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클베리핀 이기용이 만난 뮤지션 -15 짙은

뮤지션 ‘짙은’의 목소리는 호소력 있으면서 과하지 않은 아름다움이 있다. 몇 년 전 제주에서 만든 노래의 녹음을 위해 많은 남자 보컬리스트의 노래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도 오래 머리에 남은 것은 오직 짙은의 목소리뿐이었다. 국내에서 흔히 찾기 어려운 음색이고 한번 들으면 멈춰 서서 계속 귀 기울이게 되는 목소리이다. ‘당신을 둘러싼 바다와 하늘/ 푸르게 푸르게 빛나고 있는데/ 당신만 어둡게 그 어둠 속에서/ 기억나지 않는 무엇으로.’ 이 곡은 그가 사진의 역광 효과에서 영감을 받아 최근 발표한 ‘역광’이라는 노래의 가사 일부이다. 2008년 데뷔한 이래 그는 많은 곡에서 이처럼 사랑에 관한 그만의 시각으로 감성 깊은 가사를 써왔다. 지난해 우주를 테마로 한 콘셉트 앨범 〈UNI-VERSE〉를 발표한 그는 기존 포크 기반의 모던록 스타일 음악에서 벗어나 크고 웅장한 사운드를 보여주었다. 어느덧 국내 대형 음악 페스티벌에 매해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리는 솔로 뮤지션이 된 그의 변모한 음악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짙은 제공
올해로 데뷔 10주년을 맞은 ‘짙은’은
8월17~19일 서울에서 단독 콘서트를 연다.

이기용: 한때 고시 준비도 한 걸로 들었다. 뮤지션이 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했나.

짙은: 시험은 안 봤지만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외무고시를 준비했다. 그러다 풀뿌리민주주의에 관심이 있어 비정부기구(NGO)나 장애인 재활 관련 재단 등에서 잠시 일도 하고. 결국 음악이 내 기질에 맞는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었지만(웃음). 내 첫 인터뷰는 뮤지션으로서가 아니라 NGO 활동
당시 ‘신촌 민회’ 사무국장으로서 한 것이었다.

이기용: 본인의 사랑 노래들이 많은 호응을 받고 있다. 무엇 때문인 것 같나?

짙은: 아마 사람들이 뻔하지 않고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사랑 노래를 듣고 싶어 하기 때문이 아닐까. 음악 시장에는 ‘너무 신파가 아닌 사랑 노래’를 위한 시장이 있는 듯하다. 나는 사랑 노래에 좀 더 진지한 고찰이나 상징 같은 걸 넣는데 팬들이 그런 부분을 좋아하더라. 개인적으로는 많은 음악이 좀 더 문학적이고 지적이고 은유적이면 좋겠다.

이기용: 본인의 사랑은 어떤 편인가.

짙은: 고차원적이고 완성적인, 어떤 존재하지 않는 사랑. 나한테 사랑은 좀 그런 의미다. 그러다 보니 물 흐르듯 연애하지 못하고 자꾸 더 스스로를 힘들게 만드는 것 같다(웃음). 이룰 수 없는 어떤 고차원적인 사랑을 상정해놓고 거기에 맞춰서 그런지, 내 사랑이나 감정이 무척 어렵고 힘들고 초라해질 때가 있다. 여전히 나는 사랑에 미숙하다. 사실 아티스트에게 사랑이 너무 쉬운 것도 좀 이상하다. 뮤지션으로서의 나는 어쩌면 사랑을 계속 모르려고 하는 것 같다.

이기용: ‘스위트’의 대명사 같은 짙은이 2집에서는 우주를 소재로 음악을 만들었다.

짙은: 사람들이 나의 내밀한 이야기, 사랑이며 이별 이야기를 많이 좋아해서 ‘so sweet’한 노래의 대명사가 되었는데(웃음), 나는 내가 스위트한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고 규정지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 음악들이 인기가 있어도 그건 내 음악의 중심이 아니라고 항상 생각했다. 반대로 좀 더 진지하게 예술적 표현을 하는 음악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건 있었다. 그런 부분을 부각한 음반이 지난해 나온 〈UNI-VERSE〉이다.

이기용: 이번 2집을 보면서 기존에 쓰던 단어 대신 좀 생경한 말들을 썼다는 느낌을 받았다.

짙은: 만약 내가 학교에서 좋은 가사가 무엇인지 가르친다면 입에 잘 붙는 단어들로 이야기 구조가 확실한 노랫말이 좋은 가사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지난 10년 동안 충분히 그런 가사를 써왔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한 발짝 비켜나 생경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가사로 들려주고 싶었다. 예를 들어 ‘기억의 궁전’이라는 곡에서 ‘기억은 궁전처럼 크고 부드러운 절대 권력의 왕이네/ 후회도 희망들도 내겐 아무런 선택권이 없는’이라고 했다. 사람은 결국 기억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기억을 ‘절대 권력의 왕’으로 비유해 표현한 것이다. 예전 같으면 쓰지 않을 노랫말들이다.

이기용: 짙은의 멜로디는 매우 유려하고 매력적이다. 사운드, 리듬, 가사 등 음악의 여러 요소 가운데 멜로디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떻다고 생각하나?

짙은: 최근 앨범에서는 다른 시도도 했지만 예전에는 멜로디가 전부라고 여겼다. 멜로디가 음악을 결정짓고, 좋은 멜로디를 쓰는 것이 좋은 곡을 쓰는 거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나는 멜로디주의자였다(웃음). 〈배틀 그라운드〉라는 게임이 있다. 100명이 뛰어내려 총을 주워서 싸우는 게임인데, 배경음악으로 프랭크 시내트라의 ‘My Way’가 나온다. 보통은 광고를 15초 정도로 자르는데, 이 게임은 광고를 노래 끝날 때까지 보여준다. 그런데 유튜브에서 프랭크 시내트라의 ‘My Way’를 검색하면 요즘 젊은이들의 댓글이 정말 많다. 광고 보면서 처음 들어본 노래인데 너무 좋았다는 것이다. 역시 위대한 멜로디의 힘은 크다는 걸 깨달았다. 나도 다시 들어보면서 ‘이게 이렇게까지 좋은 노래였던가’ 할 정도였다. 그렇게 아름다운 구성의 멜로디는 분명 존재한다고 본다.

이기용: 짙은 음색이 굉장히 색다른 매력이 있다. 매우 깊고 시적이다. 본인은 자신의 음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짙은: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한다거나 음색이 좋다는 평가를 받은 적이 없다.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주위에서 알아봐주는 사람은 윤형로(짙은의 음악 동료, 프로듀서)가 유일했다. 그 전까지는 내 노래를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내가 잘한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노래 자체를 잘하려 하기보다는 최대한 음악이 가진 감정이나 에너지에 집중하려고 한다. 그럴 때 사람들은 내 목소리에 좋은 느낌을 받는 것 같다. 나는 보컬은 발성이나 호흡이 아니라 감정과 집중력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무대에서 한 번을 부르더라도 온몸과 마음을 집중해서 부르려 한다.

이기용: 올해로 데뷔 10년이 되었다. 데뷔 초와 비교해 어떤 변화가 있는가.

짙은: 처음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교본이 있는 것처럼 거장들의 음악, 동시대 음악을 계속 의식하고 비교하고 답습하려 했다. 즉 ‘요즘은 이게 아름답지, 음악은 이래야지’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런 걸 많이 내려놓았다. 아름다움에 대한 교본을 버린 거다. 예전에는 숙제하는 기분으로 정답 맞히는 심정으로 음악을 조합했다면, 지금은 그냥 자연스럽게 내 안에서 나를 대변하는 무언가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뮤지션이 모두 천편일률적인 방식으로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면, 더 새로운 노래를 찾아 들어야 할 이유는 작아질 것이다. 그러나 다른 언어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짙은 같은 뮤지션 덕분에 우리는 음악 안에서 사랑에 대한 더 많은 진실을 보게 되는지도 모른다. 올해 데뷔 10주년을 맞은 짙은은 8월17∼19일 사흘간 서울 동덕여대 공연예술센터에서 단독 콘서트를 연다.

기자명 이기용 (밴드 허클베리핀 리더)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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