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출간된 알렉시 드 토크빌의 〈아메리카의 민주주의 1, 2〉(아카넷, 2018),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된 공동체〉(도서출판 길, 2018), 알베르 소불의 〈프랑스혁명사〉(교양인, 2018)의 공통점은 모두 오래전에 한 번 이상씩 번역본이 나온 적이 있는 책이라는 것이다. 동일한 서적의 신역이나 개정판이 많아지는 것은 문화가 그만큼 세련되고 두터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또 새로운 판본을 얼마나 의식하는지는 한 개인의 지적 욕구를 가늠하게 해준다. 신역에 무덤덤한 만큼 지(知)나 정보에 대한 관심도 분명히 쇠퇴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의 민주주의가 실패했다는 뒷담화가 학자들 사이에서는 아예 공식적인 담론이 되었다. 이런 때에 토크빌의 〈아메리카의 민주주의〉는 고전만이 제공해줄 수 있는 통찰을 준다. 때맞추어 타이완의 대표적인 인문학자 양자오가 쓴 같은 책의 해설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다〉(유유, 2018)도 함께 나왔다.

ⓒ이지영 그림
토크빌(1805~1859)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그가 자란 시절은 프랑스대혁명으로 귀족의 시대가 이미 절단 난 때였다. 토크빌의 친척 가운데 많은 수가 혁명의 와중에 기요틴 (단두대)의 제물이 되었고,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지 않았다면 감옥에 구금 중이던 그의 아버지도 처형을 맞을 운명이었다. 대혁명 이후 프랑스 정국은 20~30년 동안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치 요동을 쳤고, 그 시기는 토크빌의 학창 시절과 포개진다. 그는 프랑스를 포함한 전 유럽이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제도를 꾸준히 탐구했는데, 흥미롭게도 그는 프랑스대혁명이 불러일으킨 민주주의에 대한 시대적 열망을 일회적이거나 우발적 사건으로 치부하려는 자기 계급(귀족)의 환상을 거부했다. 그는 지도적인 귀족 가문이자 루이 왕가의 조신이었으면서도 왕실을 규탄하는 데 앞장섰던 친할아버지의 ‘평등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스물다섯 살의 하급 행정관이었던 토크빌은 미국식 대의제와 연방주의가 프랑스의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1831년 미국 여행을 떠난다. 9개월 동안 미국을 관찰하고 1832년에 프랑스로 돌아온 토크빌은 1835년, 〈합중국에서의 민주주의의 위세〉라는 책을 완성하게 된다. 이 책으로 그는 ‘새로운 몽테스키외’라는 찬사를 받으며 단숨에 사상가의 반열에 오른다. 이후 ‘평등이 인간들의 관념과 감정에 미친 영향’이라는 자매편을 1840년에 탈고했다. 하지만 저자가 고심해서 지은 제목을 출판업자가 묵살하는 바람에 두 책은 〈아메리카의 민주주의〉라는 똑같은 제목에 숫자만 달리 붙인 채 출간되었다. 원제를 염두에 넣은 독자라면, 토크빌이 두 권의 책을 통해 강조하고자 했던 별도의 주제를 혼동하지 않을 것이다.

불평등의 최고 원인으로 지목한 것은

〈아메리카의 민주주의 1〉을 여는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메리카에 머무는 동안 나의 관심을 끈 생소한 것들 중에서 조건들의 평등만큼 나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달리 아무것도 없었다. 아메리카 사회를 연구하면 할수록 나는 이 조건들의 평등이 다른 개별적인 사실들의 원천이 되는 기본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나는 그것이, 나의 모든 관찰이 결국 도달하게 되는 핵심 사안이라는 것을 연거푸 알게 되었다.”

〈아메리카의 민주주의 1, 2〉
알렉시 드 토크빌 지음
이용재 옮김
아카넷 펴냄
토크빌은 “민주주의 혁명”을 “가장 오래되고 가장 항구적인 사항이라는 점에서 불가항력적인 것”이라고 선언하며, 민주주의를 가로막을 수 없는 역사의 법칙으로 만드는 힘과 동기를 ‘평등’이라고 못 박는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700년 동안 벌어진 권력투쟁 끝에 서서히 지루하게 이루어진 그것이 어떻게 미국에서는 피 한 방울 흘리는 일 없이 건국과 함께 달성되었을까. 〈아메리카의 민주주의 1〉은 미국의 특수한 역사적 조건과, 그 조건이 만들어낸 평등의 제도화를 살펴본다. 그는 여기서 아주 많은 원인을 캐고 있으나, 최고 원인은 구대륙에서 불평등(귀족제)을 만든 ‘토지’ 취득이 신대륙에서는 누구에게나 무한대로 열려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토크빌은 한정된 토지가 영구 상속되는 데서 귀족제(불평등)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국민들의 사회 상태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상속법이다. 어떤 의미에서 상속법은 모든 세대를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장악한다. 상속법에 의해서 인간은 자기 동료들의 미래에 대해 거의 신적인 권력을 얻게 된다. 입법자가 일단 시민들 사이에 상속법을 정해놓으면, 그는 더 이상 다른 수고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상속법은 소수의 손에 재산과, 곧이어 권력을 모아주고, 집중시킨다.” 토크빌이 183년 전에 불평등의 최고 원인으로 지목했던 토지는 오늘날 상속재산· 금융자산·부동산 등으로 상속물만 바뀐 채 ‘상위 2%’니, ‘금수저’니, ‘갓물주’니 하는 새로운 귀족계급을 만들었다.

〈아메리카의 민주주의 2〉는 전작이 긍정했던 평등과 민주주의에 대해 비관적이다. 그래서인지 출간 직후, 이 책은 따가운 혹평과 몰이해를 받고 잊혀갔다. 토크빌은 이 책에서 평등의 시대는 이기주의(egoism)라는 악덕만 알고 있었던 인간들에게 개인주의 (individualism)라는 새로운 감정을 안겨주었다고 말한다. “개인주의는 민주 시대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조건이 평등화되면 될수록 확장될 우려가 있다. 이기주의는 모든 미덕의 씨앗을 말려버리는 반면, 개인주의는 우선 공적 미덕의 원천만을 고갈시킨다. 하지만 개인주의는 종국에는 모든 다른 원천도 공격해서 파괴해버리며 마침내 이기주의 속으로 흡수되어버린다.” 계급이 있던 시대에는 계급끼리 동류(공동체)의식을 공유하며 공적 대의에 헌신하는 것이 가능했다. 반대로 평등은 동류의식을 해체하여 낱낱의 개인으로 만들어버렸고, 각자를 부에 전념하는 경제인으로 만들었다. 토크빌은 바로 그것이 미국의 미래, 민주주의의 미래라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현재는 〈아메리카의 민주주의 2〉가 더 주목받는다.

데이비드 런시먼은 〈자만의 덫에 빠진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18)에서 토크빌을 “민주주의의 자만이라는 독특성에 처음 주목한 사람,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의 특이성에 대한 최고의 안내자”로 상찬한다. 금융위기와 전쟁 같은 위기를 초래하고도 민주주의(국가)가 건재하는 이유는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를 노출할 때마다 자신의 본질적인 결함을 ‘정권 교체’라는 눈앞에 보이는 위기(선거 전쟁)로 치환해왔기 때문이다. 선거로 왕을 바꾸는 민주주의의 이런 장점이 민주주의를 기사회생시킨다. 다시 말해 트럼프로 한계를 드러낸 미국 민주주의는 3년 뒤의 선거로 다시 회복되고, 결국 민주주의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던 것이 된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