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떠나는 그라운드의 ‘마술사’
  • 이상원 기자
  • 호수 559
  • 승인 2018.06.16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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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축구장 한가운데에 선수 한 명이 앉았다. 1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구장에 관중은 없었다. 맨발로 잔디 위에 앉은 그는 경기장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휴대전화로 사진도 찍었다. 새벽 1시30분이 넘어서야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스페인 축구팀 FC 바르셀로나의 주장 안드레스 이니에스타(34)였다. 5월21일 경기를 끝으로 그는 22년간 바르셀로나 생활을 끝맺었다. 다음 행선지는 일본의 비셀 고베다.

축구 선수치고 이니에스타의 신체조건은 좋지 않은 편이다. 171㎝에 68㎏. 공중볼 다툼에 약하고 덩치 큰 선수와 부딪치면 나가떨어진다는 의미다. 다리는 새하얗고 앙상하며 머리가 조금 벗겨졌다. 전형적인 운동선수들의 용모와는 거리가 있다. 대신 발기술과 축구 지능이 압도적이다. 수비 두세 명이 붙어 압박해도 현란한 개인기로 벗어난다. 그 이상이 붙으면 자로 잰 듯 정확한 패스를 동료에게 넘긴다. ‘플레이 메이커’로서 최고의 덕목을 모두 갖췄다. 팬들은 이니에스타에게 ‘마술사(el ilusionista)’라는 별명을 붙였다.

ⓒGoal on Twitter

이니에스타는 1996년 바르셀로나 유소년 팀에 합류했다. 리오넬 메시, 세르히오 부스케츠, 제라르 피케 등 현 바르셀로나 주축 선수들도 어린 시절부터 이니에스타와 함께 뛰었다. 2000년대 후반 전성기를 함께 보낸 이들은 기술과 조직력을 앞세워 우승컵을 쓸어 담았다. 정확한 패스를 반복하는 ‘티키타카’가 주무기였다. 바르셀로나에서 이니에스타는 총 32회 클럽 우승을 맛봤다. 조국 스페인은 유로 2008, 2010 남아공 월드컵, 유로 2012 세 대회를 내리 제패한 첫 팀이 되었다. 유로 2012 MVP는 이니에스타 차지였다.

스페인에서 이니에스타는 실력만큼 뛰어난 인성으로도 이름 높다. 최대 라이벌인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도 이니에스타에 대해서는 “신사”라고 평한다. 레알 마드리드 홈 관중에게 기립박수를 받은 몇 안 되는 선수이기도 하다. 바르셀로나의 지역 라이벌인 에스파뇰 관중들도 이니에스타에게만은 우호적이다. 2010 남아공 월드컵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은 뒤, 사망한 에스파뇰 선수를 기리는 세리머니를 해서다. 지난해 바르셀로나가 카탈루냐 독립 문제로 일촉즉발의 상황에 처했을 때 주장으로서 대화를 통한 평화를 주창하기도 했다.

세계 최고의 선수에게 주는 상인 발롱도르는 받지 못했다. 2010년 최종 후보 3인에 들었으나 같은 팀 동료 메시에게 밀렸다. 이니에스타가 팀을 떠나겠다고 밝힌 지난 4월, 발롱도르 시상을 주관하는 <프랑스 풋볼>은 ‘우리를 용서해줘 이니에스타’라는 칼럼을 썼다. “이니에스타는 챔피언이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두뇌’라는 것을 입증했다”라고 적었다. 이니에스타는 “사과할 필요 없다. 같은 팀인 메시, 차비와 함께한 당시 시상식은 정말 아름다웠다”라고 화답했다. 이니에스타는 2018 러시아 월드컵에 출전한다. 국가대표 팀에서의 마지막 마술을 펼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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