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군가의 팬(fan)이다. 우리는 음악이나 영화를 볼 때, 스포츠 경기를 관람할 때, 독서를 할 때, 투표를 할 때, 누군가를 선택할 뿐 아니라 예찬하고 추앙한다. 여러 어학사전은 팬을 하나같이 ‘운동경기나 선수, 연극, 영화, 가요나 인기 연예인 등을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어느 국어사전은 이 설명 뒤에 ‘애호가’로 순화한다고 덧붙여놓았는데, ‘애호’는 ‘열광’이라는 감정을 제거한다는 점에서 적절치 않다. 팬이라는 용어는 17세기 후반 영국에서 처음 등장한 ‘광신도(fanatic)’의 준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마땅치 않은 것은 거개의 어학사전이 팬을 사람에 대한 열광으로 국한했다는 점이다. 이런 풀이는 팬이 비인격적 대상에 대한 열광으로 확대되어온 세태를 반영하지 못한다. 우리는 특정 회사나 제품, 드라마나 명소, 음식이나 반려동물 등에 열광한다. 그래서 팬 현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인격체와 비인격체를 따지지 않고 팬이 열광하는 모든 것을 아우르기 위해 ‘팬 대상(fan object)’이라는 신조어를 사용한다.

팬덤(fandom)은 광적인 사람을 뜻하는 팬과 영지나 나라를 뜻하는 접미사 덤(dom)의 합성어로 팬 대상에 몰입해 그 속에 빠져드는 무리나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류 최초의 팬덤은 싯다르타,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의 문하생이었거나 그들의 가르침을 좇았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구약성서〉에 나오는 롯은 소돔 성에서 고작 열 사람의 팬덤도 만들지 못했다. 기원에 탐닉하다 보면 모든 용어가 ‘역사적 용어’라는 중요한 사실을 잊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팬도 팬덤도 “근대 자본주의 사회, 전자 미디어, 대중문화 및 대중 공연과 연관되어 있는 사회문화 현상”이라는 마크 더핏의 말을 명심하자.

ⓒ이지영 그림

엘비스 프레슬리의 팬으로서 그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마크 더핏의 〈팬덤 이해하기〉(한울아카데미, 2016)는 주로 대중음악 스타를 중심으로 형성된 ‘미디어 팬덤’을 연구한 책이다. 원래 팬덤 연구는 문화 이론의 하위 연구로 출발했으나 점점 그 중요성이 다른 영역으로 번지고 있다. 버릇처럼 이 분야에서도 기원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때 불려올 가장 막강한 첫 번째 인물이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 학파 1세대일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대중문화 수용자의 지위를 폄하한 것으로 악명 높다. 이들은 팬덤을 방송 미디어에 의해 소외되고 문화적 생산에서 배제되는 소비자로, 사회 부적응이나 개인적 상실을 보상받기 위한 목적에서 상상의 관계에 집중하는 취약하고 불행한 사람들로 간주했다. 팬덤을 문화 산업의 희생자로 보는 이들은 대중문화의 상업적 술수를 폭로하고 대중이 홀려 있는 저속한 취향을 비판하는 한편, 고급문화 형식의 우수성을 가르치고자 했다.

팬덤에 대해 비관적이기는 정신분석학 연구도 마찬가지다. 정신분석학적 프레임은 팬덤을 불안과 같은 심리 과정에서 기인한 개인적 결여를 보상하는 것으로 본다. 이들은 팬덤을 삶에서 부딪히는 고난에 대한 일종의 안식처로 생각하거나, 스타에게 집착하는 것을 애정 결핍을 만회하기 위한 대리적 위안 심리로 해석한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들은 팬덤을 문화 산업이 쉽게 농락할 수 있는 꼭두각시로 여기지 않으며, 팬덤을 병리화하거나 개인적 동기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는 정신분석학으로부터도 거리를 둔다. 마크 더핏에 따르면 팬덤은 공동체적 성격을 띤 주체성과 정체성의 표현이다.

2017년 출간된 조이 프라드-블래너, 에런 M. 글레이저의 〈슈퍼팬덤〉 (세종연구원, 2018)은 ‘팬 기반 경영’이라는 관점으로 팬덤에 접근한다. 세상에는 오랫동안 제작자와 구매자가 있어왔고, 두 부류는 거의 중복되지 않았다. 제작자가 광고를 하고 소비자는 제품을 산다. 이런 일방적인 관계는 소비자들이 광고에 면역성을 갖게 되면서 무리가 왔다. 이때 〈스타워즈〉나 디즈니 같은 대중문화 팬덤은 새로운 판촉 기법을 찾는 기업에 영감을 주었다. 〈스타워즈〉나 디즈니 팬들은 자발적인 결집력과 충성심으로 돈 한 푼 안 들이고 판촉을 도울 뿐 아니라, 서적·장난감· 코믹스·놀이기구·포스터·비디오게임·의상 등 다양한 굿즈(goods) 시장까지 창출한다.

소비자와 팬덤은 항시 ‘우파’다

지은이는 단순 소비자와 팬덤을 이렇게 구분한다. “소비자들은 제품에 관심을 갖는다. 팬들은 그 제품이 갖는 의미에 관심을 둔다. 이 두 집단은 전혀 다른 기대와 요구를 지닌다. 소비자들은 브랜드에 돈을 바치지만 팬들은 에너지와 시간을 바친다.” 정작 어려운 것은 팬덤을 만드는 일이다. 내부에서 마음껏 조작할 수 있는 광고와 달리 팬덤은 철저히 외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팬 대상의 소유주는 팬덤이 제품에 덧붙인 맥락을 함부로 조종하지 못한다. 대신 기업은 팬덤의 욕망과 이상을 잘 파악하여 그들이 활약할 환경을 만들어줄 수는 있다.

유의해야 할 것은 소비자와 팬덤이 항시 ‘우파’라는 점이다. “팬덤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다. 혁신에 저항하는 것이 팬덤의 특징인데, 아무리 좋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해도 팬덤은 혁신에 반발하고 저항한다. 팬들은 팬 대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그 관계의 의미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무엇과도 싸울 태세가 되어 있다.” 밥 딜런이 통기타를 버리고 전기기타를 메고 나왔을 때, 코카콜라가 1985년 ‘뉴코크’로 맛을 변형시켰을 때, 〈스타워즈:라스트 제다이〉(2017)에 흑인과 동양계 배우가 출연했을 때 극렬하게 저항한 이들이 팬덤이다.

〈팬덤 이해하기〉 말미에 ‘아카-팬(aca-fan)’에 대한 논의가 있다. 이 단어는 팬 대상을 연구하는 학자이면서 동시에 팬이기도 한 ‘학자-팬’을 일컫는 아카데믹-팬(academic- fan)의 준말이다. 중립성과 객관성을 가장하고 있지만 온갖 종류의 학자들은 팬으로서 팬 대상을 연구하거나, 팬 대상을 연구하다가 팬이 된 채 책을 쓴다. 마크 더핏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그들의 저작을 어디까지 공정한 것으로 신뢰해야 할까. “연구자가 자신의 상황에서 빠져나와 객관성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의심스러운 환상이다. 지식은 정치적 결과를 낳기 때문에, 불편부당한 합리성이 아무리 중립적으로 보여도 그것은 위험한 주장일 수 있다. 노련한 팬들은 아카-팬의 학문적 권위를 이용해서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를 격상시키거나 널리 알리기도 하고, 당면한 논쟁을 매듭짓기도 한다.” 학자-팬이 성찰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못하면 미디어 산업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