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27일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한 32명의 광주 시민군 기동타격대원 대부분은 구두닦이·재수생·일용 노동자 등이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은 계엄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그 후유증으로 평생 트라우마에 신음하며 살고 있다. 당시 시민군 제1기동타격대 소속이던 양동남씨(58)는 그런 ‘무명의 전사’들을 대표한다. 양씨를 옛 광주 상무대 자리에 있는 5·18구속부상자회 서부지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시사IN 이명익극우 세력에게 북한군으로 지목된 양동남씨(위)는 “북한군 침투설 같은 거짓 주장을 한 자들을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5·18 당시 참여한 계기는?

재수생으로 학원에 다니던 중 5월19일 계엄군에게 살해당한 시신 2구를 보고 분노를 참지 못해 시위대에 합류했다. 참혹한 희생자 시체를 태극기에 감싸 트럭에 싣고 시내를 돌며 시민들에게 알렸다. 계엄군이 시민을 상대로 무차별 발포한 5월20일부터는 자위권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5월21일 화순으로 가서 무기고를 털어 총 한 자루씩 받아 광주로 올라왔다.

재수생인데 총기를 다룰 줄 알았나?

예비군 형님들이 총기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일부 시민군은 고흥 금산에 있는 채석장에서 다이너마이트를 가져다 도청 지하에 쌓아두고 배수진을 쳤다. 계엄군의 발포와 학살로 시민들이 격앙되고 속속 무장에 나서자 5월21일 오후에 계엄군이 광주에서 물러났다.

계엄군 퇴각 뒤에는 무슨 일을 했나?

5월22일부터 낮에는 매일 도청 앞 집회장에서 질서를 유지했다. 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계엄군 몰아낸 것을 환호하며 ‘김대중 석방’ ‘살인마 전두환 물러가라’ 같은 구호를 외쳤다. 처음에는 광주 시내 각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시신 운구 작업도 도왔다. 계엄군 총에 맞거나 사망하면 구조 요청 전화가 도청 시민군대책위 상황실로 왔다. 밤에 도청에 머물며 5월27일 새벽 계엄군이 쳐들어올 때까지 기동타격대 1조를 맡았다. 주로 시내 순찰을 돌면서 치안을 유지하는 일을 했다. 당시 광주는 저녁 8시가 통행금지 시간이었다. 밤에 임신부나 위급한 환자를 병원으로 실어 나르기도 했다.

기동타격대는 당시 스스로 붙인 이름인가?

당시에는 차에다 ‘특수기동대’라 써 붙이고 다녔다. 내가 속한 1조 타격대는 동네 선후배 사이인 5명이 조원으로 구성됐다. 5월26일 오후부터 도청 안에 “내일 새벽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대책위에서 여자와 고등학생들을 먼저 내보냈다. 그날 자정 무렵 마지막 순찰을 돌았다. 새벽 1시께 골목골목에 계엄군이 숨어 있는 징후가 보였다.

그 후 어떻게 했나?

도청으로 돌아와 대책위 상황실에 수상한 공기를 보고했다. 도청에 남은 최후 결사대는 비장했다. 각자 집주소와 이름을 두 장씩 써서 한 장은 지도부에 제출하고, 한 장은 호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혹시 참혹하게 죽으면 가족이 몰라볼까 봐 식별하기 위해서였다.

ⓒ임종진이들이 뒤를 돌아보면 양동남씨가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던 사진이 걸려 있다. 흑백사진의 가운데 인물이 바로 양씨다
그날 밤 도청을 빠져나올 수도 있었는데, 갈등은 없었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인데 왜 갈등이 없었겠나. 하지만 짧게나마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지들과의 의리를 저버릴 순 없었다. 또 설마 계엄군이 그런 식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해 들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 도청 안팎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외신 기자들이 있었다. 또 도청 지하에는 폭발하면 도청을 날릴 정도로 엄청난 양의 다이너마이트가 쌓여 있었다. 그걸 무시하고 계엄군이 무모하게 강제 진압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계엄군 진입과 체포 순간에 대한 기억은?

도청 3층에 있는데 새벽 4시 전후로 엄청난 총성이 들렸다. 우리는 쳐들어오는 계엄군을 향해 직접 쏘지는 못하고 허공에 위협사격만 했다. 공포와 긴장으로 교전 과정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새벽 5시쯤 내가 체포되던 순간은 생생히 기억한다. 마지막 순간 시민군 박남선 상황실장이 들어와서 총기를 빼앗아 밖으로 던지며 “너희들이라도 살아서 나중에 역사에 똑똑히 증언하라”고 했다. 그 순간 계엄군이 천장에 연발 사격을 하며 들어왔다. 기동타격대 7조 김재구씨는 총을 버린 뒤 항복 표시로 두 손을 들고 나가는데 계엄군 총격에 손바닥 관통상을 입고 체포됐다. 나는 대검에 찔린 뒤 체포돼 등 뒤로 양손이 묶였다. 엄청난 구타와 발길질을 당하고, 돼지처럼 손발이 묶인 채 가슴으로 기어서 피 칠갑이 된 도청 계단에 질질 끌려 내려왔다. 도청 별관 민방공훈련소에 있던 7조 조원들은 수십명이었는데 기록상 생존한 사람은 3명이고 나머지는 행방불명됐다. 행방불명자는 시신도 못 찾아 어디론가 실려가 암매장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체포된 뒤 어디로 끌려갔나?

곧바로 트럭에 실려 상무대 헌병대 영창으로 인계됐다. 매일 불려나가 곡괭이 자루와 몽둥이, 지휘봉으로 온몸을 두들겨 맞았다. ‘광주사태가 성공하면 김대중씨가 경찰로 채용해준다고 약속했다’라는 얼토당토않은 날조된 조서를 적어와 사인하라고 했다. 그런 조사 과정에서 골절이 생겼다. 그러자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했다. 병원에서 70일 정도 있다가 재판에 회부되면서 광주교도소로 넘어갔다.

가족은 몰랐나?

도청에 기동타격대로 있다가 내가 없어지자 아버지가 광주 시내 병원 영안실은 다 뒤지고 다녔다고 하더라. 양림교회 전도사님이 통합병원으로 예배 나와서 내 사연과 연락처를 적어 내보냈다. 그제야 집에서는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오셨다. 그러나 군에서 면회를 금지시켜 먼발치에서 되돌아서던 아버님 뒷모습만 뵈었다.

무슨 죄목으로 처벌받았나?

나 같은 기동타격대원은 내란 실행 혐의 등으로 기소되었다. 그때는 계엄 상태이니까 육군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았다. 1심에서 7년형을 선고받고, 고등군법회의에 항소했으나 기각돼 7년이 확정됐다. 1980년 12월29일에 교도소에서 불러서 나갔더니 상무대로 끌고 갔다. 거기서 다시는 반정부 시위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하더라. 형 집행정지로 가석방됐다. 전두환이 정권 찬탈에 성공했으니 시혜를 베푸는 듯 쇼를 한 것이다. 재심을 청구해서 1998년 무죄판결을 받았다.

석방된 이후 어떻게 살았나?

출소 후에도 경찰 정보과에서 감시했다. 그게 싫어서 남원 등지로 도망가면 금세 알고 현지 경찰이 찾아왔다. 1980년대 내내 황석영 소설가 등이 쓴, 5·18 진상을 담은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갖고 전국으로 쏘다니면서 진실을 알렸다.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등 안 가본 데 없이 다녔다. 가는 곳마다 정보과 형사들이 지키고 서 있더라. 굴하지 않고 다니니까 안기부 요원이 와서 5000만원을 줄 테니 그만하라고 회유했다. 거절했다. 그 때 5·18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분신자살 등 학생들이 희생했을 때다. 그들의 희생 없이는 여기까지 못 왔을 것이다.

5·18 38주년을 맞는 감회는?

요즘 젊은이는 5·18을 잘 모르고 언론도 5월에만 반짝 관심을 기울일 뿐이다. 그러다 보니 극우 세력이 공공연하게 가짜 뉴스를 만들어 분통 터지게 한다. 극우 논객 지만원과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 사이트에서 나를 북한 권력 서열 2인자라는 최룡해로 지목했다. 그들이 특수부대원으로 광주에 남파됐다고 지목한 그 사진은 도청 앞 집회에서 찍힌 나다. 그렇게 지목된 주변 사람이 7명이나 된다. 우리는 지만원 등을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함께 고소했다. 그들의 주장을 보면 광주 5·18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다. 전두환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북한군 침투설을 주장했는데, 이런 거짓 주장도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


ⓒ양동남“여그는 마지막까지 내가 지키던 곳이여. 끌려나올 때 고통도 못 느꼈어. 공포 때문에. 일주일인가 지나서 보니께 뭐에 찔린 건지 엉덩이 살이 썩어 들어가고 있더라고. 대검에 찔렸던 게지.”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지켰던 기동타격대원 양동남씨는 38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그 밤’ 도청을 잊지 못한다.
ⓒ양동남그는 모진 고문으로 70여 일간 국군광주통합병원에 강제 입원했다. 고문보다 이 시기에 겪은 고립감이 더 큰 상처로 남았다. 사진은 병원 내 양씨의 침상이 있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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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남양동남씨는 5월이면 어김없이 5·18자유공원 내 상무대를 찾는다. ‘동지’들과 5월 체험 행사를 함께 진행한다. 상무대 법정 체험 공간에서 체험객들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을 찍었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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