, 옷을 말끔히 갖추어 입지 않거나, 아침 드라마 속 인물들의 과잉된 감정과 행동에 이입하는 게 너무 싫고 지긋지긋했다. 나 자신이 그런 것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속으로 깔보는 마음을 가지고 다녔다. 밖에서 보기에 웃긴 모습이었을 테다. 나는 소똥 냄새와 빨간 고무 대야, 싸구려 스테인리스 그릇과 누런 장판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완전히 속한 애였으니까.
당시 내게는 세련된 것들의 ‘레벨’이 있었다. 그중 최상위가 책이었다. 책은 먹고사는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어 우리 집에서 무용한 것으로 여겨졌다. 집에 있는 책이라고는 전화번호부나 사전 따위뿐이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멋져 보이는 책을 아주 많이 읽었다. 플라톤·카프카·도스토옙스키· 리처드 도킨스·칼 세이건 등등. 이해가 잘 안 돼도 허리를 세우고 머리를 쓸어 넘기며 페이지를 넘겼다.
지식에 배신당한 건 대학에 와서다. 닥치는 대로 읽고 배웠는데 그럴수록 어쩐지 내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그건 내가 소똥 냄새 나는 동네 출신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여자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플라톤의 대화에서 여성이 발언하는 일은 없었다. 러시아 문학에서 여성은 너무 자주 창녀로 등장했다. 진화생물학에서 여성은 난자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철학자건 과학자건 이들을 가르치는 교수건 왜 죄다 남자인가. 그 어떤 캐릭터에도 나를 대입해볼 수가 없었다.
이런 현상은 종종 원인과 결과가 뒤섞여 해석됐다. ‘지식이 만들어지는 역사에서 여성이 배제됐기에 여성이 기록에 없다’가 아니라, ‘여성이 기록에 없는 것을 보니 여성의 지적 능력이 생물학적으로 부족하다’는 주장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감성적이라서 혹은 수학적·논리적 능력이 부족해서 등등…. 보편을 말하는 학문일수록 이런 경향이 심하다. 대표적으로 과학이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 론다 슈빙어 교수(과학사)는 과학 분야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첫째는 ‘숫자 고치기’. 여성 연구자의 수를 늘리려는 노력이다. 둘째는 ‘제도 고치기’. 여성 연구자가 학계에 오래 머물 수 있도록 육아 문제를 해결하는 등 구조적 변화를 꾀하는 것이다. 셋째는 ‘지식 고치기’. 남성 중심으로 형성된 지식을 바로 세우자는 것이다. 지식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성차별 중 이 세 번째 문제가 가장 눈에 띄지 않고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성차별이다.
과학이 가치와 무관한 적이 있던가
혹자는 과학적 사실은 도덕적 가치판단과 별개라고 말한다. 공허하게 들린다. 역사 속에서 과학이 단 한 번이라도 가치와 무관한 적이 있던가? 근대과학 방법론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프랜시스 베이컨은 처음부터 ‘남성적인’ 과학을 하겠다고 밝혔다.
진공 상태에서 생산되는 지식은 없다. 가정용 인공지능 스피커가 여성의 음성으로 말하고, 인공지능 번역기가 가정주부를 여성으로, 수학자를 남성으로 인식하는 게 기술 산업의 엔지니어 대부분이 남자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내게 대학에서 하는 공부는 더 이상 세련된 것이 아니다. 수입된 지식의 출처를 묻지 않아서 싫고, 직접 경험한 게 아니라 읽은 것을 말해 지루하기도 하다. 하지만 공부 전부를 그렇게 느끼지는 않는다. 어떤 배움은 내게 여전히 세련됐다. 자신의 경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그 경험 바깥을 자신의 경험으로 섣불리 일반화하지 않는 배움이 그렇다. 페미니스트 활동가로 지내는 동안 그런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 여전히 먹고사는 것에 무용하더라도, 허리를 세우고 머리를 쓸어 넘기며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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