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터무니없는 과장을 ‘만화 같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과장은 만화를 재미있게 해주는 요소의 하나일 뿐이다. 좋은 만화는 소설이나 영화보다도 더 실감 나는 간접 체험을 선사한다. 그림은 소설보다 시각적이고, 영화보다 인물의 특징을 잘 살린 묘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영신 작가의 〈남동공단〉은 작가가 인천 남부 공업단지 공장에서 일했던 체험을 만화로 옮겼다. 편의점, 카페, 마트, 영화 스태프, 막일 등 다양한 노동 경험이 있는 작가는 인천 남동공단에서 가장 오랫동안 일했다고 한다. 교통이 편하거나 연봉이 좋거나 복지가 좋아서가 아니다. 군대 대신 병역특례업체에 취직한 거라 무조건 3년을 채워야 했다.
〈남동공단〉은 만화이지만, 공장 이야기를 어느 쪽으로든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그는 제관(製管) 부서에서 강철을 자르고, 구멍 내고, 다듬어 각종 부품을 만들었다. 일은 서툴고, 분위기는 어색하고, 도구는 위험하다. 처음이라고 일부러 갈구는 선배와 악명 높은 실장까지 있어서 적응하기가 만만치 않다. 작업장에는 늘 쇳가루가 날리고 눈에 질산이 튀고 드릴이나 그라인더가 위험천만하다. 용접하다가 손목 살점이 녹는 일이 다반사다. 용접 불꽃을 바라본 날이면 밤새 눈에서 돌멩이가 굴러다녀 얼음찜질을 해야 한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다칠지 모르는 곳이다. 실제로 옆 부서에서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가 발생한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삶의 단면
그러면 월급을 많이 주거나 직장이 안정적인가? 그렇지도 않다. 함께 일하던 사람은 3년째 월급이 오르지 않는다며 퇴사하고, 사장이 내건 보너스 약속을 직원들은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동공단이 착취와 경쟁과 위험이 난무하는 지옥은 아니다. 남동공단은 어떤 특별한 곳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일하는 곳일 뿐이다. 수요일에 나오는 특식을 기다리며 일주일을 버티고, 회사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말 한번 붙여보지 못해 속만 태우고, 치열한 내기 탁구를 벌이며 친해지기도 한다. 그렇게 없어졌으면 좋겠다던 실장이 사장과 싸우고 회사를 그만두자 어쩐지 허전하다. 실장이 돌아오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실장을 씹는 모습은 그저 무대만 공장일 뿐,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과 다를 게 없다.
〈남동공단〉이 기승전결이 뛰어나 헤어날 수 없는 재미를 준다거나, 그림이 눈을 황홀하게 할 만큼 멋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어떤 화려함이나 예술적 기법으로 표현할 수 없는 ‘솔직함’이 있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삶의 단면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작가는 ‘공장 노동자’라는 소재 때문에 정치적인 해석이 더해지는 것을 우려한다. 그의 말처럼 〈남동공단〉은 그 자체로 재미있고 가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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