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물 시대’가 예기치 않게 펼쳐졌다. 2016년 박근혜 게이트에서 터져 나온 안종범 업무수첩, 김영한 업무일지, 정호성 전화 녹음을 시작으로 적폐의 민낯이 드러났다. 이제는 고유명사가 된 2017년 ‘청와대 캐비닛 문건’이 증언하는 바도 같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저지른 불법과 탈법이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았다. 2018년 초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소유했던 서울 서초동 영포빌딩 지하 창고에서 청와대 문건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이 전 대통령의 혐의를 뒷받침한다. 현재 박근혜 정부 시절 양승태 대법원의 법원행정처가 만든 문건이 공개돼 재판 거래 의혹이 일고 있다.

가장 뜨거운 이슈의 중심에 늘 기록물이 있다. 무언(無言)의 기록물만큼 진중하고 정직한 증인도 없다. 그래서 기록물은 시대의 성실한 증언자다. 6월4일 서울 종로 서울기록정보센터에서 이소연 국가기록원 원장(56)을 만나 기록물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물었다. 이 원장은 지난해 11월 민간 개방직 출신으로 처음 국가기록원장에 취임했다. 문헌정보학을 전공하고 도서관 사서를 양성했던 그는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기록 전문가로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기록 관리 후퇴에 대한 지적이었다. 2016년부터 2017년까지 한국기록학회장을 역임하며 ‘세월호 7시간’ 관련 등 공공기록물 공개를 한사코 거부하던 박근혜 정부를 비판했다.

이 원장은 기록물이 사회를 투명하게 하고 신뢰하게 만드는 도구라고 강조했다. 시민들은 기록, 특히 공공기록물에 관심을 기울이고 공무원들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도구로서 기록의 중요성을 깨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원장의 눈으로 기록물 시대를 읽어보았다.

ⓒ시사IN 조남진이소연 국가기록원 원장은 “‘기억하겠다’는 것은, 과거를 살펴보고 현재를 정비하고 더 나은 내일을 만들겠다는 의사 표현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9년 동안 공공기록물 관리가 후퇴했다는 평가가 많다. 이관 양 부풀리기, 가치 없는 기록의 이관, 대통령지정기록제도 악용 등이 지적된다. 심지어 박근혜 정부가 대통령기록물로 지정해 남긴 자료의 절반 정도는 직원식당 식단관리, 청소도구 물품 관리 내역 등이었다.

대통령기록물 관리는 확실히 후퇴했다. 무(無)의 상태로까지 돌아갔다. 기록 관리를 안 한 것으로 보인다. 관리를 제대로 했다면 청와대 캐비닛 문건이 그렇게 막 나올 수 없다. 열어봤다면 다 파기했을 거다. 참 묘한 게,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임기 초반에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을 들어 전임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공격했다. 이 전 대통령 임기 후 5년이나 지나 자신의 소유였던 영포빌딩에서 청와대 문건이 박스째 발견되었다. 이 전 대통령은 현재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 혐의 등으로 법정에 서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참모들과 소통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보고 자체를 받지 않았으니 기록이 남지 않아야 한다. 그랬는데 안종범 업무수첩, 김영한 업무일지, 정호성 전화 녹음이 드러났다.

‘기록의 아이러니’다.

그렇다. 기록이 무섭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기록’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공격했는데, 정작 자신이 기록으로 법적 책임을 지게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원인 행위조차 안 했는데 우회적인 방식으로 기록을 남겼다. 알려진 바로는, 김기춘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 수석보좌관들을 모아놓고 받아 적으라고 했다는 거다. 협의와 토론이 아닌 지시사항이 일방적으로 하달되는 회의였다. 고위 공직자인데, 초등학생이 담임교사 지시를 종합장에 받아 적듯이 성실히 받아 적었다. 왜 그랬을까? 지시사항을 정확하게 적어서 이행해야만 책임을 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받아 적으라는 사람의 의도도 그랬다. ‘건성으로 듣지 말고, 내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중요하니까 남김없이 다 적어서 이걸 다 이행해.’ 이처럼 기록은 옳은 방식으로든 옳지 않은 방식으로든 업무를 이행할 수 있게 하는 기본 도구다.

ⓒ연합뉴스2016년 안종범 업무수첩, 김영한 업무일지 등을 통해 ‘박근혜 게이트’ 민낯이 드러났다. 위는 2016년 9월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주재한 수석비서관회의.
기록물이 중심이 된 박근혜 게이트 등 일련의 사건에서 의미와 교훈을 찾자면?

시민들이 기록 관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록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 투표권이 있는 시민이 기록을 통해 권력을 감시하고 사후에라도 책임을 물을 수 있다. 2008년 봉하마을 이지원 시스템 유출 논란, 2013년 노무현·김정일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논란, 그리고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remember 0416’ 캠페인 등 국정 농단 사건만이 아니라 지난 9년 동안 기록 관련 이슈가 많았다. 특히 세월호 참사 관련 움직임은 전문가로서도 깜짝 놀랐다. ‘기억하겠다’ ‘기록하겠다’라는 것은, 과거를 살펴보고 현재를 정비하고 더 나은 내일을 만들겠다는 공통 의사 표현이다. 불행한 일이 왜 일어났는지 찾아낼 때까지 잊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일이 왜 벌어졌는지 알아야 또다시 참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기록과 관련된 시민의식은 계속 성숙되고 있다.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대통령기록물관리법)은 참여정부 시절 만들어지고 공포되었다. 2008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이 법을 근거로 삼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무단으로 대통령기록물을 사저로 가져갔다고 주장했다. 노 전 대통령이 회고록을 쓰기 위해 이지원 시스템이라는 전자 기록 사본을 복사했다. 이명박 정부의 국가기록원이 나서서 노 전 대통령의 비서진을 고발했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정쟁에 휩싸이기 싫다며 되돌려줬다. 당시 차명진 한나라당 대변인은 ‘장물’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공격을 했다.

이에 대해 이소연 원장은 “전자파일 논의에서 원본과 사본 차이를 전혀 두지 않고 공격을 했다. 문서 파일 하나 남에게 보낸다고 해서 자신의 컴퓨터에 있는 파일이 없어진 게 아니다. 그럼에도 당시 정치권과 언론은 본질적 속성 차이에 대해서 구분하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당시 이 원장은 이명박 정부의 주장이 문제 있다는 글을 언론에 기고하기도 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여론의 운동장에선 먹혀들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매도하는 분위기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 덕성여대 교수였던 이 원장은 발언해야 할 때 발언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때부터 그는 이명박 정부의 기록 관리 후퇴를 비판했다.

기록이 근거가 돼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적폐가 형사처분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많았다. 공무원으로서는 두려울 수도 있다.

교수였을 때, 다른 건 몰라도 공무원 대상 기록 관리 특강은 거절한 적이 없다. ‘기록 관리 도대체 왜 하나’라는 제목으로 전국을 다녔다. 공무원 사회에서 기록 관리는 기본적으로 업무에 방해된다고 여긴다. 그래서 ‘기록으로 스스로를 보호하십시오’라는 요지로 강의를 했다. 지시한 사람들은 주로 독대나 비밀회담 등으로 결정을 한다. 결과적으로 기록으로 업무상 역할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만 책임지게 된다.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책임을 져야 할 결정권자는 다 빠져나간다. 부당한 지시를 받고 거부할 수 없었던 사람들만 책임지게 된다.

오히려 기록이 보호막이 된다는 건가?

그러니까 지시를 기록으로 받아야 한다. 박근혜 정부에서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장관이 퇴임식을 하면서 당부한 게 있다. ‘부당한 지시를 받을수록 세세하게 기록으로 남겨라.’ 실제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때 문체부 공무원들이 기록을 많이 남겼다. 심지어 관련 기록을 폐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직원들이 집에 가져다 뒀다. 그러다 특검 조사가 시작되자 보자기에 관련 기록을 싸서 들고 갔다고 한다. 나도 민간인이었을 때,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보면서 ‘와 어떻게 하라는 대로 다 하느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 와서 보니까 공무원 사회는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기 어렵더라. 또 공무원이 하라는 일을 안 해도 문제다(웃음). 하란다고 한 걸 처벌하는 식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불법적인 지시를 거부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불법적인 일을 하라고 지시받았을 때, 그걸 거부할 수 있고 거부해도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근거를 남겨야 한다는 건가?

그게 기록이다. 공무를 기록으로 남기는 게 가장 좋다. 기록을 남기면 시간이 지나도 진상이 밝혀진다.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고 비판만 하고 끝내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구조, 실제 지시 내린 사람 등을 기록으로 찾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공직 사회에서 기록은 굉장히 강력한 도구다. 과거에도 이렇게 강조하고 다녔는데, 이번에 사례가 나왔으니 더 명백해졌다. 현재 공공기록물관리법 등은 업무 수행 기관의 기록 생산 의무를 강하게 요구한다. 그럼에도 업무를 하는 공무원의 기록 관리 노력이 없으면 안 된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지난 1월 수자원공사의 4대강 문서 파기가 이뤄졌다.

다행히 제보자 덕분에 알려지긴 했다. 전자 기록물이 더 걱정이다. 종이 기록은 물리적으로 없애는 데 품이 많이 든다. 전자 기록은 버튼 한번이면 끝이다. 심지어 전자 기록은 의도하지 않았는데 없어지기도 한다. 새 시스템으로 옮길 때 안전하게 갈무리(백업)해서 남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 지웠다는 흔적도 남지 않을 수 있고, 지워도 흔적만 남고 내용이 복구가 안 될 수 있다. 요즘은 거의 모든 업무를 전자 기록으로 한다. 전자 기록 파기를 막고, 파기했다고 해도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에 찾아서 주의를 환기시키는 힘을 국가기록원이 가졌으면 좋겠다.

국가기록원의 독립성·중립성 확보도 중요한 문제로 꼽힌다.

우선 민간 개방직 원장이 생겼다는 자체가 큰 진전이다. 민간인 출신 원장은 전문가들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웃음). 아직은 임기 초반이라 모든 걸 다 말할 수 없지만, 선례를 쌓아가려고 한다. 기록 관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정권이 왔을 때를 대비해, 선례를 남기고 쌓아야 한다. 기록을 통해 더 책임성 있는 정부를 만들겠다는 쪽과 기록에 적대적이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쪽이 있을 경우, 그 중간에 서는 것이 중립성·독립성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공공기록물 관리는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계속 이어져야 하는데?

기본적으로는 국가기록원 등 관련 기관과 전문가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지만, 시민들의 관심과 지지도 중요하다. 시민이 기록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공무원이 제대로 업무를 처리하는지 정보공개를 청구하고, 그 답을 기록으로 달라고 해야 한다. 물론 공무원은 기본적으로 ‘설명 책임’이 있다. 올해 초 이낙연 국무총리도 이 점을 강조했다. 정보공개는 시민이 ‘나 그거 알아야겠어’라고 요청하면 대응하는 소극적 서비스다. 설명 책임은 국민이 요청하지 않아도 공무원이 ‘이렇게 했습니다’ ‘이런 취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업계획을 짜서 이렇게 실천했습니다’라고 먼저 설명하는 것이다. 공무원은 설명 책임이 있고, 시민은 정보공개 청구 권리가 있다. 그 중심에 기록이 있다. 기록은 근본적으로 성찰과 반성이라는 의미를 담는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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