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1049m 고지의 풍경은 기이했다. 초록빛 수풀과 검은 철조망이 묘한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포화와 냉전의 세월을 아랑곳 않고 백두대간 줄기는 철조망을 넘어 북쪽으로 너울 치며 뻗어갔다.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말고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을 만큼 북한 산하가 지척이었다.

고개를 뒤로 돌리니 강원도 양구군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펀치볼 마을이 펼쳐졌다. 화채그릇(펀치볼)처럼 움푹 파인 독특한 지형이 그림 같은 곳이다. 양구군 해안면 현리에 있는 을지전망대는, 철조망만 걷어내면 퍽 아름다운 트레킹 코스나 다름없었다.

북한 땅이 눈앞에 펼쳐지는 감동도 잠시, 군인들의 경고가 쏟아졌다. “핸드폰 촬영 안 됩니다. 남쪽 방향으로만 촬영할 수 있습니다.” 전망대 곳곳에는 ‘핸드폰·사진 촬영 금지’ ‘포켓몬GO 금지’ 따위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을지전망대를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하면 ‘여행 명소’로 나오지만, 이곳은 엄연히 군사시설이었다. 실탄을 소지한 군인이 근무하는 ‘접전지역’이다. 전망대 아래 양구통일관에서 사전 신고해야 방문할 수 있다.

ⓒ시사IN 신선영강원도 양구군 을지전망대에서 ‘2018 통일걷기’ 참가자가 움푹 파인 펀치볼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을지전망대는 놀랍게도 DMZ(비무장지대) 안에 있다. 이곳에서 군사분계선까지는 겨우 470m 떨어져 있다. 4·27 판문점 선언 때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손을 꼭 잡고 넘나들었던 분단의 선 말이다. “한 개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이 선으로부터 각기 2㎞씩 후퇴해 비무장지대를 설정한다”라는 정전협정 제1조 1항은 이미 깨어진 합의였다.

정전협정 이후 북측이 비무장지대 북방한계선을 계속 남쪽으로 이동시킴에 따라 남측도 이에 맞서 계속 ‘북진’했다는 게 군 측의 설명이었다. 그러다 보니 1988년 지어진 을지전망대가 DMZ 구역 내에 놓이게 되었다. ‘길이 248㎞, 폭 4㎞’라는 비무장지대의 사전적 정의는 이미 사실이 아니었다. 이 지역의 비무장지대 폭은 남북을 합쳐 겨우 2㎞ 남짓이었다. 북한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있었다.

이날 을지전망대를 찾은 이들은 ‘2018 통일걷기’ 팀 30여 명이었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끄는 걷기 행사로,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다. 지난해에는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경기도 파주 임진각까지 걸었고, 올해는 거꾸로 임진각에서 고성까지 남측 민간인통제선(민통선)을 따라 340㎞를 걷는다. 하루 20~33㎞씩 11박12일 일정이다. 취재진이 합류한 날은 걷기 9일째인 7월3일 화요일이었다. 양구군 해안면 을지전망대와 만댓재를 지나 인제군 서화면 DMZ 생명평화동산까지 가는 코스였다.

걷기 행사는 군인들의 인도 아래 이루어졌다. 군의 통제 아래 걷는다는 것이 행사의 전제 조건이었다. 전체 코스 가운데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는 민통선 안길이 60%나 되기 때문이다. 양구군 두타연이나 수리봉 같은 명소가 바로 민통선 안에 자리 잡고 있다. 한번 보면 입이 떡 벌어지는 비경이건만, 일반인에게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 곳이다. 군부대에 신고해야 하거나, 아예 출입이 통제된 곳도 있다.

그렇다고 행사가 긴장감 속에 진행된 것은 전혀 아니었다. 4·27 판문점 선언 이후 분 훈풍은 최전방 분위기도 바꾸어놓았다. 부대마다 다르지만 통일걷기 팀을 맞는 군의 태도가 지난해에 비해 한층 부드러웠다. 을지전망대 안내를 맡은 한 장교는 “여러분이 이곳 풍경을 잘 보실 수 있도록 제가 아침 일찍 일어나 산안개를 한 줌 한 줌 걷어냈다”라는 너스레로 입을 열었다. 대북 심리전의 일환으로 1992년 미스코리아 대회 야외 심사가 인근에 있는 가칠봉에서 진행된 에피소드, 김정은 집권 이후 농구를 좋아하는 지도자 취향에 따라 북측 곳곳에 농구대가 생겼다는 이야기 등이 이어졌다. 마치 군복을 입은 문화해설사 같았다. 이번 행사를 도와준 또 다른 민통선 지역 부대 간부는 “여러분은 힘차게 평화와 통일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이곳은 우리가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라는 인사말을 건네 참가자들이 깜짝 놀라기도 했다.

ⓒ시사IN 신선영‘2018 통일걷기’ 참가자들이 7월3일 양구군 지역을 걷고 있다. 이들은 6월25일부터 7월6일까지 민통선을 따라 340㎞를 걸었다.
11박12일 민통선 걷기의 주역은 청년이었다. 사회적 기업 오마이컴퍼니가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모집한 청년들, 행사 공지를 접하고 참여한 대학생 등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길을 걸었다. 통일 시대의 주인공이 청년 세대인 만큼 이들이 통일걷기의 주류가 되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DMZ를 넘어 백두산까지” 기사 참조). 이들 덕에 장마철 잦은 폭우를 견디며 걷는 길에도 웃음꽃이 끊이지 않았다.

광주에서 온 대학생 류민씨는 민통선 지역 주민들의 일상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자동차 운행부터 주택 보수까지 민통선 지역에 산다는 이유로 큰 불편을 겪고 있다는 걸 이번 행사를 통해 알았다. 류민씨는 “걷는 도중에 우리를 가장 반겨준 분들도 뜻밖에 민통선 지역 주민들이었다. 행사가 거듭되면서 이분들의 곤란한 삶이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다음에는 조용한 여행자로 이곳을 찾을 생각이다.

우리 땅의 아름다움 확인하는 여정

정치인 가운데는 인재근·남인순· 소병훈 의원이 일부 구간을 함께 걸었고, 기동민·김영호 의원 등이 응원차 참석했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생명평화 순례를 종주한 동두천 나눔의 집 김현호 신부도 내내 함께 걸었다. 참가자들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 대한간호협회, 대한물리치료사협회 관계자도 동행했다.

매일 저녁 고단한 순례자들에게 선물이 주어졌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배우 문성근·권해효씨, 가수 이지상씨, 김진향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 전성 변호사(접경지역미래발전연구소 소장), 김동엽 교수(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최경봉 교수(원광대 국문학과), 최인아 최인아책방 대표 등이 숙소를 방문해 참가자들과 함께 ‘노변정담’을 나누었다. 취재진이 찾은 9일째 저녁에는 영화 〈변호인〉 〈강철비〉를 만든 양우석 감독, 이병철 해설가(전북기상과학관)가 방문해 영화와 별 보기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10일째에는 최태영 국립생태원 박사가 민통선과 DMZ의 생태 이야기를, 마지막 날인 11일째에는 가수 손병휘씨가 강원도 고성군 소똥령마을에서 버스킹을 진행했다.

통일걷기는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확인하는 여정이기도 했다. 개발의 광풍이 미치지 않은 민통선 지역은 역설적으로 때 묻지 않은 풍광을 간직하고 있었다. 반나절을 걸어도 사람 한 명, 건물 한 채 보이지 않는 금단의 길을 걷는 경험도 할 수 있다. 내친김에 이인영 의원에게 본인이 꼽은 민통선 지역 10경을 꼽아달라고 했다. 마침 이 의원이 지난해 펴낸 〈2017 통일걷기, 민통선을 걷다〉에 10곳의 비경을 소개해두었다(위쪽 그림 참조).

수리봉 지역처럼 민간이 출입이 아예 금지된 곳도 있지만 나머지는 접근하기 어렵지 않다. 거창한 담론 아래 걸을 필요도 없다. 여행 삼아 찾는 것으로 충분하다. 파주, 연천, 철원 등 수도권에서 멀지 않은 곳에도 둘러볼 곳은 수두룩하다. 대규모 숙박시설은 없지만 삼삼오오 묵을 만한 곳은 있다. 이인영 의원은 “이곳을 찾는 이가 늘어날수록 군과 주민 생각이 바뀌면서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는 11박12일 일정 가운데 겨우 하루 동행했다. 민통선은 물론 최전방 지역에 발을 디딘 것도 처음이었다. 걷는 동안 드문드문 쏟아지던 비는 일정을 마칠 무렵 완전히 그쳤다. 녹슨 철조망 곁에 핀 야생화가 초여름 햇살 아래 유난히 반짝였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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