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우리 학교 ‘대나무숲’에 들른다. 학생들이 페이스북에 개설한 익명의 소통 공간이다. 천천히 스크롤을 내리며 요즘 학생들의 속마음을 엿본다.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줄임말이나 신조어가 나오면 당황할 때가 있지만 얼른 포털사이트에 들어가 공부한 뒤 맥락을 따라잡는다. 가령 ‘아싸’는 아웃사이더의 준말이다. 생각난 김에 다른 대학 대나무숲에 들러 한참 구경하다 나오기도 한다.

처음엔 신기했다. 학생들의 익명 게시판을 내가 볼 수 있다니! “나한테 너무 잘해주지 마. 오해하니까” “어디론가 도피하고 싶어” “우리 학교에 ○○동아리는 없나요?” “도서관에서 노트북 좀 살살 치세요.” 대학 시절 ‘익게’라고 줄여 부르던 익명 게시판은 대개 그 대학이나 학과의 소속 학생들만 출입 가능한 비밀 공간이었다. 대나무숲은 대학 이름을 내걸었지만 누구에게나 공개돼 있다. 다른 대학 학생은 물론 교수와 총장, 입학을 희망하는 고등학생이 쓰고, 읽고, ‘좋아요’ ‘싫어요’를 누를 수 있다.

ⓒ박해성 그림

사실 플랫폼만 바뀌었지 ‘익게’에 쏟아지는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점이 많다. 누가 뭐라 해도 ‘사랑과 이별’은 익게에서 부동의 1위 소재다. ‘널 포기할 수 없다’는 결의, 서로 연락하는 스타일이 달라 자주 싸운다는 (누구나 해봤음 직한) 고민, 상대 마음이 나와 같지 않을까 봐 망설이고 있다는 수줍은 설렘까지.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닐 수 있지만 지금은 전부인 것 같은, 청춘들의 사랑 이야기가 오늘도 대나무숲에 울려 퍼진다. 우연이라도 글을 읽고 연락해주길 바랐을까. 헤어진 애인이 다니는 대학의 대나무숲까지 원정을 와서 장문의 익명 글을 적는 경우도 있다.

불특정 다수에게 도움을 청해 필요한 정보를 얻거나 궁금함을 해결하려는 글도 많다. “○○학과 복수전공을 하는데 아는 사람이 없어서 물어봅니다” “후문 쪽 자취방들은 어떤가요?” “○○ 수업이 어려워서 과외 받고 싶은데 도와주실 분?” 같은 질문이 올라오면 “페메(페이스북 메시지) 주시면 도움 드릴게요”라는 식으로 댓글이 달리곤 한다. 유익한 댓글이 거의 달리지 않는 부탁의 글도 있다. “○월○일 ○시 □□카페 창가에서 멍 때리던 여자분 찾아요.”

 

대나무숲을 바라보는 대학 교직원들의 심정은 복잡하다. 학내 소식을 공식 게시판만큼 빠르게 전파할 필요가 있을 때 유용하다. 교내 상담센터의 경우 대나무숲에 올라오는 학생들의 고민에 댓글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거나 상담 프로그램 정보를 제공하는 식으로 대응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투’ 운동의 경우처럼 대나무숲은 학내 고발과 폭로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행정상의 실수나 불편이 순식간에 학생들에게 공유되고 부정적 여론이 형성되기도 한다. 교직원들이 대나무숲 동향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이다.

“말할 곳이 여기밖에 없어서”

요즘 대학생들의 문화라고 해도 글이나 댓글에 거친 표현이 섞이거나 장난기만 가득하면 눈살부터 찌푸려진다. 무작정 학교 욕부터 하는 글에는 교직원 처지로서 반박 논리부터 고심하게 된다. 그래도 익명의 힘에 기댄 모든 글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다고 생각해본다. “복학했는데 아는 사람이 없다”라고 넋두리하는 학생은 며칠째 ‘혼밥’ 중일지 모른다. “인생의 패배자가 된 것 같다”라고 적은 졸업생은 오늘 또 불합격 통보를 받지 않았을까. 비싼 수업료를 낸 계절학기 수업이 “최악이었다”며 항의해야 한다는 학생은 교수와 학교가 원망스러울 것이다. 한 학생이 쓴 것처럼, 누군가는 “말할 곳이 여기밖에 없어서” 대나무숲을 헤맸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기자명 이대진(필명∙대학교 교직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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