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고발’과 ‘증언’은 기존 법과 제도라는 시스템 안에서 진행되지 않았다. ‘미투 운동’을 전후해 터져 나온 여성의 목소리는 주로 온라인 해시태그를 타고 번져나갔다. 여론에 호소하고 기대는 방식이었다. 미투 운동에 불을 붙인 ‘안태근 사건’도 지난 1월29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한 서지현 검사로부터 시작됐다. 서 검사의 피해 내용은 여느 성범죄처럼 전형적이었지만, ‘성범죄에 한해서는 검사조차 사법 시스템을 믿지 않는다’라는 점이 사회에 던진 충격은 무거웠다.
그사이에도 가해자의 이름을 가리면 구분하기 어려운, 판에 박힌 듯 크고 작은 성폭력 피해 사례가 연일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아직까지 피해자들이 손에 쥔 ‘승리’는 없다. 김은희 젠더정치연구소 여성정치세력민주연대 연구위원은 계간 〈여성이론〉(2018년 여름호)에서 “모든 성범죄는 ‘엄벌’보다는 분명히 죄의 책임을 묻고 처벌한다는 ‘필벌’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한다.
물론 더디긴 하지만 변화의 조짐이 없는 건 아니다. 지난 4월12일 대법원은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 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라는 내용의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유명무실한 ‘성폭력 사건 보도 가이드라인’
미투 운동 국면에서 가장 변하지 않은 것은 언론이었다. 언론은 공론장을 만드는 ‘순기능’을 하기보다는 선정적이고 신변잡기 일색의 보도를 양산했다. 성기준 언론중재위원회 위원은 계간 〈언론중재〉 (2018년 여름호)를 통해 “객관성을 빌미로 피해자와 가해자 간 진실 공방으로 몰아가거나, 피해자의 신상 공개는 물론 당사자의 고통을 흥미 위주의 선정적 보도로 이끌면서 미투의 본질을 비껴갔다. 극단적인 경우 엄연한 범죄행위를 성애화·희화화했다”라며 언론 보도 행태를 비판했다.
언론의 성범죄 보도 행태 문제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언론 보도와 관련한 2차 피해가 계속되자 2014년 한국기자협회는 여성가족부·한국여성인권진흥원 등과 함께 ‘성폭력 사건 보도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이미 2012년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 권고기준’이 나와 있었다. 구체적인 범죄수법 묘사를 삼가고, 불필요한 피해자의 신상 정보나 사생활을 공개하지 않으며, 피해자 보호를 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내용이 반복된다.
문제는 이 가이드라인이 ‘선언’에 그친다는 점이다. 지침은 이행되지 않았고, 다수의 언론은 미투 운동 국면에서도 ‘관행’을 반복했다. 미투 운동이 뜨겁게 달아올랐던 지난 2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전국의 20~50대 성인 남녀 1063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미투 관련 보도에서 ‘언론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부각시키는 등 피해자 인격권을 충분히 보호하지 않는다’라는 응답이 75.3%에 달했다.
실제 언론중재위원회 시정권고소위원회의 시정 권고 현황을 보면 미투 운동 이후 시정 권고 결정이 크게 늘어났다. 미투 운동이 활발했던 지난 2~4월, 불과 두 달 사이 ‘성폭력 가해자의 범행수법 묘사’로 인한 시정 권고만 143건이었다. 이는 2017년 한 해 동안 내려진 시정 권고 27건에 비해 5배 넘는 건수다.
6월28일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하 양평원)은 서울 YMCA와 함께 미투 운동 언론 보도 모니터링 결과를 발표했다. 1~3월 뉴스 포털에서 검색어 ‘미투’로 무작위 추출한 기사 1500개를 대상으로 문제 사례를 정리한 내용이었다. 양평원에 따르면 “미투 운동 여파로 그동안 힘겹게 쌓아 올린 대중적 인지도 한꺼번에 무너져”처럼 가해자 처지를 대변하거나, “미투가 공연계에 미친 파장… 공연 취소·수정, 인물 변화”처럼 미투 운동을 부정적으로 해석함으로써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내용이 다수였다. 이 밖에도 성폭력 피해 사실을 제목으로 나열하거나, 피해자 이름을 사건명으로 앞세우거나, 성폭력 상황을 상세히 묘사한 선정적인 보도는 전형적인 2차 가해로 분류할 수 있다.
이에 앞서 6월7일 한국기자협회와 여성가족부,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는 〈성폭력·성희롱 사건, 이렇게 보도해주세요!〉라는 96쪽 분량의 소책자를 제작해 각 언론사에 배포했다. 소책자에는 △보도 시 예상되는 2차 피해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는지 △사건의 본질과 상관없는 사적인 질문은 없는지 △보도 방식이 피해자 보호에 적합한 방식인지 등 ‘성폭력·성희롱 사건 보도 간편 체크리스트’를 실어 기자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홍주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논문 〈미투 운동에 나타난 방송 보도의 선정성과 방송의 선정성 해결방안 모색〉(2018)에서 언론 보도의 각종 가이드라인이 ‘무용지물’이라고 지적한다. 전통적 매체는 이전보다 훨씬 다양하고 새로운 매체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독자가 뉴스를 접하는 방법은 포털사이트나 소셜 미디어에 치중되어 있다. 독자의 주목을 받기 위해, 특히 포털에서 더 많이 보는 뉴스를 만들기 위해 자극적이고 감정적으로 보도하는 행태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때 기자 개인의 의지보다 중요한 건 조직 차원의 결단이다. 그러지 않으면 기자가 별도로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취재원의 ‘코멘트’만으로 기사를 쓰는 ‘버벌 저널리즘(발표 저널리즘)’은 계속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일본의 저널리스트이자 평론가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지식의 단련법〉(청어람미디어, 2009)에서 “코멘트가 담겨 있는 정보의 진위 문제는 발언자에게 일임되고 기자 자신이 새롭게 알아낸 사실은 없다”라며 이러한 수법은 저널리즘에서 명백한 퇴행이라고 꼬집는다. 미투 관련 보도들이 보여주고 있듯, ‘발표’와 ‘폭로’라는 따옴표에만 의존하는 언론은 제구실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극심한 사회 갈등만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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