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반도체 보고서 영업비밀 아니다”
  • 천관율 기자
  • 호수 553
  • 승인 2018.04.18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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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부가 삼성 반도체 공장의 작업환경 보고서를 공개하겠다고 결정했다. 지난 2월 대전고법은 작업환경 보고서만으로 영업비밀이 유출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바 있다.

삼성 반도체 공장의 작업환경 측정보고서(이하 작업환경 보고서)는 영업비밀인가? 작업환경 보고서를 공개하면 삼성이 축적한 노하우가 유출되어 해외 경쟁사들이 삼성의 기술을 따라잡게 되나. 애초에 이 작업환경 보고서는 왜 논란의 중심에 섰나.

작업환경 보고서를 공개하겠다는 고용노동부(노동부)의 결정이 파장을 일으켰다. 삼성전자는 작업환경 보고서가 공개될 경우 반도체 생산 공정의 핵심 노하우가 중국 등 해외 경쟁사로 유출된다고 주장했다. 김기남 삼성전자 사장은 “30년간 노력해서 축적한 반도체 기술이 담겨 있다”라고 말했다. 보수 언론과 경제지 등은 이 주장을 받아 국부 유출 논란으로 확전시켰다. ‘외화를 벌어오는 수출기업’ 대 ‘반(反)기업 정서에 사로잡힌 좌파 정부’ 구도로 공세를 이어갔다. 삼성은 행정심판과 소송을 제기했다. 그에 따라 자료 공개에 일단 제동이 걸린 상태다.

ⓒ삼성전자 제공영업비밀을 보호할 기업의 권리와 정보를 제공받을 노동자의 권리가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위는 삼성전자 화성 반도체 공장 15라인의 내부 전경.

영업비밀 유출을 호소하는 삼성의 주장은 올해 2월 대전고등법원(대전고법)에서 기각당한 논리다. 대전고법은 피고 대전지방고용노동청이 원고 김 아무개씨에게 작업환경 보고서를 공개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피고인 대전지방고용노동청은 삼성의 주장을 받아들여 작업환경 보고서 공개를 거부해왔다. 원고인 김씨는 삼성 반도체 온양공장 백혈병 사망자 이 아무개씨의 유가족이다. 김씨는 이씨의 사망이 산업재해(산재)였다고 입증하려면 작업환경 보고서가 필요했다. 대전고법은 작업환경 보고서만으로는 “피고가 우려하는 정보까지 알려지게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라고 판단했다. 영업비밀이 아니라는 얘기다. 

재판 과정에서 재판부는 작업환경 보고서가 공개되면 영업비밀이 유출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전문가 집단인 한국산업보건학회에 사실조회를 의뢰한다. <시사IN>은 이 한국산업보건학회 사실조회서를 단독으로 확인했다.

재판 과정에서 특히 문제가 된 정보는 설비, 인건비, 화학물질 관련 정보였다. 구체적으로는 공정에 배치된 설비 기종·보유 대수·생산능력·설비 배치, 공정자동화를 통한 인건비 절감 효과, 공정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의 종류·사용량·구성 성분 등이다. 이상의 정보를 작업환경 보고서에서 확인하거나 유추할 수 있다면, 영업비밀이 빠져나간다는 삼성의 주장에 힘이 실린다.

한국산업보건학회의 결론은 간명하다. 작업환경 보고서에 위 내용은 기재되지 않는다. 설비의 기종·보유 대수·생산능력은 쓰지 않는다. 작업자 수는 기록된다. 하지만 인건비나 인력의 숙련도는 작업환경 보고서로 알 수 없다. 화학물질의 경우, 사업장이 영업비밀로 보호하려면 법적 보호를 받기 때문에 작업환경 보고서에 쓰기는커녕 측정자도 알 수가 없다.

정보가 쓰여 있지는 않아도 유추는 가능하지 않을까? 한국산업보건학회는 이 가능성도 기각한다(오른쪽 사진). 설비 관련 정보는 기록이 없으므로 추정도 불가능하다. 인건비 절감 효과의 경우, 단위 작업이 아니라 유사한 작업환경 노출 중심으로 이뤄지는 측정의 특성상 공장별 인원수 추정도 불가능하다. 화학물질의 경우에도 영업비밀 물질은 조사 단계에서부터 보호받기 때문에 추정이 불가능하다. 한국산업보건학회는 이렇게 쓴다. “그동안 연구용역을 수행한 경험에 의하면 작업환경 보고서를 통해 사업장의 현황(사업장 배치도, 공정, 설비, 화학물질 사용량 및 취급 현황 요약)을 파악하는 것은 모두 불가능하였다.”

한국산업보건학회 사실조회는 중요한 정보를 확인시켜줌과 동시에, 왜곡된 논점 하나를 바로잡아준다. 이번 논란은 ‘반도체 공정의 산업적 가치’를 평가하는 문제가 아니다. 작업환경 보고서가 공개되었을 때 영업비밀이 유출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를 평가하는 문제다. 전자라면 반도체 공정에 해박한 산업전문가가 권위자다. 하지만 후자의 문제라면, 산업 환경 측정을 연구하는 이들도 역시 권위자다. 질문이 무엇인가에 따라 필요한 전문성의 종류가 달라지는 것이다.

언론이 논점 비틀어 삼성 논리 옹호

보수 언론과 경제지는 논점을 비트는 전략을 쓴다. 4월11일자 <매일경제> 사설은 이렇게 썼다. “보건 및 의료 관련 교수들이 멤버인 산업보건학회는 반도체 공정의 산업적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한국산업보건학회는 반도체 공정의 산업적 가치를 판단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법원이 그걸 물어본 적이 없다.

한국산업보건학회는 “작업환경 보고서로 사업장의 현황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판단했다.

작업환경 보고서가 공개된 적이 없는데도, 보수 언론은 작업환경 보고서 정보로 공정부터 화학약품까지 온갖 노하우가 빠져나갈 가능성을 거론하고 있다. 4월7일 <조선비즈> 해설 기사는 “어떤 장비와 화학물질을 사용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공개되면 중국 기업들에게 낸드플래시 산업 진입의 문을 열어주는 격이 됩니다”라고 썼다. 한국산업보건학회가 “공개되지 않는다”라고 회신한 바로 그 정보, 장비와 영업비밀 화학물질 정보가 공개된다는 전제로 주장을 편다. 언론에 공개된 반도체 산업 전문가들의 주장은 ‘어떤 정보가 공개된다면’이라는 가정법에서 출발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반도체 산업의 비밀주의는 그 나름의 논거가 있다. 반도체 산업이 세밀한 디테일에서 역량 차이가 드러나며, 한 조각의 정보로도 생산 공정을 유추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고 반도체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런 산업에서 정보 유출에 특히 민감한 태도는 납득 가능하다. 반도체 산업과 같은 고부가가치 수출 핵심 산업이라면 아주 작은 위험이라도 가능하면 차단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법원과 노동부는 왜 정보공개의 손을 들어주었나?

법률은 기업이 영업비밀을 보호할 권리를 보장한다. 동시에 노동자는 생명·신체·보건과 직결된 정보를 알 권리가 있다. 산업안전보건법 제42조는, 사업주가 작업환경 측정 결과를 노동자에게 알려야 한다고 규정한다. 삼성 반도체 공장 사례에서 두 권리는 정확히 상충한다. 산재를 의심하는 피해자 가족은 특히 작업환경 정보가 절실하다. 산재는 작업환경과 재해의 인과관계를 노동자 쪽에서 입증해야 하는데, 작업환경 정보가 비밀로 묶이면 인과관계를 따져보기도 전에 산재를 입증할 길이 막혀버린다. 삼성 반도체 문제에서 되풀이해 등장했던 ‘원천봉쇄’다.

지난 2월 대전고법의 정보공개 판결은 유가족들이 산재를 입증하려 할 때 필요한 정보는 최대한 공개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판결문은 이렇게 쓴다. “측정위치도가 있어야만 원고(유가족)는 해당 사업장 내의 어느 곳에서 어떠한 유해인자들이 노출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바, 이는 근로자의 생명·신체·보건과 직결된 정보로서 공개되어야 할 필요성이 매우 높다.”

이렇게 보면 작업환경 보고서 공개 문제는 ‘외화를 벌어오는 수출기업 대 반기업 정서에 사로잡힌 좌파 정부’의 대결 구도가 아니다. ‘영업비밀 보호를 주장하는 기업 대 건강권을 위한 정보공개를 주장하는 노동자’의 대결 구도다. 구도가 전자라면 기업 편이 늘 옳다. 하지만 후자의 구도라면, 둘 중 언제나 옳은 선택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정보공개의 실익과 위험의 크기를 최대한 섬세하게 측정하고 그 결과를 놓고 비교하는 접근법이 필요하게 된다.

대전고법이 했던 작업이 그것이었다. 법원은 영업비밀을 보호할 기업의 권리와, 정보를 제공받을 노동자의 권리를 저울에 올려놓았다. 그 결과 이번 사건에서는 영업비밀 유출의 가능성은 거의 없는 반면 정보공개의 필요성은 매우 크기 때문에 노동자 쪽의 권리가 우선한다고 봤다. 삼성이 영업비밀을 지킬 권리는 무시당한 것이 아니라, 권리들의 충돌 상황에서 우선순위가 낮다는 판단을 받았다.

작업환경 보고서에 국가 핵심 기술이?

ⓒ시사IN 이명익2014년 3월5일 고 황유미씨의 7주기를 맞아 반올림 회원들이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앞으로 변수는 남아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산업부)는 4월16일 산업기술보호위원회 산하 반도체전문위원회를 열기로 했다. 이 전문위원회가 작업환경 보고서에 국가 핵심 기술이 포함되었는지를 판단한다. 전문위원회는 반도체 산업 전문가 위주로 진용이 짜인다. 산업환경 측정 전문가들은 알아챌 수 없는 정보 유출의 단서를 작업환경 보고서에서 잡아낼 가능성도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아무래도 산업보건 연구자들과는 자료에 접근하는 경로나 관점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작업환경 보고서에 국가 핵심 기술이 들어가 있다는 결론이 나오면 논란은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들 수 있다.

기업의 영업비밀은 중요하다. 건강을 좌우하는 정보에 접근할 노동자의 권리도 중요하다. 특히 삼성 반도체 공장처럼 산재 입증의 문제가 걸리면, 기업과 노동자 모두 양보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양자택일로 끌고 가서는 매듭이 풀리기 어렵다. 이런 문제의식 때문에, 산재의 입증책임 문제를 손봐서 교착상태의 실마리를 찾아보려는 움직임이 정부 내에 있다.

김영주 노동부 장관은 원래 관료 몫이던 산재예방보상정책국장 자리를 개방직으로 전환했다. 이 자리에는 산업의학 전문의이자 변호사로 양쪽 전문성을 갖춘 박영만 변호사를 임명했다. 산재 문제를 적극 풀어보겠다는 장관의 의중이 실린 인사다. 박 국장은 2011년 삼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산재 소송의 원고 쪽 변호인을 맡았다. 그는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쓰는 각종 화학물질의 유해성을 의학적으로 파고들어 삼성 백혈병이 산재가 맞다는 승소 판결을 이끌어낸 주인공이다(<시사IN> 제198호 ‘골리앗 쓰러뜨린 고난의 대장정’ 기사 참조).

현행 산재 인정은 근로복지공단을 통해 이루어진다. 노동자가 산재 신청을 하면 공단은 질병이 업무와 관련이 있는지 역학조사를 요청할 수 있다. 역학조사를 한 뒤 근로복지공단은 변호사·노무사·의사 등으로 구성된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심의를 거쳐 이를 승인하는 구조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형식적인 역학조사뿐 아니라 이번 사례에서 나타나듯 영업비밀 유출을 주장하는 기업의 비협조, 피해자인 노동자들의 정보 부족과 입증책임 등으로 직업병 판정률이 낮은 실정이다.

노동부는 유해물질에 노출된 산재의 입증책임을 피해 노동자가 아닌 근로복지공단에 두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 경우 근로복지공단이 기업 내부 자료를 검증하기 때문에 영업비밀 유출 논란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진다. 삼성 반도체 공장 사례와 같은 양자택일의 소모적 논란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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