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연일 폭염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1년 전에도 이렇게 더웠나 싶어 작년 이맘때에 썼던 걸 찾아보니 ‘여름에 그늘이 되어주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다. 글의 말미에는 ‘폭염 가고 가을 와라’라고 적혀 있었다. 새삼 여름 더위는 오고 가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번에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더운 날들이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선풍기 하나면 꾸역꾸역 여름을 날 수 있던 때도 있었으나 이제는 에어컨이 없는 생활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소형 임대주택으로 이사하며 큰맘 먹고 산 에어컨을 여러 해 동안에는 고이 모시고 살았다. 주머니 사정이 뻔했다. ‘전기요금 폭탄’이라도 맞으면 어쩌나 싶었다. 그러나 요즘 같아선 전기요금 누진제니 뭐니 해도 일단 시원해지고 보자며 에어컨을 돌려대고 있다. 그게 최근의 나에게 가장 거창하고 확실한 행복이다. 지난날 한여름의 행복은 도시가스 요금이 1만원도 채 나오지 않아 관리비가 대폭 줄어드는 행복이었다.

 

ⓒ시사IN 조남진선풍기 하나로 꾸역꾸역 여름을 나던 때도 있었으나 이제는 에어컨이 없는 생활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얼마 전, 한 친구의 단편영화 상영회에 초대되어 다녀왔다. 일하며 번 돈으로 꾸준히 극영화를 찍어온 친구는 몇 해 전부터 셀프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다. 아마도 시간과 돈을 절약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번 영화는 선풍기 하나로 옥탑방의 더위를 견디며 ‘잠’자는 자기 자신을 30여 분 동안 찍은 다큐였다.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다가, 가동 중인 선풍기 앞에 얼음이 담긴 용기를 놓아두고 자다가, 그것으로도 역부족이었는지 점점 알몸이 되어가는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예술가 청년 노동자의 고난을 고스란히 전달받아 안타까운 심정이 되었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마침내 그가 더울 땐 더 덥고 추울 땐 더 추운 옥탑, 바닥에서가 아니라, 부모의 안락한 아파트에서, 침대에서 잠시나마 잠이 들자 괜히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나라고 그와 크게 다른 삶을 사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의 집에 없는 벽걸이형 소형 에어컨이 있었다. 비록 에너지 효율 등급이 떨어지는 제품이라고 할지언정, 이 더위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다.

상영회가 끝나고 위에 병이 있어 자극적이고 시원한 음식을 꺼리는 친구와 뜨끈뜨끈한 하얀 순두부를 나누어 먹으며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행히 이제 친구 집에는 소형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다고 했다. 이제 살 만하다고 했다. 에어컨이 없을 때는 살 만한 게 아니었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 친구의 집에 가본 적이 없고, 친구를 집에 초대해본 적이 없다. 아마도 그와 나는 누군가를 초대하기에 자신의 집은 좁고, 덥고, 춥고, 작다고 생각했을 테다. 그날, 에어컨을 계속 가동해도 식당 온도가 당최 내려가지 않는다며 식당의 더위를 미안해하던 주인의 얼굴이 낯설지 않게 느껴진 건 어째서일까.

‘닭백숙의 더위’는 얼마나 시원한 더위일까

입이 쓴 여름날이다. 여름 더위에 입이 달면 그게 더 이상한 거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든든하게 차려놓은 밥상 앞에 앉아서도 자꾸 달곰한 밥상의 너머를 생각하게 된다. 가령, 서늘한 그늘에서 푹푹 끓여 먹는 ‘닭백숙의 더위’는 얼마나 시원한 더위일까. 여름에는 부러 뜨거운 음식을 찾아 먹어야 한다며 택배로 삶은 닭을 꽁꽁 얼려 보내기도 했던 ‘부모의 마음’도 있었다. 그런 마음을 냉장고에 쟁여놓으면 며칠은 기운이 났다. 유난한 더위로 기억되겠지만, 밥상 너머에 누군가의 ‘누진제 없는 마음’이 있다고 여기면 또한 견딜 만한 힘이 나기도 할 테다. 선풍기도, 에어컨도 필요 없는 가을에 누군가와 함께 밥상에 둘러앉아 호박잎에 우렁된장을 발라 먹으며 영화적인 삶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염원하는 밤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더웠는지, 얼마나 추워질지. 폭염 가고 가을 와라.

기자명 김현 (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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