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2일, 사우디아라비아(사우디)는 신년 벽두부터 반정부 테러범 47명을 처형했다. 일견 국내 문제로 보였지만 옆 나라 이란이 극렬하게 반발했다. 테헤란의 사우디 대사관으로 몰려든 이란 군중들은 사우디 국기를 끌어내렸다. 사우디 정부는 즉각 단교를 선언했고 지금까지 양국 관계는 악화 일로다. 전쟁만 하지 않을 뿐이지 적개심은 최고조다. 좀 뜬금없어 보인다. 한 나라의 정부가 자국 내 테러분자를 처벌한 것이 옆 나라에서 왈가왈부할 일이던가? 왜 이란은 흥분했을까? 왜 사우디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단교하며 이란과의 긴장을 계속 고조시킬까?

사건을 들여다보면 실마리가 있다. 사형당한 테러범 47명 중에는 시아파 지도자 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시아파 고위 성직자인 아야톨라 셰이크 니므르 바크르 알니므르의 처형 소식은 놀라웠다.
 

ⓒEPA사우디아라비아에서 처형된 시아파 고위 성직자 알니므르의 초상화를 들고 항의 시위를 벌이는 이란 국민들.

알니므르는 존경받는 시아파 지도자였다. 그는 사우디 출신이지만 이란, 이라크 및 사우디 동부의 시아파 공동체에서 두루 영향력 있는 명망가였다. 알니므르는 사우디의 민주화와 선거를 요구하며 비폭력 투쟁을 했다. 그런 그를 사우디 정부가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며 흉악범과 함께 처형했으니, 이것은 시아파 사회에 대한 도발이었다. 시아파 성직자 그룹은 결속력이 공고하다. 다수인 수니파에 대한 저항의식과 국경을 초월한 위계질서가 두 축이다. 이란과 이라크, 그리고 사우디 동부의 시아파 성직자들은 하나의 뿌리로 연결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사우디의 관점은 다르다. 수니파 종주국을 자임하는 사우디 왕실은 왕국 동부 지역에 집중 거주하는 국내 시아파를 눈엣가시로 보았다. 왕실이 보기에 알니므르는 절대왕정을 부인하고 공화국 수립을 추구하는 분리주의 불순분자의 거두였다. 그리고 바다 건너 이란의 시아파 이슬람 혁명사상을 아라비아에 전파하는 대리인으로 보였다. 가만 놓아둘 수 없었다.

어쩌면 사우디는 이 사건으로 이란과 이라크 시아파들이 들고일어나 종파 간 대립 구도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이 사건이 있기 6개월 전 국제사회는 이란과의 핵합의를 타결한 후 기뻐했다. 사우디는 마음이 급했다. 이란의 부상을 더 이상 손 놓고 지켜볼 수 없었다. 결전을 각오했다고나 할까? 이후 사우디는 수니파 아랍 국가들을 결속시켜 반(反)이란 전선에 함께 나선다. 사우디가 이란 단교를 선언한 다음 날 바로 수단과 바레인이 동참했다. 아랍에미리트(UAE) 등 일부 걸프 국가도 이란 대사를 추방하고 외교 관계를 격하하는 등 이란을 압박했다.
 

ⓒAP Photo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월20일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를 만나고 있다

한 가지 명확히 해야 할 점이 있다. 이 사건이 사우디와 이란 양국 관계 악화의 결정적 실마리가 된 게 아니다. 이미 구조적으로 갈등의 내연(內燃)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충돌로 치달아가는 과정이었다. 이 사건은 그 구조 위에서 터져 나온 통과의례에 가깝다. 그렇다면 중동의 대표적인 두 나라, 사우디와 이란을 숙명적으로 대립하게 만든 갈등 구조란 무엇인가? 둘 사이에 지배와 피지배의 역사적 구원 관계가 있었던가? 서로 전쟁을 했던가? 아니면 심각한 영토 분쟁이라도 벌어지고 있나? 딱히 그렇지 않다. 어찌 보면 의아할 정도로 싸울 이유를 찾기 어렵다. 그렇다면 갈등은 어디서 시작된 걸까?

테헤란의 힘에 당황한 사우디 왕실

본질은 이란에 대한 사우디의 공포다. 공포의 근원은 둘이다. 첫째, 사우디의 지역 패권을 위협할 수 있는 이란의 잠재력이다. 이란 인구는 사우디 인구의 2.5배를 넘는다. 인적 자원의 수준도 높다. 여성의 교육 비율과 과학기술계 진출 등 각종 교육 지표에서 사우디보다 훨씬 앞서 있다. 이란은 오랫동안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고도 제조업 기반이 탄탄하다고 알려져 있다. 풍부한 석유와 천연가스 등 부존자원은 이란의 잠재력을 상징한다.

둘째, 이란의 혁명 체제다. 사우디 처지에서 더 큰 두려움은 이것이다. 이란은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 전까지만 해도 팔레비 샤가 이끌던 절대왕정 국가였다. 민족의 뿌리가 다르고 역사의 궤적이 달라서인지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쁠 이유도 딱히 없었다. 냉전 진영에서 두 나라 모두 미국의 맹방이었다.

호메이니의 혁명은 민주화 혁명이 아니라 이슬람 혁명이었다. 이란 성직자들은 신정체제에 기초한 공화국을 세웠다. 민주 공화국이 아닌 이슬람 공화국이라니 모순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란은 이것이 신의 뜻에 가장 부합하는 체제라고 자랑한다. 인간 개개인에게 부여된 자유의지와 판단력으로 지도자(대통령과 국회의원 등)를 선출하고 정책을 펴되, 이슬람의 가치에 어긋나지 않도록 필요할 경우 성직자들(이슬람 법학자들)이 지도·개입한다는 것이다. 즉, 주권의 원천은 신에게 있고, 이를 인간이 위임받아 대리하는 체제다. 물론 실제로는 성직자들에게 절대적 권한이 부여된 독재와 가깝지만, 어떻든 선거를 통해 주기적으로 권력을 교체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했다.

ⓒEPA이란의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고귀한 이슬람의 가치와 공화정이 결합된 이란 정치체제는 이슬람 세계에서 독특한 소프트파워를 갖게 된다. 이 모델은 신실한 무슬림 청년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쳤다. 강력한 이슬람 전통주의인 ‘와하비즘’에 입각해 나라를 세운 사우디로서는 이것이 매우 부담스럽다. 특히 사우디 동부 걸프 연안에 분포하는 시아파가 걸렸다. 사우디 왕실은 이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막아야 했다. 사우디는 그동안 수니 이슬람 전통주의의 끈을 단단히 조여왔다. 가차 없는 공포 통치를 바탕으로 이란발 불순 사상을 막아냈다. 그나마 맹방 미국이 이란을 견제하며 제재로 결박해놓았기에 어느 정도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냉전이 끝나고 팍스 아메리카나를 누리던 시기는 10년 남짓이었다. 2001년 9·11 테러는 중동의 역학관계를 뒤흔들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이란과 이라크, 북한을 테러 지원의 주범인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체제 변동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라크를 선제공격했다. 전쟁은 중동 질서를 바꿔버렸다.  

이라크 전쟁이 터지면서 이란은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다. 서쪽 접경국 이라크에는 미군이, 동쪽 접경국 아프가니스탄에는 미군과 나토군이 전쟁 중이었다. 북쪽 우즈베키스탄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남쪽 걸프 연안에는 미국 항모 전단이 수시로 이란 앞바다를 오갔다. 자국을 악의 축으로 적대시하는 초강대국 미국이 압도적 군사력으로 이란을 둘러싼 형국이었다. 바그다드 다음은 테헤란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왜 없었겠는가?   

결정적 반전이 일어났다. 전후 이라크가 미국이 원하는 안정적 민주주의 국가로 자리매김하지 못했다. 이라크는 시아파의 나라가 되었고, 미국은 안정화 작전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점차 반미감정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혼돈을 틈타 이란의 존재감이 이라크에서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압도적 무장력을 갖춘 미국의 존재는 위력적이었지만, 현지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체감하는 끈끈한 종파 연대감은 종류가 다른 힘이었다.  

 


수니·시아 종파 차이는 싸움의 ‘수단’일 뿐

이란의 영향력은 이라크를 거쳐, 시리아의 아사드 정부, 그리고 레바논 남부(헤즈볼라)로 이어지는 이른바 ‘시아파 초승달(Shiite Crescent)’ 회랑을 만들어낸다. 미국의 ‘확대 중동 구상(중동 민주화 구상)’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발 민주주의가 이란으로 확산되는 구상이었으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테헤란의 힘이 바그다드와 카불로 퍼져나갔다.

사우디 왕실은 당황했다. 이라크 전쟁이 판을 이상하게 끌고 간 셈이다. 완충 구실을 했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사라지면서, 사우디는 이란의 위협에 고스란히 마주해야 했다. 미군으로 둘러싸였던 이란이, 이제는 사우디 북부 모든 접경국가를 관통해 시아 벨트를 형성하면서 역으로 사우디 왕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2011년 아랍 전역을 강타한 정치 변동의 여파로 예멘 내전이 발생한다. 이는 이란 세력이 확산되는 또 다른 디딤돌이었다. 시아파인 후티 반군이 예멘 수도 사나를 점령하게 되자 사우디 남부 접경까지 이란의 존재감이 밀려들어온 것이다. 한번 위기가 오면 걷잡을 수 없다던가? 한 배를 탔던 걸프의 왕정 국가들 중 카타르는 노골적으로 사우디와 각을 세우기 시작했고, 오만은 애초부터 애매한 중립지대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사우디는 이란에 둘러싸인 형국이다. 사면초가(四面楚歌)가 아닌 사면(四面) ‘이란’가(歌)를 듣고 있다고나 할까?

미국에 오바마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을 빼내기 시작했다. 이란의 존재감은 더욱 강해졌다. 역내에서 사우디와 터키 정도를 제외하고 군사적으로 이란을 견제할 능력을 갖춘 나라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더욱이 핵 개발 의혹이 맞물리면서 중동의 패권이 이란으로 넘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역내 각국에 퍼졌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 오바마는 이란에 대한 강도 높은 제재를 펼쳤고, 경제난을 겪은 이란 유권자들은 미국과의 대화를 지지하는 중도파 로하니 대통령을 선출했다. 이후 상황은 급진전해서 2015년 7월 역사적인 이란 핵합의(JCPOA)를 타결하게 된다.

사우디는 더 불안해졌다. 이라크 전쟁에 이어 또 다른 미국발 역설과 마주한 것이다. 제재 압박을 강화해서 이란을 못 견디게 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체제 교체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갑자기 미국과 국제사회가 이란과 덜컥 합의를 해버린 것이다. 사우디로서는 핵을 가진 이란보다 국제사회에서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이란이 더 불편하다. 제재가 해제되어 무역과 경제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이란의 인력과 물자가 자유롭게 이동하게 되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나라가 바로 사우디이다. 이란 체제가 갖는 독특한 힘, 이슬람 혁명사상이 담긴 정치적 소프트파워가 사우디로 스며들 경우 왕실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 사우디로서는 이란이 계속 국제사회의 악당으로 남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나마 사우디 왕실에게는 불행 중 다행이랄까? 상황을 반전시킬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새롭게 출범한 트럼프 정부가 이란 핵합의를 파기하면서 이란을 다시 코너로 몰고 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는 사우디는 혼신의 힘을 다해 이란 견제에 나서고 있다. 사우디 왕실은 트럼프 대통령 중동 순방 때 1100억 달러 무기 구매라는 선물을 안겼다. 친이란 행보를 보이는 카타르와 전격 단교 및 금수 조치까지 해가며 반(反)이란 세력 규합에 나섰다.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사우디는 예멘의 시아파 반군에 대한 공습도 거세게 지속하고 있다. 심지어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처럼 이스라엘과도 기꺼이 대이란 군사 협력을 할 기세다.     

사우디와 이란의 갈등은 중동 지역 분쟁들의 등뼈에 해당한다.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예멘, 걸프 등 중동 지역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분쟁은 결국 사우디와 이란 간 갈등과 어떤 식으로든 이어져 있다. 양강의 힘겨루기가 지역 전체의 불안정성을 견인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사우디와 이란의 힘겨루기는 수니파와 시아파의 싸움, 즉 종파 분쟁이다. 그러나 종파가 전부는 아니다. 싸움의 이면에는 지역 패권을 둘러싼 힘의 경쟁이 얽혀 있다. 기존 질서와 자국의 영향력을 지키려는 사우디와, 새롭게 세력을 규합해서 패권에 도전하는 이란의 대립이다. 이 구도에 양국 모두 종파를 도구로 끌어들여 분쟁의 불쏘시개로 사용한다. 수니와 시아의 교리 차이 때문에 갈등이 일어난다기보다는, 분쟁을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동원의 수단으로 종파가 활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쟁을 진정시키고 평화를 도출할 해법은 어디에 있을까? 종파나 민족 갈등이 본질이 아니라 세력 전이, 즉 힘의 문제가 핵심이라면 답은 하나다. 힘의 균형을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다. 어느 한쪽이 압도적으로 지역 패권을 독점하지 않는 균형점이 만들어져야만 잠정적 평화의 실마리를 마련할 수 있다.

쉽지는 않다. 1979년 이란 혁명 이전의 시점으로 되돌리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평화 분위기 조성의 경험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9·11 이전까지 이란의 개혁파 대통령 모하마드 하타미와 사우디의 온건파 국왕 압둘라(당시 왕세자이자 파드 국왕의 유고로 인한 실질적 권한대행) 사이에 조성되었던 화해의 기조는 되짚어볼 가치가 있다. 결국 리더십의 의지와 결단이 중요 변수다. 물론 미국의 행보도 중요하다. 

기자명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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