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사회학자 배리 골드슨은 “어린 시절은 국가의 바로미터(잣대)”라고 말한다. 한 국가가 아이들을 어떻게 돌보느냐를 통해 그 사회와 개인이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한국은, 우리 개개인은 아이들 앞에서 어떤 모습일까?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끔찍한 아동학대 사건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사건이 벌어진 다음이다. 아동학대 사건을 우리보다 먼저 겪고 더 많이 고민한 국가를 직접 찾아 답을 구했다. 영국, 미국, 스웨덴 현지 취재 결과를 앞으로 4주 동안 연재한다. 

 

ⓒ시사IN 조남진영국 세인트 팬크러스 공동묘지에 세워진 피터 코널리 추모비.

영국 런던 북부에 위치한 세인트 팬크러스 공동묘지(St. Pancras Cemetery)를 깊숙이 걸어 들어가면 ‘기억의 정원’이 나타난다. 꽃과 나무 사이에 고인의 재를 뿌리거나 묻을 수 있게 꾸민 일종의 수목장 공간이다. 둥근 정원 한가운데에 곰 인형 그림이 새겨진 검은색 추모비 하나가 나지막이 놓여 있다. ‘1st March 2006’ ‘3rd August 2007’ 생년월일과 사망일 위에 적힌 고인의 이름은 ‘BABY P.’ 2008년 영국은 물론 전 세계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준 아동학대 사건의 피해자 피터 코널리의 약칭이다. 생모 트레이시 코널리의 방임과 동거남 스티븐 바커, 제이슨 오언의 폭행으로 목숨을 잃은 두 살 아기 피터의 재가 이곳 주변에 뿌려졌다. 자신의 보호자들로부터 끔찍한 학대를 당해 생후 17개월에 생을 마감한 피터의 추모비에 어른들이 새겨줄 수 있는 문장은 이것밖에 없었다. ‘Safe at last(마침내 안전해지다).’

피터는 2006년 3월1일 묘지에서 8㎞쯤 떨어진 런던 북부 토트넘 지역에서 태어났다. 토트넘이 속한 해링게이 자치구는 2006년 5월 당시 영국에서 가장 높은 실업률을 기록했다. 2007~2008년 기준 무료 급식 대상 아동 수는 전국 평균 15%의 두 배(32%)에 달했다. 이 가난한 동네에서 성장한 피터의 생모 트레이시도 지역 아동보호 기록부에 이름이 오른 아동학대 피해자였다. 열여섯 살에 첫아이를 낳고 스물다섯 살에 셋째 아이 피터를 낳았다. 일정한 소득이 없고 육아 기술이 부족한 싱글맘을 위해 여러 차례 지역 사회복지사와 방문 간호사 등이 피터 가족의 집을 찾아갔다. 당시 보고서에는 부적절한 위생과 양육 기술 부족, 트레이시의 과도한 흡연과 출산 후 우울증 등이 지적되긴 했지만 물리적 학대 증거는 없다고 적혀 있다.

상황이 급속히 나빠진 건 트레이시가 새 남자친구 스티븐 바커와 그의 형 제이슨 오언 등을 집에 들인 후부터다. 이 시기 이후 피터 몸 곳곳에서 염증과 타박상 등이 관찰됐지만 지역 소아과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경찰은 스스로 아이를 병원이나 양육 지원센터로 데리고 와서 적극적으로 치료를 요청하는 친모를 의심하지 않았다. 트레이시는 이들에게 스티븐 형제와의 동거를 철저히 숨겼다. 역시 부모의 방임과 학대 속에서 자란 스티븐 형제는 피터가 죽기 최소 한 달 전부터 지속적이고 심각하게 아이를 폭행했다. 2007년 8월3일 죽은 채 발견된 피터는 척추와 갈비뼈 8군데가 부러져 있었다. 손발톱이 일부 빠졌고 입속이 찢겨 있었다. 충격에 의해 빠진 치아를 삼킨 것이 직접적 사인이었다.

피터는 2007년 영국에서 발생한 가족 살인 사건의 피해 아동 57명 가운데 한 명이다. 2000~2007년 한 해 평균 52명, 총 416명의 아이가 가정 내에서 학대로 숨졌다. 피터에게 일어난 일은 영국 아동학대 사건 역사에서 그리 특이하지 않았다.

1945년 2월 뉴포트 지역의 열두 살 소년 데니스 오닐은 위탁 부모의 폭행과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다. 1973년 1월 일곱 살 마리아 콜웰은 브라이턴의 자기 집에서 의붓아버지에게 맞아 죽었다. 1984년 7월 브렌트 지역에서 계부모와 함께 살던 네 살 재스민 벡퍼드는 시체로 발견됐다. 당시 벡퍼드의 체중은 10㎏ 남짓이었다. 2000년 2월 해링게이 지역의 여덟 살 빅토리아 클림비는 친척과 그 남자친구에 의해 몸에 128개의 상처를 입은 채 숨을 거뒀다.

이런 끔찍한 사건들은 동서고금 비슷하게 이어져왔다. 그러나 아이들의 죽음 앞에서 이 나라는 조금 달랐다. 영국은 일찍부터 아동학대가 불러온 비극에서 교훈을 얻어내려고 노력해온 나라 중 하나이다. 이미 1889년 국가의 아동보호 책임과 권한을 명시한 아동학대 방지 및 보호법(Children Act 1889)이 마련됐다. 이 기틀 위에서 130년 동안 영국 아동보호 시스템은 차츰 성장해왔다. 성장의 매개체는 잔인하게도 아이들의 죽음이라는 ‘실패’ 사례였다.

ⓒFacebook생후 17개월에 생을 마감한 피터 코널리를 추모하는 파란색 풍선과 리본이 피터의 사진에 묶여 있다.

뼈아픈 실패에 대한 영국 사회의 첫 번째 작업은 조사(inquiry)였다. 굵직한 아동학대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영국 정부는 독립 조사단을 꾸려 공식 보고서를 발표했다. 무엇이 아이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어디에서 막을 수 있었는지 빈 구멍을 찾기 위한, 일종의 ‘오답 노트’이다.

1945년 데니스 오닐 사망 조사 보고서는 모든 지방 당국에서의 아동보호위원회와 아동보호 담당관 설치를 이끌어냈다(Children Act 1948). 그때부터 지금까지 영국에서는 지방정부와 여기에 소속된 아동보호 사회복지사들이 각 지역 아동학대 예방·조사·관리의 실질적 책임을 맡고 있다. 1974년 마리아 콜웰 사망 조사 보고서는 사회복지사의 권한을 한층 강화시켰고 ‘초기 개입’의 필요성을 제기했다(Children Act 1975). 1985년 재스민 벡퍼드 사망 조사 보고서는 아동학대가 ‘예측되고 예방될 수 있다’는 개념을 확립시켰다. 이에 따라 1989년 개정된 아동법(Children Act 1989)은 중대한 위험에 처한 아이를 어떻게 가려내고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평가 기준과 절차를 담았다.

빅토리아를 구할 12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2003년 나온 빅토리아 클림비 사망 조사 보고서는 영국 아동보호 시스템의 일대 개혁을 이끌어냈다. 보고서는 빅토리아를 구할 수 있었던 12번의 ‘기회’를 서술했다. 교육·건강·복지 분야에 걸쳐 있는 많은 아동학대 예방·감시 인력들이 협력 체계 없이 각자 따로 작동했기에 놓친 기회들이었다. 이후 영국은 첫째, 지방정부에서 아동의 교육·건강·사회 서비스를 담당하던 부서들을 ‘아동 서비스(Children’s Services)’라는 하나의 지휘 체계 아래 통합했다(Children Act 2004). 둘째, 지역아동보호위원회(Local Safe-guarding Children Boards·LSCBs)를 통해 지방정부 내에서뿐 아니라 학교·병원·경찰 등과의 지역 내 협력 체계를 구축했다. 셋째, 심각한 사례 검토(Serious Case Review·SCR) 회의를 통해 수시로 그 협력 체계가 작동하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발전한 아동보호 시스템은 영국 지방정부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로 굴러갔다. 아동 서비스국은 지방정부에서 그 규모와 예산 비중이 가장 큰 부서가 되었다. 피터가 살던 런던의 한 자치구인 해링게이 지역(총인구 20여만명)을 예로 들면 2005년께 아동 서비스국의 직원 수는 1300명, 한 해 예산은 2억5000만 파운드(약 3636억원)에 달했다. 아동 인구 5만5000여 명 가운데 450명이 보호 계획이 수립된 ‘보호 아동’이었고 그중 230명은 ‘위험 상태’로 분류되었다. 그 아이들의 가정에는 지역 사회복지사, 방문 간호사, 경찰 등의 상시적 방문과 감독이 이뤄지고 그 결과가 심각한 사례 검토(SCR)를 통해 공유된다. 아이와 부모에게 필요한 지원책을 중심으로 해법이 논의되지만 불가피한 경우 아이를 부모로부터 떼어서 보호하는 결정이 내려지기도 한다. 이 촘촘한 협력 체계와 의사결정 구조가 만들어지기까지 10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피터도 해링게이 아동 서비스국에서 지속적으로 보호하던 ‘위험 상태’ 아동 230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사회복지사와 방문 간호사가 정기적으로 피터의 집에 들러 피터 모자의 상황을 확인했다. 주택, 의료, 보육 등 여러 분야에서 각종 지원 프로그램이 제공됐다. 엄마 트레이시는 피터를 자주 병원에 데려가고 부모 심리 치료와 자녀 양육 코치 등에도 여러 번 참여했다.

그런데도 아이가 죽었다. 더구나 피터가 죽은 해링게이 지역은 아동보호 체계를 전면 개편하게 만든 2000년 빅토리아 클림비의 사망 사건이 일어난 곳이었다. 피터를 죽인 어머니와 동거남들의 사진에 이어 지역 사회복지사들의 사진과 비난 기사가 신문을 도배했다. 영국 타블로이드 일간지 〈선〉은 해링게이 지역 사회복지사들의 해고를 청원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실제 해링게이 아동 서비스국 총책임자 샤론 슈스미스 등이 일자리를 잃었다(이후 해고당한 사회복지사들은 법적 소송을 냈고 부당해고 판결을 받았다).

많은 영국 사람들은 피터가 당한 끔찍한 학대 사실 못지않게 그가 받은 수많은 보호와 지원 내용에 충격을 받았다. ‘50개의 상처, 60번의 (사회복지사 등의) 방문-베이비 P(피터 코널리)를 죽음으로 이끈 실패’라는 2008년 11월12일자 〈가디언〉 기사 제목처럼, 생전 피터를 살펴본 눈이 많았다는 사실은 영국 아동보호 시스템이 총체적으로 실패했다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쓰였다. 피터 코널리의 죽음 이후 그간 쌓아올린 시스템에 대한 신뢰와 자원 투입에 대한 영국 사회 공감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보수당은 연일 피터를 언급하며 당시 노동당 정부의 복지 정책을 비난했다. 피터 사건이 빌미를 제공해준 ‘취약계층 지원 무용론’은 실제 2년 뒤 보수당이 정권을 잡고 난 뒤부터 국가 운영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2008~2009년 피터 사건을 다룬 여러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아동학대 방지를 위한 자원이 부족했다. 자원들 사이 협력 체계에도 빈틈이 있었다. 열악한 업무 환경으로 피터를 돌보던 사회복지사와 보건 인력이 자주 바뀌거나 공석이었다. 누군가는 피터의 집에 새로운 성인 남성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적절한 기회가 없어서 모두에게 공유되지 못했다. 그래서 더 많은 자원이 투입되고 더 끈끈한 협력 체계가 구축되어야 한다고 제안됐지만, 정부 정책은 거꾸로 갔다. 2010년 들어선 보수당 정부는 다른 분야에서처럼 아동보호 서비스에 대해서도 예산 감축과 민영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아동보호 분야에 돈을 아끼고 ‘효율성’을 적용하고 나서 영국의 아이들은 더 안전해졌을까? 〈베이비 P 이야기(The Story of BABY P)〉(2014)를 쓴 레이 존스 킹스턴 대학 사회복지학과 명예교수는 “베이비 P (피터 코널리) 사건 이후 아동보호 수요는 폭증했는데 그에 대한 인력과 예산이 오히려 감축되면서 아동보호 서비스에 심각한 위기가 초래됐다”라고 말했다(18~19쪽 기사 참조). 특히 슈어 스타트(Sure Start), 트러블드 패밀리(Troubled Family)처럼 복지 지원을 통해 아이의 안전을 도모하는 가족 지원 정책의 자금이 거의 끊겼다. 이를 우려하는 사람들은 묻는다. “피터 코널리 가족이 더 적은 보호를 받고 더 적은 지원을 받았다면 피터가 살 수 있었을까?”

자원 투입이 빈약해진 시스템 속에서 아동보호에 대한 공적 책임은 모두 사회복지사 개개인에게 씌워졌다. 〈선〉지 등 언론의 집중 공격으로 부당해고를 당하고 살해 위협에까지 시달린 샤론 슈스미스 전 해링게이 아동 서비스국장은 저서 〈베이비 P로부터의 학습(Learning from BABY P)〉(2016)에서 특히 피터 코널리 사건 이후 ‘실패의 두려움’이 아동보호 사회복지사들을 지배했다고 말했다. “사회복지사에 대한 격렬한 비난으로 야기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의 일상 업무에 부적절한 영향을 미쳤다. 사회복지사 직업의 불확실성과 불안함도 높아졌다.” 일은 많고 주어진 예산은 점점 적어지는데 일이 잘못되면 욕만 먹는 아동보호 서비스 사회복지사 자리는 점점 기피 대상이 되었다. 특히 해링게이처럼 고위험군 아동이 많아 일손이 절실한 지역에서 그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여전히 한국과 비교할 때 아동보호 ‘선진국’이다. 여러 차례의 실패를 외면하지 않고 아이의 죽음에서 아픈 교훈을 얻으려는 꾸준한 노력의 결과 아동학대 사망률은 분명 감소 추세를 기록했다. 한국의 경우 2010년까지 일정 상한선을 유지하던 국내 아동학대 사망자 수는 2011년 이후 줄곧 10명을 넘기더니 2016년 36명, 2017년 30명으로 늘어났다. 그런데도 아직 정부는 아동학대 업무를 민간 위탁 기관에 떠넘기고 있다. 한 해 아동보호 예산은 전국 245억원에 불과하다.

아동학대를 막아보려고 제대로 자원을 투입해본 역사가 없어서 ‘실패’라는 단어를 쓰기조차 민망하지만, 영국이 그랬듯 한국도 최근 몇 년 사이 끔찍한 아동학대 사망 사건을 실패로만 남기지 않기 위한 노력을 조금씩 해나가고 있다. 2014년 아동학대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제정되었고, 2018년부터는 학대 아동을 조기 발견하겠다는 목표 아래 ‘e아동행복지원시스템’을 가동했다. 이제 막 첫걸음을 떼려는 한국은, 100년 넘는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 또 한번 위기를 맞은 영국 아동보호 시스템을 보고 무엇을 배워야 할까? 영국의 아동학대 관련 법 개정 압력단체인 맨데이트 나우(Mandate now)의 설립자 톰 페리는 이렇게 말한다. “중요한 건 틀과 제도가 아닌 마인드 세팅이다. 그리고 그 마인드 세팅이란 바로 돈이다(20쪽 기사 참조).”

‘불편한 진실’ 앞에서 포기하지 않는 나라

또 하나 주지해야 할 점은, 우리보다 훨씬 더 일찍 더 많이 아동보호에 돈을 써온 영국 사회 전문가도 ‘아동학대 근절’ 방안에 관한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피터 코널리 사건으로 떠들썩했던 2008년 11월15일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국민에게 “이런 일이 결코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의 답은 달랐다. 2008년 11월11일 샤론 슈스미스 해링게이 아동 서비스국장은 BBC 라디오 인터뷰에서 “다시는 이런 죽음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보증할 수 있겠나”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어떤 아동 서비스 책임자나 기관, 소아과 의사도 아이를 해할 의도가 있는 사람들을 모두 막을 수 있다고 보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슬프지만 사실입니다.” 이 불편한 진실을 각오하는 게 이제 막 첫발을 떼려는 한국에게도 가장 필요한 자세일지 모른다. ‘아동학대 없는 나라’는 없다. 다만 ‘아동학대라는 실패 앞에서 포기하지 않는 나라’가 있을 뿐이다.

 

 

 

 

 

 

기자명 런던·글 변진경 기자/사진 조남진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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