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때, 첫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선생님이 수업 대신 텔레비전을 틀어주었다. 지금 내 나이쯤이었던 담임 선생님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손을 맞잡을 때, 잠시 눈시울을 붉혔다. “아, 좋은 일인가 보다.” 역사적인 가치를 그 자리에서 체감하지는 못했지만, 그때 우리는 막연히, 어쨌든 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어렴풋이 느꼈다. ‘민족 대통합’ 같은 거창한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어쨌든 대화는 좋은 거니까. 저기 저 감격에 찬 선생님도 몽둥이를 들 때보다 애들이랑 웃으며 얘기할 때가 더 좋았으니까.
새삼스럽게 옛 기억이 떠오른 건 이후로도 내 감수성은 딱히 변하지 않아서다. 대학 시절, 당장 눈앞에 ‘MB’라는 ‘사회 모순의 정점’이 서 있는 마당에 ‘민족’은 한가한 소리였다. 등록금 걱정하느라 정신이 혼미한 마당에 통일은 배부른 소리였다. 머리로는 한반도의 모순적인 상황을 공부하고 이해했지만, 마음으로는 저 골치 아픈 사촌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아이스하키 단일팀도 시큰둥할밖에. “단일팀 자체가 감동이라는 건 대체 뭐지?” 단일팀 소식에 환호하는 선배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관심과는 다른 문제다. 시큰둥하다고 해서 ‘통일 개이득’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시큰둥해서 성과에 대한 갈망은 강했다. 국가가 철저히 실리적이었으면, 외교가 당당했으면, 한반도 긴장 완화가 현실적이었으면 하는 바람은 굳이 민족을 들먹이지 않아도 소망할 수 있으니까.
당위보다 논리에 반응하니, 4·27 정상회담은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굳이 남북이 한 국가가 되지 않더라도, ‘섬나라 헬조선’이 대륙과 연결된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평화의 값어치가 매우 크다는 걸 새삼 체감했다. 가슴보다는 머리에서 오는 흥분, 외교적 실리에 대한 기쁨이다. 적어도 국가가 계산이 명확한 외교를 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때늦은 빨갱이 타령이 촌스러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시큰둥한 이들은 제1야당 대표가 우려하는 것만큼 어리석지 않다. 그저 평화와 통일을, 조금 다른 관점과 감수성으로 바라볼 뿐이다. 65년 동안 미뤄둔 숙제를 앞으로 풀어야 할 주인공도 결국은 이들이다. 감히 시큰둥한 이들을 대변하자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기보다 평화와 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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