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특수공작원 출신 박채서씨는 ‘흑금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특수공작 일대기를 담은 영화 〈공작〉이 개봉되었다. 2권짜리 책 〈공작〉도 출간됐다. 저자는 박씨를 원 〈시사저널〉 때부터 취재했던 김당 〈UPI 뉴스〉 선임기자다. 박씨는 원래 국군정보사령부 대북 공작관이었다. 박씨의 공작 능력에 주목한 국정원이 그를 스카우트했다. 그는 북한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에 위장 침투해 1997년 6월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까지 만났다. 그를 만나 파란만장한 생애와 대북 특수공작 활동의 이면을 들었다.

박씨는 충북 청원 출신으로 1977년 육군 제3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육군 소위로 임관했고 육군대학 졸업식 때는 참모총장상을 받을 만큼 뛰어났다. 1990년 소령 계급장을 달고 국군정보사령부 공작단 본부에 배속됐다. 그는 정보사에서 한미합동공작대(902정보대)에 파견된다. 당시 그는 미국 정보 요원들과 함께 북한 핵개발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했다.

ⓒ시사IN 윤무영북한에 군의 작전교범 등을 전달한 혐의 등으로 구속된 박채서씨는 2016년 6월 만기 출소했다. 그는 재심을 청구할 계획이다.
“3년 공작 끝에 1992년 4월경 중국과학기술대학에 적을 둔 한 교수를 포섭했다. 그로부터 북한이 저급한 수준의 핵탄두 2개를 개발했다는 정보와 근거자료를 입수했다.”

박씨는 그 교수에게 공을 들여 접근한 뒤 남한에서 열린 한반도 세계평화포럼에 초청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공조한 포섭 공작이었다. 당시 CIA는 북핵 개발 정보를 제공한 대가로 그 교수에게 현금 100만 달러와 두 자녀의 미국 시민권 및 유학을 제공했다고 한다. 박씨는 미국 정부가 북한 핵개발 정보를 한국 정부와 공유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숨겼고, 그 결과 김영삼 대통령(YS)은 2년 뒤인 1994년 6월 1차 북핵 위기가 터질 때까지 북핵에 대해 몰랐다.

“한미합동공작대에서 한국 측은 권한이 없었다. 상부에서 양국이 정보를 공유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미국 말 잘 듣는 안기부 측이 차단한 것으로 의심된다. YS가 핵개발 정보 알았다면 가만있을 사람이 아니다.”

ⓒ박채서 제공1995년 5월 평양에 있는 김일성 주석 동상 앞에서 찍은 ‘흑금성’ 박채서씨 기념사진.
정보사 요원들의 해외 파견은 지금도 계속된다. 2016년 류경식당 여종업원 12명 탈북 사건 때도 정보사 공작원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났다. 이에 대해 박채서씨는 해외 공작에 파견된 정보사 요원은 국정원 소속이라 속이고 활동한다고 밝혔다. “정보사는 해외 공작을 하면 안 된다. 장교들이 해외에 나가 공작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고, 자칫하면 복잡한 외교 문제가 발생한다.”

박씨는 한미합동공작대에 3년여 근무하는 동안 일부 한국 지도층의 추악한 실상도 목격했다. “한국 각계각층 저명인사 380명이 미국 공작원으로 일하더라. 미국은 그들을 시민권으로 포섭했다. 그 실태를 은밀히 조사해 정보사에 보고했더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가 주력한 공작 사업은 중국을 무대로 벌인 북한 ‘포대갈이 사업’과 조총련계 재일동포를 통한 우회침투 공작이었다. 포대갈이 사업이란 중국산 농산물을 북한 남포항으로 싣고 가 포대만 북한산으로 바꾼 뒤 국내로 들여오는 공작을 말한다. 박씨는 이 과정에서 당시 북한 실세 장성택의 조카 장현철과 라인을 구축했다. 장현철은 장성택의 형 장성우(2009년 사망)의 아들이다.

박씨는 장성택·김경희를 공작 목표로 접근하면서 안기부 도움으로 포대갈이 사업을 적극 이용했다. 장현철한테 16만 달러어치 농산물을 수입한 뒤 인천세관에서 통관 불허토록 조치했다. 이 일로 장현철은 중국 공안에 구금됐다. “장성택·김경희 집안이면 16만 달러 정도는 쉽게 만들어 구금을 막을 거라 생각했는데 못 만들더라. 북에서는 아무리 고위직이라도 외화를 맘대로 못 만지는 걸 확인한 것이 공작 성과였다. 우리가 그걸 해결해주는 조건으로 중국 공안이 장현철을 풀어줬다. 당시 북한군 중장 장성우는 자기 아들을 살려줬으니 얼마나 고마웠겠나. 나중에 그 고마움에 대한 답례로 내 평양 방문이 성사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남북 양측으로부터 신임 얻어

이런 박씨의 공작을 안기부가 눈여겨보았다. 1995년 3월 안기부는 그를 스카우트하고 정보사로부터 사업 전체를 턴키방식으로 넘겨받았다. 박채서씨는 이때부터 안기부 해외공작실 소속 공작원(암호명 흑금성)으로 대북 특수공작에 투입됐다. 정식 인가 공작이었다. 인가가 난다는 건 대통령 또는 안기부장 승인 아래 국가 예산과 행정력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사업으로 추진한다는 뜻이다. 공작 전반이 국내법상 보호를 받는다.

박씨는 ‘아자커뮤니케이션’이라는 광고회사 전무로 위장 취업했다. 사업가로 위장한 그는 남북 합작 광고를 찍는 사업을 추진하며 북한을 오갔다. 그리고 북한 보위부에 포섭당해 ‘이중 스파이’로 공작을 벌일 계획이었다. 그는 보위부에 위장 포섭되면서 남북 양측으로부터 신임을 받아나갔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의 여동생 김경희는 묘향산 국제친선관람관 별관에 소장돼 있던 골동품 처분을 관장하고 있었다. 이를 제값에 매각해줄 신뢰할 만한 파트너를 찾던 중 장성택 라인에 선을 댄 박채서씨가 눈에 띄었다. 박씨는 고려청자 등 골동품 6점을 받아 서울로 반입해 비싼 값에 처분해주었다. 또 감정사를 데리고 북한으로 가서 감정 능력에 신뢰를 심어주었다. 이 모든 과정이 안기부 협력 속에 이뤄졌다.

박채서씨의 특수공작 성과에 청와대와 안기부는 고무됐다. 결정적으로 북한 수뇌부에 정보기관의 공작이 접근되지 않던 전례를 깼기 때문이다. 1996년과 1997년 연속 안기부가 공작원들을 평가해 수여하는 포상에서 박채서씨가 최우수자로 선정됐다. 각각 4000만원과 5000만원의 포상금을 받았다. “묘향산 골동품 처분 공작은 안기부에 엄청난 성과였다. 통치 비자금을 만들려는 김정일 위원장 입장에서는 보위부를 통한 나에 대한 검증뿐 아니라 내가 골동품을 받아다 처리하는 과정을 확인하고 ‘틀림없는 우리 사람이다’는 보고가 위로 올라가니 한번 보자고 했다.”

박씨는 1997년 6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을 접견했다. 남한 정보기관의 공작원이 북한의 최고위층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김 위원장은 박씨에게 30분에 걸쳐 세 가지 사항을 얘기했다. 아자커뮤니케이션 광고사업과 묘향산 골동품 처분에 대한 격려와 치하였다. 나머지 한 가지는 뜻밖에도 남한 대선 이야기였다. “남조선의 12월 대선이 공화국을 위해 매우 중요하니 관계 사업일꾼들과 합심해서 열성적으로 공작해달라고 주문했다. 그 뒤 조평통 안병수 부위원장과 강덕순 참사를 만나 대선 토론을 했다.”

이 과정에서 박씨는 북한 수뇌부가 한국 대선에 개입하려 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북한은 예상과 달리 김대중 후보를 가장 껄끄러워했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김 후보는 북한이 다루기 어려울 정도로 노련한 인물이고, 둘째, 김 후보가 당선하면 용공분자 이미지를 불식하려고 더 강한 반공정책을 펼 가능성이 높다는 점, 셋째, 북한 인민들에게 김대중 후보를 민주투사로 선전해왔는데 그가 대통령이 되면 비방할 명분이 줄어든다는 점이었다. 이회창 후보도 아버지가 골수 친일파였다는 이유로 거부감을 강하게 보였다. 북한은 당시 이인제 후보를 가장 선호했다.

박씨는 귀국 후 안기부에 김정일 위원장 면담 결과와 대선 개입 의지를 보고했다. 그런데 권영해 안기부장은 이회창 후보를 밀고 있었다. 김영삼 청와대는 이인제 후보를 지원했다. 특히 권영해 부장의 이회창 후보 지지 배경에 미국이 있다는 첩보가 나돌았다.

박씨는 고민에 빠졌다. 남북 수뇌부 양쪽에서 자신을 끌어들이려는 대선 공작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박씨는 평소 잘 아는 기자를 통해 김대중 후보 캠프 대변인 정동영 의원을 소개받았다. “정동영씨한테 북한이 왜 김대중 후보를 싫어하는지, 그리고 김대중 낙선을 위한 첫 번째 공작으로 천도교 교령 오익제 월북사건부터 줄줄이 터지게 될 것이라고 귀띔해줬다.”

그러나 정동영 의원은 처음에는 그의 제보를 안 믿었다고 한다. 아무 연락이 없다가 그해 8월 오익제 천도교 교령이 월북했다는 뉴스가 뜨자마자 정 의원이 박씨를 찾았다. 당시 박채서씨는 광고사업 협의차 평양에 있었다. “보위부 안내로 만경대에 갔는데, 오익제가 거기 와 있더라. 북한 보위부장이 오익제를 소개해줘서 같이 기념사진을 찍은 뒤 돌아왔다. 와보니 김대중 후보 쪽은 안기부의 기획 월북이라 하고, 권영해 부장은 정동영 의원을 고소한다고 하고 난리도 아니더라.”

정동영 의원과 박채서씨는 다시 만났다. 이 자리에 정동영 의원은 군 출신인 천용택 의원을 동반해 나왔다. 천 의원이 박채서씨의 신분을 안기부에 확인하는 과정에서 안기부 감찰실에 박씨가 야당 의원을 만난다는 사실이 노출되기도 했다. 박씨의 윗선이었던 안기부 공작관은 야당 의원과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무마해줬다.

선거가 임박할수록 박씨가 처음 제보한 안기부발 북풍 공작 시나리오가 하나씩 실체를 드러냈다. 김대중 캠프는 다급해졌다. 1997년 11월5일 밤 김대중 후보가 직접 박씨를 만났다. 김 후보는 북풍 공작을 막아달라고 그에게 요청했다.

“김대중 후보가 탄 차에 오르자마자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박 선생, 대통령이 되고 싶소. 그런데 북풍을 못 막으면 난 안 되오. 박 선생이 도와주시오.’ 그 말만 김대중 후보가 하더라. 나는 ‘알았습니다’ 외에는 아무 말 안 했다.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본심 이상 솔직한 게 어디 있나. 만약 김 후보가 국가와 민족 이런 거창한 말 꺼냈으면 안 나섰을 거다.”  

박씨가 수집한 안기부의 대선 공작 관련 정보는 1997년 대선 때 북풍을 막는 데 기여했다.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쪽이 북한에 무력시위를 제안한 총풍(銃風) 사건 정보를 파악해 김 후보 쪽에 알렸다. 박씨는 또 안기부의 김대중 후보 낙선을 위한 북풍 공작이었던 ‘아말렉 공작(재미동포 윤홍준의 김대중 후보 비방 기자회견)’도 사전에 알려 무력화했다.

“북풍을 막으려면 권영해 부장을 막아야 한다고 김대중 캠프에 조언했다. 내가 북한 묘향산 골동품을 받아 처리할 때 그 비용 가운데 일부가 권 부장과 관련한 뒷돈이 있었다. 천용택 의원이 당시 권영해 부장을 찾아가 북풍 공작에서 손 떼지 않으면 묘향산 골동품 비리를 폭로하겠다고 담판해 결국 막아냈다.”

1997년 12월 대선에서 근소한 표 차로 김대중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당선했다. 하지만 박씨는 공작원으로서 활동을 더는 할 수 없었다. 김대중 정부 초기 1998년 3월 북풍 공작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권영해 안기부장과 이대성 해외공작실장 등이 자신의 공작을 은폐하려고 ‘해외공작원 정보 보고’를 짜깁기해서 만든, 이른바 ‘이대성 파일’을 언론에 공개했다. 이 파일 공개로 안기부 수뇌부가 인가한 대북 특수공작원 흑금성 신분도 노출되었다. 신분을 가리고 활동하던 ‘블랙 요원’이었던 그의 신원이 노출된 것이다. 결국 박채서씨는 1998년 6월 위로금을 받고 안기부에서 해직되었다.

“재심을 청구하겠다”

공작원이 사회에 나와서 할 일은 별로 없었다. 박씨는 중국으로 건너가 사업을 모색하는 한편 한때 자신의 보위부 연락책을 만나 남북 협력 광고 사업을 재추진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에는 남한 톱스타 이효리와 북한 무용수 조명애가 함께 등장한 남북 합작 광고 제작에도 관여했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 6월10일 새벽 그는 자택에서 국정원 요원들에게 체포되었다. 북한에 군의 작전교범 등을 전달한 혐의 등으로 2010년 6월 구속 수감돼 이듬해 징역 6년 형이 확정됐다. 박씨는 2016년 6월 만기 출소했다.

기자에게 6시간 동안 공작 활동의 비화를 털어놓은 그는 재심을 청구하겠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공작원으로서 본분을 어기고 ‘간첩질’을 했다는 얘기는 진실도 아니고, 내 인생과 자존심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다. 공작원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으면 어떤 공작원이 사명감을 가지고 국가를 위해 음지에서 일하겠는가?”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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