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 축하드려요. 저도 꿈이 초등학교 선생님이에요.” 스승의 날 한 제자가 곱게 접은 손편지를 내밀었다. 카네이션 생화와 선물은 모두 돌려보냈지만 커서 친절한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편지까지 거절하지는 못했다. 형광펜과 색연필로 알록달록 꾸민 편지지에는 ‘가르쳐주셔서 고맙다’는 인사와 ‘자기도 남이 모르는 걸 알려줄 때 기쁘다’는 문장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올해로 발령 10년차,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제자들을 만나면 대견함과 우려가 동시에 밀려온다. 그러나 아이들의 꿈을 응원하고 열의를 지켜주고 싶었기에 늘 격려되는 말을 해주곤 했다. 세간의 화제가 된 ‘스승의 날 폐지 청와대 청원’에 참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교사로 살아가는 일상이 녹록하지 않다는 진실을 가슴속에 묻어두었다. 직업 교사에게는 ‘스승’이라는 정체불명의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첫 발령지에서 밤 10시가 넘어 걸려온 전화를 받지 않자 부재중 통화 5건이 쌓였다. 정말 다급한 사고가 터진 줄 알고 떨리는 가슴으로 통화를 시도하자,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느냐는 다그침이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이어 자녀 양육의 어려움에 대한 독백을 한 시간 동안 들어야 했다. 그런 밤이 왕왕 있었다.
너무 힘들었지만 이런 학부모까지 잘 받아주는 것이 선생님의 미덕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했다. “요즘 스승은 없고, 교육공무원만 있다”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스승답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한 해 두 해 지날수록 실체도 막연한 스승의 이미지가 허구이며 오히려 교권을 무너뜨리고, 교사의 일상을 흔드는 단어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재작년, 만성으로 앓고 있는 고막염으로 왼쪽 귀에서 고름이 줄줄 나왔으나 연가를 쓰지 못했다. 사정이 있어서 병가나 연가를 내려면 수업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에서 전담 시간표를 조절하거나 결·보강을 신청해야 한다. 그런데 평일 오후에 갑자기 증상이 나타나서 학습 자료를 미리 준비하지 못했고, 다른 선생님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결국 다음 날 무리하게 수업했고, 병을 더 키워 연휴 기간 다른 지역에 있는 대형 병원을 이용해야 했다. 아이들과 온종일 함께 생활하고 전 과목을 가르치는 초등학교의 특성상 교실을 비우면 안 된다는 분위기가 있다. 교사들의 희생은 스승이라는 미명하에 당연시된다. 교사가 사명감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근무하는 건 고무적이지만 몸과 마음이 황폐화되는 정도라면 분명 문제가 있다.
제자가 선생님이 될 무렵에는
“애들이나 때리고 촌지 받아먹는 철밥통, 학교에 스승이 있긴 한가. 예전엔 안 그랬는데.” 가끔 교육 기사 댓글 창을 읽기가 두렵다. 학교에서 상처받은 분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하고 안타깝다가도 도대체 언젯적 촌지, 폭력을 말하는가 싶어 의문이 들기도 한다. 댓글에서 말하는 교사가 스승이었던 시절은 언제란 말인가? 박봉 타령하며 촌지 받고, 사랑의 매 운운하며 때리는 교사가 많았던 과거를 의미하는 건가?
교사는 국가의 법령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추고 학생들을 가르친다. 반면 스승은 생존 또는 대면 여부와 관계없이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존재라면 누구나 될 수 있다. 물론 내 인생의 스승으로 불릴 만한 교사들이 많아지면 좋겠으나 그것은 교사에게 전문성을 향상시킬 기회와 여건을 마련하고 최소한의 교권을 지켜줄 때 가능한 일이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을 후회한다”는 교사 응답(20.1%)이 OECD 평균(9.5%)의 두 배를 웃돈다. 현장의 절망과 신음소리를 뼈아프게 들어야 한다. 부디 제자가 선생님이 될 무렵에는 스승 아닌 전문 직업인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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