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벽지에 있어 의료 혜택을 받기 어려운 환자를 원격의료 하는 것은 선한 기능이다. 지나치게 의료민영화로 가지 않고 순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에서 원격진료도 가능하다.” 지난 8월16일 여야 원내대표와 회동한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한 말이다. 원론적인 언급쯤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 발언이 의료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현재 허용된 원격의료는 의료인 사이의 행위뿐이다. 의료법은 원격의료가 ‘의료인이 컴퓨터 등 정보통신기술을 써서 먼 곳에 있는 의료인에게 의료지식·기술을 지원하는 행위’라고 규정한다. 가령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던 환자가 동네 병원에 찾아왔을 때, 해당 병원 의사가 수술을 집도한 의사에게 환자 상태, 영상진단 결과 등을 원격으로 조언받는 일이 예시다. 이미 2002년 일찌감치 신설된 조항이다. 이번에 문 대통령이 언급한 의료인과 환자 사이 원격의료는 전면 금지되어 있다. 허용하려면 의료법을 고쳐야 한다. 이 경우 원격의료는 법적 정의부터 바뀐다.


ⓒ연합뉴스보건복지부는 2013년과 2016년 원격의료를 허용하는 의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2016년 1월 한 군의관이 흑산도에 있는 장병과 원격진료를 시연하는 모습.


많은 이들이 대통령의 발언을 ‘뜻밖’으로 여겼다. 지난 대선 기간에 문재인 후보는 “원격의료는 의료인과 의료인 사이의 진료 효율화를 위한 수단으로 한정”한다고 공약했다. 대한의사협회가 2012년 18대 대선을 앞두고 한 질의에 대해서도 문재인 캠프는 같은 견해를 보였다. 심지어 2015년 4월 그가 당 대표이던 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 전신)은 의사와 환자 간 원격의료를 규정한 의료법 개정안을 ‘4대 중점 저지 악법’으로 꼽았다. 취임 뒤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내놓은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도 원격의료는 없었다.

무엇보다 원격의료는 박근혜 정부의 핵심 의제였다. 취임 첫해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은 원격의료에 관심을 보였다. 2013년 취임 직후 “도서·벽지 등 서비스 혜택이 부족한 곳부터 원격의료를 시범 도입해 성공 케이스로 만들고 이후 확산하는 게 좋겠다”라는 발언을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원격의료 도입을 주장했다. 그해 말 의사 2만여 명이 반대 집회를 열자, 박근혜 정부는 “‘의료민영화’ ‘진료비 폭탄’ 같은 잘못된 유언비어를 바로잡지 않으면 국민 혼란만 가중된다. 왜곡 세력에 초기부터 신속·적극·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라고 강경 대응했다. 보건복지부는 2013년과 2016년 두 차례 원격의료를 허용하는 의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시범사업을 실시하고, 매달 홍보 보도자료를 쏟아냈다. ‘안종범 업무수첩’에는 박 전 대통령이 ‘군인 원격의료 성공’을 자평하고, ‘한의 원격의료’를 지시한 정황이 드러났다(〈시사IN〉 제488호 ‘줄기세포 규제 풀라, 엉뚱하게 알고 지시했다’ 기사 참조).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원격의료는 다른 이야기라는 게 현 정부 입장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시사IN〉과 통화에서 ‘사업을 바라보는 관점’을 결정적 차이로 꼽았다. “공공의료를 보완하려는 게 현 정부의 목적인 반면, 박근혜 정부는 산업 활성화 측면도 목적 중 하나로 여겼다.” 그 결과 사업 대상의 규모가 좁혀졌다. 재작년 박근혜 정부에서 발의해 계류 중인 ‘의료법 일부개정 법률안’은 재진 환자 중 만성질환자·정신질환자·수술 뒤 관리가 필요한 환자, 의료기관까지 거리가 먼 섬·벽지 거주자, 거동이 어려운 노인·장애인, 교정시설 수용자·군인 등 의료기관 이용이 제한되는 자, 성폭력·가정폭력 피해자가 원격의료를 받을 수 있다고 정했다. 반면 8월23일 보건복지부는 격오지의 군부대 장병, 원양선박 선원, 교정시설 재소자, 섬·벽지 주민 4가지 유형으로 대상을 한정하겠다고 밝혔다. 8월28일 〈의협신문〉 보도에 따르면 조원준 국회 보건복지전문위원(더불어민주당)은 “박근혜 정부는 원격의료 대상을 100만명 이상으로 설정했다. 문재인 정부는 8만여 명이 대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당·정·청이 공감대를 형성한 만큼 여당 보건복지위원회 간사(기동민 의원) 이름으로 의원 발의안이 제출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연합뉴스2016년 9월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군의 원격의료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건강보험 재정 낭비 불러올 수도

그러나 의료계는 ‘제한적 원격의료’에 대해서도 회의적 분위기다. 안전성을 장담하지 못한다는 게 첫째 이유다. 대면의료를 하지 않으면 오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원격의료 과정에서는 시진·청진·타진·촉진(보고 듣고 두드리고 만져서 진료하는 것)이라는 ‘매뉴얼’이 어떤 식으로든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환자의 상태를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데 체온만 재고 진단하고 처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한다.

‘1차 의료 약화’도 원격의료를 반대하는 이유로 꼽는다. 1차 의료는 환자가 가장 처음 접촉하는 의료 서비스로, 동네 의원이나 보건소가 여기에 해당된다. 환자들이 1차 의료 대신 대형병원의 원격의료 서비스에만 몰릴 것이라는 우려다. 대한의사협회 산하의 전국시도의사회장단협의회는 8월27일 “가뜩이나 어려운 동네 의원들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을 것이다. (중략) 똘똘 뭉쳐 원격의료 저지 투쟁에 나설 수 있음을 강력히 경고한다”라고 성명을 냈다. 원격의료를 찬성하는 쪽에서는 “직역 이기주의가 국민의 선택을 막는다”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1차 의료는 공익과도 연관이 없지 않다. 일반적으로 증세가 가벼운 환자는 1차 의료기관에서 치료하되, 의사가 대형병원의 진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소견서를 써서 3차 의료기관인 종합병원으로 보낸다. 이 시스템을 의료전달체계라고 한다. 의료전달체계에서 1차 의료기관이 약화되면 병의 경중과 무관하게 환자가 큰 병원에 몰린다. 자본력을 갖춘 대형병원들은 전국적으로 환자를 유치해 점점 돈을 벌고, 동네 의원들은 점차 힘을 잃는다. 환자들은 더 낮은 비용으로 막을 수 있는 가벼운 병에도 의료비를 더 쓰게 된다. 건강보험 재정 낭비를 불러온다.

일반적 경쟁의 결과가 아니라 원격의료가 개입해 의료전달체계가 붕괴되면 다른 문제도 생긴다. 약화된 1차 의료기관의 기능을 대형병원의 원격의료가 온전히 메울 수 없다. 진단은 논외로 하더라도 치료에는 근본적 한계가 있어서다.

참여정부에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 원장을 지낸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원격의료라는 정책은 비용 대비 효과가 거의 없다고 이미 평가가 끝난 문제다. 정말 의료 사각지대가 걱정된다면 보건소를 강화하고 왕진 제도를 활성화하는 게 자연스럽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정부는 ‘말을 바꿨다’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원격의료를 추진할까? 김 교수는 “원격의료라는 정책이 실질적 효과가 있는지는 2차적 관심사일 수 있다. ‘의료 서비스 규제 혁신’이라는, 사람들이 감각적으로 수용할 법한 담론을 내놓는 게 중요해 보였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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