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난 멋진 일을 해냈습니다. 그런데도 다들 내가 포기했다고 합니다. 뭘 포기했다는 겁니까? 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났어요. 만났습니다. 우린 죽이 아주 잘 맞았습니다. 그도 우리한테 많은 걸 내줬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월15일 기자들과 일문일답 중 내놓은 발언이다. 북·미 정상회담의 손익계산서를 놓고 미국 내에서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성과를 홍보하는 ‘세일즈맨’으로 나선 것이다. “더 이상 북한으로부터 핵 위협은 없다”라는 발언의 근거를 따지는 기자에게 그는 “내가 취임했을 때 사람들은 우리가 북한과 전쟁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랬더라면 수백만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누가 아느냐?”라고 반문했다.

ⓒReuter6월12일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에서 역사적인 첫 북·미 정상회담을 했다(위). 두 정상은 회담 후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때마침 워싱턴 외교가에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직접 담판을 벌인 트럼프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다. 싱가포르 회담의 성공 여부를 공동성명에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라는 문구의 포함 여부로 재단하려던 경향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 협상 당시 미국 측 협상단의 주축 멤버였고 현재 북한 전문 웹사이트 ‘38노스’ 편집장인 조엘 위트는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북한 같은 나라가 상대인 경우, 정상회담을 통해 비핵화의 명확한 목표를 세울 수 있다면 톱다운(정상 간 통 큰 합의 뒤 후속 협의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식) 접근이 올바른 방향이다”라고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말했다. 시사 월간지 〈애틀랜틱〉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5년 이상 미완으로 남겨진 북한 핵 협상의 특징인 보텀업(실무진 협상에서 점차 정상 간 합의로 올라가는 방식) 접근을 뒤집고 톱다운 방식을 통한 점프 스타트를 실험 중이다. 이런 새로운 접근이 북핵 위협을 감소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특히 제임스 홈스 미국 해군대학 교수는 이 잡지와 인터뷰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 정치적 관계 및 상호 신뢰를 강화한 뒤 이를 바탕으로 비핵화로 나아가려는 것 같다”라고 평가했다. 빅터 차 조지타운 대학 교수도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싱가포르 회담의 성과로 ‘무엇보다 한반도 전쟁 위험이 가셨다’는 점을 꼽았다. 빅터 차 교수는 “관례를 벗어난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외교는 많은 결점이 있지만 그에게 공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라고 평가했다.

적대 관계였던 양국의 정상이 전면에 나서서 핵 문제 같은 난제를 협상한 선례는 외교사를 통틀어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양측 외교 실무진의 협상을 통해 우선 쟁점을 해소하고 합의 사항을 도출한 뒤 정상회담에서 발표하는 게 외교 관례였다. 실제 1990년대 이후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6자회담, 혹은 북·미 양자회담의 역사를 살펴보면 각국이 차관급을 대표로 협상단을 꾸려 실무협상을 벌였고, 이를 상부에서 추인하는 보텀업 방식이었다.

북·미 협상 역사를 보면 톱다운 선례가 한 번 있었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2000년 10월 당시 조명록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특사 자격으로 백악관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했다. 곧이어 올브라이트 국무장관도 평양을 답방해 김정일 위원장에게 클린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그 결과 상호 적대 의사 중단과 신뢰 구축, 관계 개선을 골자로 한 ‘북·미 공동 코뮤니케’를 발표하는 등 북·미 관계가 급반전될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그해 11월 대선에서 조지 W. 부시 후보가 당선되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면서 북·미 관계는 급속히 악화됐다.

2000년 북·미 협상 당시와 비교해보면

싱가포르 회담은 2000년 북·미 협상 당시와 흡사한 측면이 있다. 회담 성사를 위해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평양과 백악관을 방문했다. 시기적으로도 2000년 10월 조명록-올브라이트 교환 방문 전 그해 6월 남북한은 첫 정상회담을 여는 등 화해 무드였다. 싱가포르 회담도 4월27일 남북이 정상회담을 하는 등 본격 화해 무드가 조성된 뒤 이뤄졌다. 2000년과 비교해 2018년 남·북·미 관계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북핵 협상에 부정적이던 부시 대통령과 달리 트럼프 대통령은 북핵 문제를 최대의 외교 과제로 삼고, 톱다운 외교에 상당히 적극적이다.

올해 72세인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성공을 위해 자신보다 38살이나 어린 김 위원장을 동등한 국가원수로 깍듯이 대했다. 지난해 “꼬마 로켓맨”으로 비하했던 김정은 위원장을 가리켜 “아주 똑똑한 사람이고, 대단한 협상가”라며 한껏 치켜세웠다. 그는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에게 백악관 핫라인 번호를 줬고, 비핵화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단을 약속했다. 또한 비핵화의 대가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할 뜻을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톱다운 접근 방식이 아니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조치다. 특히 그는 비핵화에 대한 김 위원장의 진정성을 믿고, CVID 대신 ‘완전한 비핵화’라는 문구가 담긴 공동성명에도 합의했다. 통상적인 외교 협상이라면 미국 실무진이 CVID라는 문구를 끝까지 주장했을 터이고, 합의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북·미 정상회담 후속 조치 논의 등을 위해 워싱턴 DC를 방문한 임성남 외교부 차관은 ‘2018 한·미 전략포럼’ 기조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지도자와 직접 만나는, 선례 없는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라면서 “이런 지도자들이 없었다면, 또한 그들의 궁합이 맞지 않았다면 판문점 선언도, 싱가포르 공동성명도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트럼프의 톱다운 외교 방식을 평가했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하는 톱다운 외교가 2년6개월 남은 임기 동안 얼마나 결실을 거둘 수 있을 것이냐 하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체제 안전보장은 물론 막대한 경제개발 지원까지 약속할 정도로 ‘올인’한 상황이다. 북한 주장대로라면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밝힌 비핵화의 ‘단계적·동시 조치’에도 동의한 상태다. 현 단계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희망은 최소한 자신의 임기 내에 북한이 핵무기 혹은 핵물질 반출, 탄도미사일 기지 폐쇄 등과 같은 구체적인 비핵화 조치를 취해주는 것이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6월18일 “싱가포르에서 합의한 약속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살을 붙여야 한다. 실무진이 현재 작업 중이고, 나도 너무 늦기 전에 (북한에) 가야 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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