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오랫동안 과학책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또 폭력과 섹스가 난무하는 ‘19금 성인용’이 아닌 지적이고 독특한 스타일의 성인 만화(혹은 그래픽노블) 역시 황무지였다. 한국에서 과학을 진지하게 다룬 성인용 만화가 나올 확률은 기적에 가까웠다.

한국은 투자도 하지 않으면서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곳이고, 또 놀랍게도 매번 기적이 일어난다. 〈어메이징 그래비티〉로 물리학자들이 중력을 파헤치는 과정을 만화로 재미있게 풀어냈던 조진호 작가는 〈게놈 익스프레스〉에서 유전자를 통해 또 한 번 기적을 일으켰다.
 

〈게놈 익스프레스〉 조진호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

〈게놈 익스프레스〉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유전’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유전의 실체를 찾아가는 과학 탐험기이다. 멘델의 완두콩 실험에서부터 왓슨과 크릭의 DNA 나선 구조 발견, 복제 양 돌리와 게놈 프로젝트까지 유전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수많은 과학자들의 여정이 담겨 있다. 이 여정에는 생물학자뿐 아니라,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 슈뢰딩거 같은 물리학자, 의학자, 화학자 등 여러 과학자들이 마치 DNA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

흔히 과학이나 수학을 다룬 학습 만화에는 ‘만화로 쉽게 알아보는’이라는 수식어가 달려 있다. 우리, 솔직해지자. 과학은 원래 어렵다. 어려운 내용을 만화로 설명한다고 쉬워지지 않는다. 〈게놈 익스프레스〉 역시 유전자의 구성과 단백질의 형태 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전문적 생물학 지식이 결코 만만치 않다.
 

좋은 책은 ‘해답’이 아닌 ‘질문’을 던진다

그럼에도 이 ‘과학책’은 재미있다. 이야기의 중심축이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치열하게 경쟁하는 과학자들의 연구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DNA 구조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 과정을, 오지를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가는 탐험가에 비유했다. 특히 DNA가 유전자의 핵심임을 간파하고 DNA 구조를 다른 사람보다 먼저 알아내기 위해 3개 과학자 그룹이 서로 경쟁하는 모습은 〈게놈 익스프레스〉의 하이라이트다. 유전자의 비밀을 풀면 유전의 원리가 모두 밝혀진다고 과학자들은 굳게 믿었다.

노력 끝에 마침내 DNA 구조가 해명되고, 유전의 비밀 지도 같았던 인간의 DNA 정보가 게놈 프로젝트로 모두 밝혀진다. 허무하게도 DNA는 유전 정보를 담은 하나의 요소일 뿐이라는 비밀이 폭로된다. 우리는 이제 유전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겨우 한 걸음 내디딘 것뿐이다. 긴 여정을 거쳐 ‘유전이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라는 최초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다니. 좋은 책은 언제나 ‘해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져준다. 과학 역시 그러한가 보다.

조진호 작가는 앞으로도 ‘익스프레스’ 시리즈를 통해 과학의 다양한 질문을 선보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적인 만화가 과학뿐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피어나 그림의 영토가 무한대로 확장하기를 기대해본다.

 

 

 

 

기자명 박성표 (〈월간 그래픽노블〉 전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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