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은 이런 정치인이었습니다
  • 천관율 기자
  • 호수 568
  • 승인 2018.08.06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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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은 진보적 이상과 현실주의가 만날 접점을 탐색하는 탐험가였다. 노회찬의 촌철살인은 유머 감각이나 성품보다
더 깊은 무언가를 보여준다. 그는 진보 정치가로 생을 마감했다.

노회찬은 낯을 가린다. 방송에서 익히 보던 촌철살인의 노회찬은 마주 앉으면 온데간데없다. “평소에는 지독하게 샤이(shy)하다. 술이 들어가면 달변가가 된다. 다방면에 취향이 풍부해서 청산유수인데, 방송에서의 촌철살인 화법과는 또 다르다.”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그의 빈소에서, 지인들은 이렇게 그를 묘사했다.

ⓒ이상엽

노회찬(1956~2018). 용접공, 노동운동가, 진보 정치인. 그리고, 낯가리는 촌철살인의 대가. 이 조합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다. 그는 왜 쉽고 짧고 재치 있는 말을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거의 집착이라 느껴질 정도로 촌철살인을 추구한 이유는 뭘까? 지도자로는 가벼워 보일 위험을 알면서도? 

노회찬은 의외의 장소에 단서를 남겨뒀다. 2014년 1월, 그는 고등학생들이 만든 인문비평 공동체 IRIS와 4시간짜리 인터뷰를 한다. 그는 갓 입시를 마친 예비 대학생들 앞에서, 짧고 재치 있는 메시지에 담긴 철학을 길고 복잡하게 소개한다. 메시지 철학과 관련한 인터뷰 대목은 속기록으로 200자 원고지 40장이 넘는 분량이다. 이쪽이 평소 화법에 더 가깝다. 인터뷰를 진행한 강태영씨의 동의를 얻어 몇 대목을 소개한다.

“생존 때문에 그렇게 했어요. 노동운동 할 때, 노동자들이 신참인 내 말을 듣기나 하나요. 정당을 만들고도, 심혈을 기울여 만든 정책을 길거리에서 설명할 때 30초도 길어요. 그 이상은 안 들어. 그런 상황을 나는 오래 겪은 사람이에요. <100분 토론>에 나가도 소수 정당이니까, 독한 얘기를 하니까, 다른 사람은 안 끊지만 나는 중간에 끊죠. 그러니까 더 줄여야 했고요.”

“우리(진보 정당) 얘기는 어려울 가능성이 높아요. 생긴 대로 살자는 건 쉽게 이해가 되지만 ‘생긴 대로 살지 맙시다!’라는 말은 논리가 복잡해요. 이걸 갖고 반대 측에서는 ‘빨갱이들은 말이 많다’는 식으로 나오죠. 그걸 못하게 해야 되는 거예요. 말이 재밌으면 그 얘기를 안 해. 우리의 조건이, 주어진 환경이 강제하는 거지요.”

“경험이 비슷하고 지식이 높은 사람들은 사전에 서로 아는 공통분모가 많아서 의사소통이 간단하게 돼요. 그런데 내가 만나는 사람은 대학을 못 다닌 사람이 더 많았고, 1년에 읽은 책이 한두 권이고, 신문도 안 보고 방송도 안 보고, 서로 공통분모로 아는 게 많지가 않아요. 그러니 누구나 생활 속 경험으로 아는 말이 필요해요.”

“의사소통에서는 단순히 내 뜻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배달된 내 뜻이 중요하죠. 내 뜻은 A인데 B가 배달되었다면, 그것은 내 책임이죠. 레토릭은 부가 기능이 아니라 핵심이에요.”

ⓒ사진공동취재단

짧고 재치 있는 메시지는 타고난 천성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혹한 생존 투쟁의 결과였다. 1980년대 용접공 노회찬은 격무에 지친 선배 노동자들을 설득해 군사정권에 맞서야 했고, 2000년 이후 정당인 노회찬은 어딘가 낯설고 어딘가 ‘빨갱이’ 느낌도 드는 민주노동당 간판으로 유권자를 설득해야 했다. 엘리트들이 쓰는 언어를 낯설어하는 사람과도 소통해야 했다. 모두가 들을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듣게 만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대목에서 중대한 전환이 일어난다. 운동가란 대개 어떤 가치를 가슴 깊이 품은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운동가들은 자신이 품은 가치를 열렬히 강조하면 사람들이 마땅히 들어줄 것이라고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게 옳으니까. 이른바 ‘공급자 마인드’다. 노동운동가 노회찬은 좀 달랐다. 그는 어느 순간 ‘공급자 마인드’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깨달았다. 단순히 좀 더 쉽게 말하자는 정도가 아니었다. 메시지의 수용자를 처음부터 중심에 놓고 고민할 것. 짧은 메시지에 핵심을 담아 잘 배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수용자를 연구할 것. 즉, 생각의 출발점 자체를 바꿀 것. 이른바 ‘수용자 관점’으로의 전환이 일어났다. “내 뜻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배달된 내 뜻이 중요하죠.”

이것으로 그는 청중에게 인상을 남기는 법을 터득했다. 빈소가 차려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퇴근시간이 지나자 지하 2층부터 지상 1층까지 그를 보내는 조문객들이 길게 꼬리를 물었다. 특유의 쉽고 재치 있는 화법에 매료된 이들이 많다. “쉽게 쉽게 설명해주시잖아요. 다른 분들은 어렵게 설명하는데…(회사원 김진아씨).” “상식적인 수준에서 서민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친근하게 표현해주셨던 분이다(회사원 최혁균씨).” ‘수용자 관점’의 효과는 말이 쉬워지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정치가와 유권자가 관계 맺는 방식과 밀도를 바꿔낸다.

노회찬의 촌철살인은 그의 유머 감각이나 성품보다 더 깊은 무언가를 보여준다. 품은 가치를 이상이라고 부른다면, 다른 이들에게 가치를 설득하는 것은 현실의 영역이다. 그는 늘 현실의 제약 조건을 고민했다. 신참 노동운동가 시절에는 선배 노동자들이 자기 말을 길게 들을 이유가 없다는 제약을, 원외 정당 시절에는 텔레비전 토론에서 마이크가 아주 짧게만 온다는 제약을 먼저 생각했다. “리얼리스트였다. 진보의 이상을 지켜나가면서도, 구체적 현실의 조건을 언제나 중요하게 생각했다.” 노회찬 원내대표 비서실장 김종철의 말이다.

우리는 또 한 번 어색한 조합을 만난다. 현실주의적 진보주의자. 노회찬의 삶을 돌아볼 때 현실주의는 진보주의만큼이나 두드러지는 키워드다. 2004년 17대 국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개정 논란이 한창일 때, 국회의원 노회찬은 완전 폐지를 주장하는 강경파였다. 온건파들은 최대 독소 조항인 7조 찬양고무죄 폐지로 한나라당(자유한국당의 전신)과 타협하자고 주장했다. 훗날 그는 “국가보안법은 폐지가 정답이나, 당시 현실에서는 7조만 없애는 타협을 선택했어야 했다”라는 반성을 내놓는다. 진보주의자들이 보여주곤 하는 이상주의적 태도가 노회찬에게는 꽤 묽다.

ⓒ사진공동취재단7월23일 유시민 작가가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의 노회찬 의원 빈소에서 조문하고 있다.

노동운동가 노회찬이 몸담았던 인민노련(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은 1980년대 전두환 정권 때 등장했고, 훗날 진보 정당 건설의 모태가 된 조직이다. 구영식 <오마이뉴스> 기자와의 인터뷰를 책으로 펴낸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에서, 노회찬은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의 기본 노선은 실사구시였다. 그래서 CA와 선을 긋고 NL을 거부하였다. PD도 교조적이고 관념적인 측면이 크다고 경계하였다.” CA는 제헌의회, NL은 민족해방, PD는 민중민주 계열의 약어로, 당대 운동권 주요 정파들의 이름이다. 인민노련은 사실상 모든 정파와 다른 길을 추구했다고 그는 회고한다. 그게 실사구시, 그러니까 현실주의였다. 이때부터 인민노련은 개량주의라는 힐난을 운동 진영 내에서 받았으니, 노회찬의 평생을 따라다닌 꼬리표가 이때 이미 붙었다.

1990년대 노회찬은 진보 정당 건설 운동의 주축이었다. 1990년대 내내 진보 정당 노선은 진보 진영 내부에서 개량주의·합법주의·출세주의라는 거센 비난에 시달렸다. 1997년 대선에서는 권영길 후보가 ‘국민승리21(2000년 창당한 민주노동당을 준비하는 베타 버전쯤 된다)’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출마한다. 계급투쟁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진보판에서 ‘국민’은 금기어나 다름없었다. 노회찬은 국민정당 전략의 핵심 입안자였다. 그는 “맛이 갔다는 말도 들었다”.

혁명의 시대는 저물었다.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는 정규직 울타리 안으로 후퇴했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진보 정당에 기반한 ‘개량주의’는 현실에서 작동하는 유일한 진보 프로젝트였다. 진보 정당 운동은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 입성으로 역사적인 변곡점을 만들어냈다. 이해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지역구 2석과 비례대표 8석을 얻는데, 막차를 탄 비례대표 8번이 노회찬이었다. 이때 그가 극적으로 낙선시킨 상대가 ‘3김’ 중 마지막 현역으로 10선을 노리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였다.

노회찬은 생애 내내 진보적 이상과 현실주의가 만날 접점을 탐색하는 탐험가였다. 그래서 그는 생애 내내 진보적 이상의 오른쪽 가장자리에 있었다. 언제라도 보수 정당에 투항할 사람이라는 평가를 20년 넘게 들었다(1995년 제3당 정치 실험이었던 통합민주당에 합류한 이력도 이런 평을 부채질했다. 생전에 노회찬은 통합민주당을 진보 정당 건설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조직 차원의 결정으로 합류했다고 지인들에게 설명했다). 그를 ‘우파’라고 몰아붙이던 동지들이 기성 정당으로 넘어간 후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진보 정당 내의 우파로 남았다. 역설이라면 묘한 역설인데, 그가 현실과 이상을 그저 그때그때 절충하는 정치가였다면 이런 역설적 결과는 생기기 어렵다.

정의당 내 친노무현 그룹을 대표하는 천호선 전 정의당 대표는 빈소에서 기자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고인은 말하자면 정의당 내 우파의 기둥이었다. 정책 노선이나 문재인 정부와의 관계 설정을 판단할 때, 진보의 원칙 안에서 최대한 현실주의 노선을 걸었다. 우리 당이 투쟁 일변도로 흐르지 않은 데는 그의 기여가 컸다고 생각한다.” 말년의 그는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를 현실에서 구현 가능한 진보의 미래라고 생각했다. 사민주의라면 한때 개량주의와 글자만 다르고 뜻은 같은 단어로 취급된 사상이니, 과연 공인된 개량주의자다웠다.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꿈꾼 진보의 미래

ⓒ연합뉴스17대 국회(위)에서 국가보안법 폐지·개정 논란이 거셌다.
노회찬 의원은 완전 폐지를 주장하는 강경파였다.
그는 나중에 ‘타협을 선택했어야 했다’고 반성했다.

노회찬의 진보주의가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은 분명 있었다. 노동시장 안에서는 국가가 노동자를 보호하고, 노동시장 밖에서는 사회안전망이 삶을 떠받쳐주며, 이 두 보호가 유기적으로 결합되는 것이 진보의 가치라고 그는 믿었다. 북유럽식 사민주의는 그 구체적 표현이다. 그가 보기에 민주당은 이런 노선으로 오기 힘든 자유주의 정당이었다. 그래서 그와 민주당 사이에는 진보주의라는 이상이 그은 선명한 한계선이 있었고, 그는 마지막까지 그 선을 예민하게 인식했다. 민주당의 힘이 훨씬 강하다는 ‘현실’은 이 장면에서는 고려 사항이 될 수 없었다. 그의 현실주의적 진보주의는 이런 식으로 작동했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그가 남긴 유서에 나오는 문장이다. 총선을 앞두고 드루킹 측으로부터 4000만원을 받은 사실에 괴로워하던 그는, 자신의 목숨과 당의 미래를 저울에 올렸던 것 같다. 민주당이 노회찬식 진보주의 정당이 될 전망이 없다고 보았으므로, 정의당은 현실에서 그의 진보주의를 구현해낼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그에게 당의 후퇴는 진보의 후퇴를 뜻했다. 그가 현실주의자이기만 했다면 여기서 진보의 후퇴를 감내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현실주의적 진보주의자였다. 그는 시련에는 강했지만 가책에는 약했다. 저울이 기울었다.

노회찬이 꿈꾼 진보의 미래가 사민주의였다면, 거기로 가기 위한 정치적 기획이 필요했다. 그의 마지막 고민은 선거제도 개혁이었다. 정의당이 자신의 10% 지지율을 10% 의석(30석)으로 받아낼 수 있다면, 진보 정치의 공간은 차원이 다르게 넓어진다. 20대 국회는 선거제도를 좀 더 비례적으로(득표율과 의석 배분이 비례하도록) 바꿀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라고 정의당은 보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현재 여론 지형대로라면 2년 후 총선 참패를 각오해야 한다. 자유한국당이 선거제도 변화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현재 소선거구 제도가 가장 유리한 당은 민주당이다. 그래서 논의에 소극적일 가능성이 있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선거제도 개혁 의지가 강하다. 선거제도 개정의 조건이 이 정도나마 우호적이었던 적도 거의 없다. 선거제도 개혁으로 진보 정치의 공간을 확장하고, 그를 발판 삼아 자유주의 정당 민주당 대 사민주의 진보 정당의 진보·보수 구도를 정립하는 것.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꿈꾼 진보의 미래였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세 번째 어색한 조합을 만난다. 진보 정치인이 그것이다. 그는 촌철살인의 대가였고, 현실주의적 진보주의자였으니, 이 모두를 포괄하는 것이 진보 정치인이다. 진보 정치인이라는 말은 지금 시점에서 보면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그의 세대에서 진보와 훨씬 잘 어울리는 짝은 ‘운동’이었지 ‘정치’는 아니었다. 진보주의자에게 제도권 정치는 이상을 접고 현실에 투항한다는 뜻이었다. 노회찬은 진보 진영을 이탈하지 않으면서 정치를 진보의 무기로 재발견한 첫 세대를 대표한다. 지금 시점에서 진보 정치인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한 단어로 들리는 데는 분명 그의 기여가 있다.

노회찬은 정치를 출세의 수단이나 타락의 위협이 아니라 현실을 바꿔내는 무기로 인식했다. 다시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에 기록된 노회찬의 회고다. “진보 정당 역사에서 당 강령만 봐도 굉장히 실용적으로 바뀌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우경화’ ‘체제 포섭’ ‘개량화’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정치화의 과정’으로 본다. 내가 깨달은 것은 정치는 정치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꿈꾼 진보 정치를 떠올려보자. 노동시장과 복지체제를 재구성하려면 땜질식 제도 조정으로는 안 된다. 거대한 사회적 합의,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대타협이 필요하다. 이런 대타협은 개인·노조·기업 차원에서는 설계할 수 없다. 정치만이 가능한 과업이고, 이런 고차원적 조정이 정치의 본령이다. “다른 나라들은 정치가 이런 굵직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간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면 그것을 진보가 해야 한다. 오히려 진보가 더 잘할 수 있고, 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문제에는 관심 없는 집단처럼 행세했다(<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노회찬은 이상주의자여서 세상을 바꿀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동시에 그는 현실주의자여서 그 목표를 이뤄낼 수단을 찾아내야만 했다. 진보는 너무 큰 목표여서 정치를 쓰지 않고는 이룰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진보 정치가로 살았고, 진보 정치가로 삶을 마감했다.

 취재 도움: 강은·장용준 인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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