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사에서 이창동은 꽤 이질적인 존재다. 고등학교 국어 교사였던 그는 서른 살에 소설가가 되었고,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1993) 연출부로 영화 현장을 처음 접한다. 첫 영화 〈초록 물고기〉(1997)를 만들었을 때는 40대 중반이었고, 50살이 되었을 땐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관료 생활을 한다. 퇴임 후 다시 메가폰을 잡았고 〈밀양〉(2007), 〈시〉(2010) 그리고 〈버닝〉은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았다. 그가 단지 ‘이색 경력의 영화감독’에 그치는 건 아니다.

진정 독특한 건 영화였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는 이전의 한국 영화와 구분되는 그 무엇이 있었다. 억지로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적 톤, 장르 요소에 휘둘리지 않는 이야기, 캐릭터에 대한 생생한 느낌….
이른바 ‘한국 영화 르네상스’ 시기에 그는 새로운 영화 미학을 선보인 대표 감독이었다.

ⓒAFP PHOTO5월16일 칸 영화제 레드카펫에 선 이창동 감독과 배우 유아인, 전종서, 스티븐 연(왼쪽부터).
이창동에 대한 감독론을 쓰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이 글에선 반복되어 나타나는 테마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먼저 데뷔작 〈초록 물고기〉. 주인공 막동이(한석규)는 군에서 막 제대한 20대 청년이다. 일산에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고향을 잃은, 일종의 실향민인 그는 어느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며 미애(심혜진)와 사랑에 빠지고 배태곤(문성근)을 형님으로 모신다. 당시 유행하던 갱스터 누아르 액션 장르 영화처럼 보이지만, 정작 〈초록 물고기〉가 말하려는 건 따로 있다. 이것은 이후 그의 영화에서, 〈박하사탕〉(2000), 〈오아시스〉(2002) 그리고 최근작 〈버닝〉까지 이어지는 키워드, 바로 ‘정체성’이다. 이것은 철학적이거나 거창한 얘기가 아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젊음에 대해 이창동 감독은 지속적으로 이야기해왔다. 이것은 확장하면 이창동 감독이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기도 하다. 그의 시선엔, 우리 모두 표류하고 있다는, 우리들이 시간과 공간 속을 떠돌고 있다는, 일종의 비관주의가 있다.

〈초록 물고기〉의 막동이는 정체성의 부재 속에서 현실감각을 잃고 살아가는 젊은이다. 그는 온 가족이 모여 한집에서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막내다운 꿈’을 이야기하고, 형에게 전화를 걸어 울면서 어릴 적 물고기 잡던 추억을 말하지만, 어떻게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다 결국은 죽음으로 내몰린다.

이런 모습은 〈버닝〉의 종수(유아인) 에게서도 발견된다. 종수와 막동이는 데칼코마니의 양면 같은 인물이다. 종수 역시 제대 후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면서 작가의 꿈을 키워나가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을 쓰고 있진 않다. 종수는 해미(전종서)라는 고향 친구와 그녀를 통해 벤(스티븐 연)이라는 ‘금수저’를 만나게 되는데, 그들과의 관계는 혼란스러울 뿐이다. 지향점 없이 방황하는 청춘의 초상. 이것은 기성세대인 감독의 시선에 포착된 아래 세대의 모습이다.

〈오아시스〉 이후 1년4개월 장관으로 재직한 이창동 감독이 다시 돌아온 작품이 〈밀양〉(2007·위)이다.
트라우마, ‘이창동 영화’의 강력한 모티브

두 번째 작품 〈박하사탕〉은 또 하나의 테마를 드러낸다. 이 영화는 독특한 구조를 지닌다. 시간을 거스르며 진행되는, 마치 단편영화 7개를 연결한 듯한 〈박하사탕〉은 철로 위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남자 영호(설경구)의 과거로 역주행한다. 이 과정은 결국 그의 ‘트라우마’를 찾아가는 과정인데, 이것은 그의 많은 캐릭터들이 공유하는 경험이다. 영호의 삶은 왜 그토록 파괴된 것일까? 그 근원에는 1980년 광주에 투입되어 누군가를 죽인 ‘살인의 추억’이 있다. 트라우마는 그의 이야기에서 강력한 모티브다. 〈밀양〉에서 끔찍한 범죄로 아이를 잃은 신애(전도연)는 종교를 통해 그 고통을 잊으려 하며, 급기야 범인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심정까지 이른다. 그런데 범인은, 이미 자신이 하나님에게 용서받았다고 한다. 이 아이러니는 신애를 미치게 만든다. 〈시〉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한 여학생의 죽음에서 시작해 가해자의 할머니가 전하는 위로의 시로 끝난다. 이것은 크게 보면 한 사회나 공동체의 트라우마를 위로하는 과정이다.

설경구·문소리와 재회한 〈오아시스〉는 이창동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돌출적인 지점처럼 느껴진다. 〈오아시스〉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유일한 로맨스 영화이지만 그 사랑은 현실과 판타지 사이의 경계 위에 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사랑 그 자체가 판타지라고 말하는 듯한데, 이것은 〈버닝〉의 종수가 해미에게 느끼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종수는 벤에게 자신이 해미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해미는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다. 대상이 없는 사랑. 이것은 〈오아시스〉가 보여주는, 오직 두 사람만이 공유할 수 있는, 그러기에 타인들에게 인정받을 수 없는, 비현실적인 사랑의 변주인 셈이다.

〈오아시스〉 이후 1년4개월 동안 장관으로 재직한 이창동 감독이 다시 돌아온 작품은 〈밀양〉이다. 이 영화는 〈시〉와 함께 묶어서 바라봐야 한다. 두 영화는, 특히 〈밀양〉은, 한국 영화에 존재하지 않았던 서사의 흐름을 제시한 작품이다. 그것은 무고하게 희생되고 억울하게 피해 입은 자들에 대한 시선이다.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를 각색한 〈밀양〉은 용서해줄 권리마저 박탈당한 어머니의 이야기다. 밀양 여중생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시〉는 또 하나의 ‘〈밀양〉 서사’다. 성폭행을 당한 후 자살한 소녀. 가해자의 부모들은 돈으로 사건을 해결하려 하고 선생들은 조용히 덮으려 한다. 유일하게 그 죽음을 진지하게 접근하는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기억을 잃어가는 할머니 미자(윤정희)다. 〈밀양〉과 〈시〉는 ‘고통’이라는 테마를 통해 인간관계의 모순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 영화들에선 스타일 면에서 감독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정말 날것 그대로 담아내려 한 그의 카메라는, 장르나 판타지 등으로 포장되기 마련인 영화의 문법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버닝〉은, 지금까지 그가 만든 영화들의 종합이자 변주이며 미스터리라는 장르적 요소를 받아들여 더욱 흥미로워진 작품이다. 그가 젊은 시대를 대하는 ‘절망적 공감’에 완전히 동의하기는 쉽지 않지만, 어떻게 보면 방관자적 시선일 수도 있지만, 하나의 텍스트로서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다양한 의미들은 전작들과 사뭇 달라 보인다. 영화 속 대사처럼 “수수께끼” 혹은 “메타포” 같은 영화? 어쩌면 그의 다음 행보는 더욱 깊은 미스터리에 빠질지도 모르겠다.

기자명 김형석 (영화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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