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취업알선 회사에서 다시 연락이 온 건 그로부터 한 달 뒤였다. “서류 전형 합격했던 M사에서 현재 통역 업무를 구하고 있으니 지원해달라.” 전공을 살릴 수 있는 기회였다. 전형이 진행되는 동안 웹사이트 ‘야후 재팬’에서 블랙 기업(악덕기업) 여부도 나름 알아봤다. 준비를 마친 지난해 10월, 조씨는 일본 도쿄 신주쿠로 향했다.
한 층에 여섯 명이 함께 사는 숙소는 회사가 구해줬다. 월 4만 엔(약 40만원)을 내야 했다. 세면대, 화장실, 샤워실이 하나씩밖에 없었다. 출퇴근 시간만 두 시간이 걸렸다. 오전 7시에 집을 나서 밤 12시에 돌아오는 일상이 반복됐다. 조씨보다 먼저 입사했던 한국인 동료는 연차를 써본 적이 없다고 했다. 결국 보름 후, 퇴사를 통보한 조씨에게 M사는 10만 엔(약 100만원)을 배상하라고 했다. 조씨의 취업비자 발급을 위해 회사가 고용한 행정사(기업이나 비자 신청자의 의뢰를 받아 서류 업무를 대행하는 사람)에게 지급한 돈이라고 했다.
조씨는 한국인 동료와 상의 끝에 일본 노동법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계약서에 없는 벌금 요구는 불법이라는 조씨의 지적에 회사 관계자는 “정말 벌금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라며 한발 물러섰다. 문제가 불거지자 이 해외 취업알선 회사는 올해부터 일본 M사 취업알선을 중지한 상태다.
우여곡절 끝에 퇴사했지만 이대로 한국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일본 취업비자는 퇴직 후 3개월 동안 유효하다. 그 안에 새로 취업을 하지 않으면 비자 발급이 복잡해진다. 3개월간 취업박람회를 모두 쫓아다니며 스무 곳이 넘는 회사에 서류를 넣었다. 생활비가 떨어지면 한국계 기업이 하청받은 공사 현장에서 일했다. 취업비자 소지자는 퇴직 후 재취업 기간에 아르바이트를 할 수가 없다. 사정을 알고 있는 공사 현장에서는 일당을 현금으로 지급해줬다. 조씨는 결국 지난 2월 한국에 돌아왔다.
“취업 위한 과목 있어도 노동법 교육은 없어”
면세점 업무는 이씨의 기대와 달랐다. 면세점은 한국인 관광객들을 주로 상대했다. 매니저 역시 한국인이었다. 출근 첫날, 두꺼운 상품 안내책자 한 권을 받았다. ‘내일까지 외워오라’는 지시였다. 어떤 건강식품이 몸에 어떻게 좋은지 한국어로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판매직 특성상 주말에 쉬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루 12시간 가까이 서서 손님을 응대했다. 일본 노동법은 주 40시간 이상의 근무를 금지하고 있다. 1년 단위로 갱신되는 노사 합의가 있을 경우에만 연장 근무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씨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직무에 비전이 없다고 판단한 이씨는 한 달여를 버티다 결국 퇴사했다.
조씨나 이씨처럼 일본 취업에 도전하는 젊은이가 늘고 있다. 경기 개선 효과와 인구 감소가 겹치며 일본은 실질적인 완전고용 상태가 되었다. 자국 대학 졸업생들에게 ‘우리 회사에 지원해달라’고 부탁하는 입장이 된 일본 기업들은 해외 인력에 눈을 돌렸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일본 내 한국인 노동자 수는 지난해 5만명을 돌파했다. 일본으로 출국하는 구직자들은 대체로 ‘전공을 살리고 싶어서’ ‘한국보다 노동환경이 좋다고 들어서’ 일본 취업을 결정한다. 그러나 일본 현지에 지사를 둔 IT 업체 사장 서 아무개씨의 평가는 다르다. 서씨에 따르면 한국인 프로그래머들은 일본의 파견회사에 소속되어 프로젝트별로 다른 곳에 배치된다. 전공 관련 경력을 쌓을 수 없는 업무를 맡게 되는 경우도 잦다.
업무 중 문제가 발생할 때 구제 방법을 가르쳐주는 곳도 드물다. 조씨는 “만약 일본어가 미숙하거나 일본 자체가 낯선 사람이라면 나처럼 대응하기는 힘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본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노동문제를 상담하는 나카무라 이치로 노무사는 “한국인들이 일본의 노동법에 대한 전반적 지식이 없는 상태로 입국한다”라고 지적했다. “한국 근로기준법이라도 제대로 배우고 일본에 왔다면 말이 안 되는 상황에서는 부당함을 느낄 텐데, 한국의 대학에서는 취업을 위한 과목은 개설하면서 노동법에 대한 교육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고용노동부와 외교부는 지난 6월17일 2023년까지 일본 기업에 한국 청년 1만명의 취업을 지원하는 ‘한·일 이음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청년들의 해외 취업을 지원하기 위한 케이무브(K-move) 사업의 연장선이다. 정부는 2013년부터 각 부처의 해외 진출 프로그램을 케이무브 사업으로 통합하고 해외 취업알선, 진출 희망자 멘토링, 구직자 홍보 등을 지원했다. 당시 노동부는 해외 취업자에게 현지 정착지원금을 제공하고 지급 기간 확대 등 사후 관리를 철저히 하겠다고 밝혔지만, 일본에 취업한 한국인의 평균 근속기간이나 업무 만족도에 대한 기본 통계조차 없는 상황이다. 케이무브 센터 관계자는 “해외 취업은 국내와 달리 고용시장이 유연하여 이직이 잦으며, 취업자의 연락 단절, 고용보험 데이터베이스 부재 등의 이유로 전체 취업자에 대한 정확한 근속기간 파악이 어렵다”라고 설명했다.
-
애들이 죽어나는데 취업률만 높이라니
애들이 죽어나는데 취업률만 높이라니
임지영 기자
“현장실습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게 세 번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특성화고 졸업생 복성현씨가 눈물을 흘렸다. 재학 중 세무사 사무실에서 현장실습을 한 복씨는 업체 직원에게 “학생...
-
최저임금 올랐는데 월급은 왜 그대로지?
최저임금 올랐는데 월급은 왜 그대로지?
전혜원 기자
최근 무료 노동 상담을 진행하는 ‘직장갑질 119’ 오픈 카카오톡 채팅방(gabjil119.com)에는 이런 질문들이 부쩍 자주 올라온다. “새로운 근로계약서에 기존 지급하던 식대...
-
지원자 이름과 청탁자 이름이 나란히
지원자 이름과 청탁자 이름이 나란히
주진우·김은지 기자
강원랜드 채용 비리를 수사한 안미현 검사가 받은 수사 외압의 구체적인 실체가 〈시사IN〉 취재 결과 확인됐다. 안 검사는 채용 비리 사건의 핵심 실체를 보여주는 대포폰(차명 전화)...
-
청년수당이 바꾼 청년의 삶
청년수당이 바꾼 청년의 삶
임지영 기자
“치킨 먹어도 되나요?” 지난해 청년수당 사업을 담당한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가 많이 받은 질문이었다. 카드 결제가 가능한 대부분의 곳에서 써도 된다고 답하자 다시 물었다. “프라...
-
서울아산병원 간호사가 숨진 지 반년이 지났다
서울아산병원 간호사가 숨진 지 반년이 지났다
강은 인턴 기자
서울아산병원은 자신들의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지난 2월 박선욱 간호사 사망사건 이후 병원은 자체 감사팀을 꾸렸다. 〈시사IN〉이 확인한 감사보고서 결론 가운데 다섯 가지는 이렇...
-
잘 먹고 잘 사는 노동법 이야기
잘 먹고 잘 사는 노동법 이야기
장일호 기자
병원에서 전화가 오기에는 다소 늦은 시각이었다. 의사는 검사 소견을 전하며 내일이라도 당장 병원으로 오라고 재촉했다. 되물었다. “이렇게 아무런 증상이 없을 수도 있나요?” 김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