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판사 블랙리스트’와 ‘재판 거래’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어렵게 되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 활동에 대한 지적이다. 양승태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여론을 조작하고,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변호사들을 회유·압박하는 내용까지 새롭게 밝혀졌다. 수사가 더 진행되면 새로운 내용이 더 나올지도 모른다.

이 사건은 ‘양승태 게이트’라고 불러야 한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불법행위·범죄행위·패악질이 너무 많아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양승태 대법원 법원행정처의 판사 블랙리스트와 재판 거래 및 민간인 사찰 사건이라는 이름은 너무 길다.

양승태 게이트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다. 사건의 실체를 밝혀내 책임을 묻기 위한 필수 절차다. 법원이 나서서 실체를 발견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법원은 그럴 기회를 포기했다. 검찰 수사는 불가피하다. 검찰 수사가 공정하고 신속하며 엄격히 진행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2014년 9월12일 양승태 대법원장(오른쪽)과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청와대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검찰 수사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법원의 의무는 면제되지 않는다. 이 사건에 대한 법원의 의무는 첫째, 검찰 수사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에서 시작한다. 둘째, 법원은 이 사건의 진실을 법원의 관점에서, 수사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밝혀야 한다. 책임질 자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셋째, 법원은 이런 사태가 발생한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적·문화적 개혁을 해야 한다. 제도적·문화적 개혁 방안은 국민 앞에 공개하고 전문가와 국민의 검증을 통과해야 한다. 넷째, 마지막으로 양승태 게이트를 출발점으로 사법개혁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지금 사법개혁은 실종 상태다. 양승태 게이트가 등장하기 전에도 실종 상태였다. 양승태 게이트를 사법개혁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의무를 통해 법원은 양승태 게이트를 극복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검찰 수사에 대한 협조와 법원 자체의 진상 규명은 대체재로 보인다. 하지만 중대한 차이가 있다. 검찰 수사가 중심이 되면 법원은 피해자로 둔갑할 수 있다. 수사의 대상이 되는 순간 범인은 검사에 비해 약자가 된다. 진술을 거부하는 것도 방어권의 일부로서 인정된다. 법원이 여러 법률 장치를 통하여 검찰의 수사를 회피할 가능성이 있고 이것은 법적·윤리적으로 보장된다. 이런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법원이 타락한 것이 우리 현실이다.

법원 자체의 진상 규명에서 법원은 피해자가 되지 않는다. 법원은 진상 규명의 주체이면서 대상일 뿐이다. 법적인 제한도 없다. 개별 법관은 피해자가 되지만 법원 자체는 그렇지 않다. 법원 자체의 진상 규명이 검찰 수사보다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법원의 진상 규명은 법원의 개혁을 포함한다. 자신의 문제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문제 해결 방안, 개혁 방안이 자연스럽게 보인다. 법원 자체의 진상 규명은 법원 개혁의 출발점이다.
 

ⓒ시사IN 신선영6월21일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 조합원들이 ‘대법원의 재판 거래’ 의혹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포함한 관련 법관들이 아무도 처벌받지 않는 결과는 없을 것이다. 양승태 게이트라고 불릴 정도의 엄청난 불법행위·범죄행위를 저지르고 아무도 다치지 않기를 희망할 순 없다. 진실을 정확히 보아야 한다. 진상 규명 과정에서 법원은 양승태 게이트와 관련된 법관들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 법원의 신뢰가 걸린 일이므로 법원은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1982년 유명한 타이레놀 청산가리 투입 사건이 발생했다. 타이레놀 캡슐에 누군가가 청산가리를 넣어 미국인이 사망한 사건이었다. 타이레놀 생산 기업이었던 존슨앤드존슨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1억 달러 이상의 제품을 모두 리콜했다. 광고를 통해 타이레놀 캡슐을 알약으로 바꾸어준다고 알렸다. 존손앤드존슨은 포장을 바꾸어 이물질 투입을 곤란하게 했으며, 최종적으로는 캡슐형 타이레놀 생산을 중지했다. 이때 든 비용이 1억5000만 달러였다. 이 모든 과정을 언론에 공개했다.

타이레놀은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시장점유율은 회복되고 판매율도 상승했다. 지금 우리가 매일 만나는 타이레놀은 이런 어려움을 뚫고 살아남은 제품이다. 존슨앤드존슨은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동안 쌓아온 회사의 대외적 이미지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타이레놀 사건에서 법원이 배워야 하는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현재 법원에 신뢰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범죄가 발생한 이상 모두에게 행복한 결과는 없다.

‘사법개혁 5대 과제’와 ‘제도개혁 4대 과제’

양승태 게이트에 대해 법원이 수동적으로 접근하면서 사법개혁은 실종되었다. 지난해 9월 김명수 대법원장을 임명할 때를 돌이켜보자. 사법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김명수 대법원장도 취임사에서 사법개혁을 약속했다. 비록 좀 모호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판사 블랙리스트 문제를 중심으로 많은 법관들도 사법개혁을 요구했다.

기대와 달리 김명수 대법원장의 취임 이후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법개혁의 실종 사태다. 법원은 물론 청와대도, 법무부도, 시민단체도 사법개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행히 국회에서 법원조직법 개정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회의 논의는 반갑지만 국회는 행정부나 사법부를 이끌 리더십이 부족하다. 사법개혁은 기대와 달리 완전히 실종되었다.

사법개혁은 필요하다. 무엇보다 촛불혁명에서 요구한 적폐 청산, 불공정성 타파를 위해서는 사법개혁이 필수적이다. 사법부는 과거 권력기관의 하수인으로서 정치권력의 폭력을 법률로 순화하는 기능을 했다. 이 기능은 점점 발전해 권력의 파트너가 되었고, 양승태 게이트에서는 대통령과 거래할 정도의 정치권력이 되어버렸다. 이런 위기의식을 반영하여 김명수 대법원장이 임명되었다.

사법개혁의 필요성이 지금보다 높았던 때는 없다. 과거 사법개혁은 전관예우, 법조 비리로 시작되었다. 대법관 제청 과정에서 고위직 법관을 임용하는 데 반대하면서 시작된 경우도 있었다. 양승태 게이트는 법조 비리나 대법관 제청 파동보다 훨씬 심각한 사건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포함한 고위직 법관들이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될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다. 사법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국가의 기초를 흔드는 범죄행위를 저질렀다. 지금의 사법개혁 실종 사태는 사법개혁 과제와 역사에 대한 무지, 사법부만 쳐다보는 좁은 시각, 양승태 게이트 해결 과정에서 보인 무능함 등이 결합하여 발생한 것이다. 먼저 양승태 게이트 해결 과정에서 드러난 법원의 무능력부터 해결해야 한다. 법원 자체의 적극적인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

현재 필요한 사법개혁 과제는 ‘5+4’로 정리할 수 있다. ‘사법개혁 5대 과제’와 ‘제도개혁 4대 과제’가 그것이다. 사법개혁 5대 과제는 ①국민참여재판 개혁 ②법원의 과거사 정리 ③대법원 구성의 다양화 ④법원행정 개혁 ⑤사법의 지방분권이다. 제도개혁 4대 과제는 ①징벌배상, 집단소송 등 공정성 강화 ②국민소송제, 국민발안제 등 국민주권주의 확대 ③법무담당관, 준법감시인 등 법치주의 확대 ④군 사법제도 개혁이다. 양승태 게이트 문제는 사법개혁 과제 중 법원행정 개혁에 해당한다.

이들 개혁 과제는 김영삼 정부 때 시작되어 노무현 정부 때 일단락된 사법개혁 성과를 반영하고 있다. 국민참여재판 개혁, 대법원 구성의 다양화, 법원행정 개혁, 징벌배상 및 집단소송 등 공정성 강화, 국민소송제 및 국민발안제 등 국민주권주의 확대, 법무담당관 및 준법감시인 등 법치주의 확대, 군 사법제도 개혁은 사법개혁 과제로 검토되었으나 시기상의 문제로 완료되지 못한 과제이다. 법원의 과거사 정리, 사법의 지방분권 과제는 새로 제기되었다.

사법개혁 과제는 넓고 깊다. 사법부를 완전히 바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법부 개혁을 통해 한국을 바꿀 정도로 큰 과제이다. 양승태 게이트로 묻힐 과제가 아니다. 현재 사법부 지도부가 외면한다 하더라도 사라질 과제도 아니다. 양승태 게이트는 사법개혁이라는 큰 틀에서 접근해야 제대로 풀 수 있다. 그래야 진상 규명의 필요성과 정도, 신뢰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양승태 게이트 해결 과정에서 사법개혁의 필요성은 더욱 부각될 것이다. 대법원은 양승태 게이트 해결을 위해서도 사법개혁을 준비하고 또 당장 실천해야 한다.

기자명 김인회 (변호사·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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