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지나가던 시민이 건네는 말이면 감사한 일이지만 천막 농성장으로 찾아온 노동부 관료의 첫 질문이 이렇다면 정말이지 곤란하다. 그래서 되물었다. “가지고 있는 자료 먼저 보여줄 수 있나요. 어떤 자료가 축적되었는지 말이에요. 적어도 몇 년간의 언론 스크랩 정도는 있겠죠?” “저… 그게. 먼저 어떤 것이 필요한지 말씀해주셔야 저희가….” 대개 대화는 이런 식이다. 여기에 한두 마디 더 섞인다. “제가 이 일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요. 죄송합니다.” 면전에 대고 죄송하다는데 화를 내기도 어렵지만 반복되는 이런 대화는 화를 돋운다. 관료들의 시혜적 태도를 탓하자는 것이 아니다. 태도를 탓해서 바뀔 문제였다면 장기 투쟁(보통 3년 이상을 말한다)을 ‘장기’라 부르지도 않았다. 결국 이 대화의 간극을 촘촘하고 분명하게 좁히지 못한다면 투쟁 기간은 더 길어지고 미제는 더 미궁 속으로 빠지고 사건은 사건대로 분절될 뿐 어떤 해법도 찾기 어렵다.

ⓒ그림 윤현지

쌍용차 정리해고 투쟁이 9년째다. 콜트콜텍 12년, 파인텍 홍기탁·박준호 굴뚝 농성 282일째(8월20일 기준) 투쟁 13년, 전주시청 김재주 고공 농성 351일(8월20일 기준), 세종호텔 7년, 하이텍 알씨디 코리아 13년, 씨그네틱스 세 번째 정리해고 투쟁, 풍산 마이크로텍 8년, 유성기업 10년, 아사히 글라스 4년 등. ‘노동판 장기미제 사건’으로 불러도 무방할 만큼 ‘가해자’에 대한 수사와 처벌이 이뤄지지 않은 채, 피해자들은 탄압과 신음 속에서 산다. 2009년 쌍용차 공장 점거 파업 때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말했다. 방어적인 말이었을 뿐, 서른 명의 목숨을 잃는 현실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피해자는 존재하는데 가해자가 없다

노동판 장기미제 사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개별 자본의 팔을 꺾어 답을 찾자는 말이 아니다. 여론을 등에 업고 화풀이하자는 발상은 더더욱 아니다. 물리적 증거가 부족하다면 가해자가 남긴 흔적과 단서, 행위의 특성, 심리 분석, 유사 사례의 데이터 분석을 통해서라도 놓친 것은 없는지 실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사람과 제도를 이제는 만들자는 얘기다. 쌍용차를 예로 든다면 해외 매각, 회계 조작, 대규모 정리해고, 국가 폭력, 노조 파괴, 손배 가압류와 그에 따른 서른 명의 죽음이 있다. 해고가 살인이었지만 살인자 검거에 실패했고, 피해자는 존재하는데 가해자가 없다. 용의선상에 올려놓은 용의자도 수사도 없었다. 놓친 건지 풀어준 건지도 분명치 않다. 첫 번째 죽음과 서른 번째 죽음 사이의 상관 여부도 밝혀진 바 없다. 사회적 부검도, 공동체적 신원 작업도 없었다.

프로파일러는 증거가 불충분한 강력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투입되는 범죄 심리 분석관이다. 일반 수사기법으로 해결이 어려운 범죄를 데이터 마이닝과 패턴 분석을 통해 단서를 찾고 심리학·사회학·범죄심리학을 공부한 사람이 맡는다. 노동자 대표 조직인 민주노총에서도 이 일을 맡고 있다. 그러나 담당자가 바뀌면 분석에 애를 먹고 담당자의 헌신으로 가까스로 대응하는 실정이다. 쌍용차 대량 해고 사건처럼 노동판 장기미제 사건을 언제까지 민간에만 맡길 텐가. 당사자 접근과 국가의 접근은 달라야 한다. 경찰청 인권침해 조사위원회도 의미가 있지만, 장기적인 면에서는 한계가 분명하고 안정적인 측면에서 취약하다. 특히 노동부 관료의 고백처럼 자료조차 없지 않은가. 국가 재정이 투입되어야 할 곳은 여기다. 노동 프로파일러가 근본 대책이 되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이제는 노동판 장기미제 사건에 대한 데이터 분석과 대책, 사태 해결의 책임이 국가에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기자명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전 기획실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