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이 필자를 비판하는 칼럼을 신문에 게재했다. 요지는 지난 1년간 이 정부의 대북·대미 정책이 필자의 예언과 예측, 조언대로 이루어졌고, 이는 한·미 동맹과 국가 안보를 약화시키는 동시에 ‘위장된 평화, 위험한 평화’를 조장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수긍하기 어렵다.
김 고문이 거론한 ‘예언자 문정인’의 몇 가지 발언을 보자. “절차적 정당성에 문제가 있다며 환경영향평가라는 샛길을 제시했고 정부는 그것으로 명분을 얻고 시간을 벌었다.” “북한이 핵·미사일 활동을 중단하면 미국의 한반도 전략자산과 연합 군사훈련을 축소할 수 있다.” “미국의 북한 인권 압박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문장을 읽으며 필자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인용(했다고 말)한 필자의 말들은 상식과 순리에 따라 자연스레 도출되는 현실 분석의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한·미 동맹은 중요하다. 그러나 환경영향평가라는 국내법 절차를 무시하고 사드 배치를 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이른바 ‘쌍중단’도 마찬가지다. 한·미 연합 군사훈련 강도를 높여 나가면서 북측에 일방적으로 핵·미사일 실험을 중단하라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이것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이해하는 대목이다.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이렇다 할 상황 변경도 없이 북측에 인권 문제로 압박해봐야 인권 개선은 고사하고 북핵 문제 푸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
앞뒤의 맥락은 모두 잘라내고 가장 선정적인 문장만을 잘라 옮긴 기사들을 여과 없이 인용하며 공격을 가하는 김 고문의 비판 방식은 실망스러울 정도다. 필자가 “북한이 평창올림픽을 체제 선전장으로 쓰려면 그렇게 하라고 놔두면 된다”라고 했다고 한다. “북한이 비핵화 행보를 구체적으로 보일 경우”라는 조건 절이 빠졌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 진단에 동의한다”라는 문장은 아예 잘못 옮겼다. “인정할 수는 없으나 (북한의 핵능력 보유라는 현실을 정확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평화협정 체제 이행을 전제로 하면서 주한 미군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했다)” 역시 왜곡이다. “평화조약 체결 이후 (미국은) 주한 미군의 지속적 주둔을 정당화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문장을 입맛에 맞게 편집한 결과다. 김 고문의 칼럼은 “이렇게 해서 주한 미군 철수하고 동맹 와해하고 북한의 인권 탄압과 3대 수령제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얻는 게 무엇인가”라고 반문한다. 어처구니없는 논리의 비약이다. 문재인 정부가 언제 주한 미군을 철수시키고 한·미 동맹을 와해하겠다고 했나. 오히려 주한 미군 문제는 한·미 동맹 사안이므로 평화조약과 무관하다는 명확한 견해를 수차례 표명한 바 있다. 그리고 인권 문제도 비핵화가 진전되고 평화체제의 기틀이 잡히면 얼마든지 제기할 수 있다. 최대한 현상 유지 노력을 하면서 비핵화와 평화를 얻겠다는 것이 필자나 정부의 주장인데 이를 완전히 간과하고 있다.
끝으로 김 고문은 한·미 동맹만이 살길이라고 역설한다. 한·미 동맹 없이 “우리는 미·북의 줄다리기, 두뇌 싸움, 오기 경쟁에서 주변을 맴돌며 그들의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가 될 것이라는 경고도 이어진다. 국제사회를 “편먹기의 싸움터”로 규정하고는 평화협정 내주고 주한 미군 나가게 하고 한·미 동맹이 위축된 상황에서는 우리가 “중국에 조공 바치는 처지”가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여기에 기초하여 필자의 구상을 “위장된 평화, 위험한 평화”라고 규정한 것이다. 여기서 김 고문의 견고한 냉전적 사고와 맹목적 현실주의 심리를 읽는다.
국제사회는 결코 ‘편먹기의 싸움터’만은 아니다. 협력과 상생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수많은 사례가 있다. 국제사회가 오로지 싸움터일 뿐이라면,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불가능한 일이 된다. 물론 비핵화의 모든 여정에서 미국과의 협력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가 실현된다면 한·미 양자동맹을 넘어선 다자 안보협력 체제와 동북아 안보공동체 구축도 그려볼 수 있다. 이런 비전과 상상력이 없다면 우리는 현실주의 안보 딜레마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안보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진짜 평화, 안전한 평화’에 이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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