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연말 미국 주간지 〈타임〉은 ‘부문별 10대 화제작(Top 10 Everything)’을 뽑는다. 영화·노래부터 팟캐스트·온라인 화젯거리까지 다양한 분야를 돌아보는 지면이다. 지난해 이 매체는 소형 기기(gadget) 부문에 ‘닌텐도 스위치’를 1위로 선정했다. 애플의 ‘아이폰 X’와 마이크로소프트 ‘서피스 노트북’ 등 유력 후보를 밀어냈다. 〈타임〉은 “‘언제나 어디서나’라는 접근법이 이 기계를 ‘대박(a true knockout)’으로 만들었다”라고 썼다.

닌텐도 스위치는 지난해 출시된 ‘하이브리드 게임기’다. 지금까지 나온 게임기는 크게 가정용과 휴대용으로 나뉘었다. 가정용은 텔레비전이나 모니터에 본체를 연결해야 작동된다. 휴대용은 크기가 작고 디스플레이가 달려 야외에서도 쓸 수 있다. 가정용은 성능이 우수한 대신 실내에서만 작동되고, 휴대용은 이동이 자유로우나 성능이 달렸다. 이 판에 도전장을 던진 기계가 닌텐도 스위치다. ‘스위치(switch·전환)’ 라는 이름처럼 이 기계는 실내외에서 모두 쓸 수 있다. 6.2인치 터치스크린을 가진 본체는 휴대용 게임기로 쓸 수 있는데, 거치대에 꽂으면 텔레비전과도 연결된다. 단순히 휴대용 게임기 화면을 텔레비전으로 출력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가정용 게임기를 휴대도 할 수 있다’는 게 더 적절한 설명이다. 말하자면 닌텐도 스위치는 고성능 게임을 실내외 가리지 않고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만든 최초의 기계다.

ⓒ시사IN 이명익‘닌텐도 스위치’가 전시된 서울 용산 전자상가의 닌텐도 매장 앞에서 행인이 게임을 고르고 있다.
함께 발매된 게임 타이틀이 닌텐도 스위치에 날개를 달았다. 〈슈퍼마리오 오디세이〉와 〈젤다의 전설: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이다. 마리오와 젤다 시리즈는 닌텐도가 각각 1985년·1986년에 처음 선보인 프랜차이즈 게임이다.
두 시리즈는 주인공을 성장시켜 악당과 싸우는 RPG(role playing game) 장르를 대표하는 게임이기도 하다. 닌텐도 스위치와 함께 나온 최신작들은 마리오가 900만 장, 젤다는 670만 장가량 팔렸다. 특히 젤다는 가장 많은 게임 매체들이 ‘2017 올해의 게임(Game of the year, GOTY)’으로 꼽았다. 가정용 게임기로는 출시된 적이 없는 〈포켓몬스터〉 시리즈 역시 닌텐도 스위치용으로 개발 중이다.

혁신 앞에 게이머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닌텐도 스위치의 판매고는 업계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한동안 품귀 현상까지 일어나 생산량을 두 배로 늘렸다. 지난해 3월 출시 이후 12월31일까지 총 1486만 대가 팔렸다. 닌텐도의 전작 ‘Wii U’가 4년 동안 판매한 1350만 대를 고작 9개월 만에 넘어선 수치다. 현재 게임기 시장 부동의 1위인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4’ 역시 출시 1년이 지나서야 1500만 대 고지를 밟을 수 있었다. 국내에서도 닌텐도 스위치는 이례적인 판매량을 올리고 있다. 12월 한 달 동안 11만 대가 팔렸다. 플레이스테이션 4가 한국 출시 6개월간 5만 대에 그쳤다는 점을 돌이켜보면 믿기 어려운 인기다.

사실 지난 7~8년간 닌텐도는 침체에 빠져 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닌텐도 DS를 두고 “우리도 만들 수 없는가?”라고 탐내던 2009년이, 이 회사가 맞은 정점이라고 상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그 뒤 닌텐도의 수익은 수직 하강했다. 2012년 50년 만에 처음 발표한 영업적자는 세 해 연속 이어졌다. 2016년 3월 발표된 수익은 10년 전 수준으로, 2009년의 3분의 1에도 못 미쳤다.

새 시대의 첫 제물 아닌 ‘독특한 무엇’

간단한 이유에서다. 닌텐도는 시대에 뒤처졌다. 가정용 기기는 PC에 밀렸고 휴대용 기기는 스마트폰에 치였다. 2000년대 중반 닌텐도가 맞은 중흥기는 상당 부분 휴대용 게임기인 닌텐도 DS의 공이었다. 그런데 2007년 아이폰이 등장한 이후 스마트폰 기술은 닌텐도 휴대용 게임기보다 훨씬 빠르게 발전했다. 심지어 2012년 발매한 닌텐도 가정용 게임기 Wii U는, 동시대 PC는 물론 스마트폰보다도 CPU(중앙처리장치) 성능이 떨어졌다. 결국 세계 게임 시장에서 게임기 업체들은 스마트폰· PC의 공세 앞에 사멸하리라는 관측도 나왔다. 업계 선구자였던 닌텐도는
새 시대의 첫 제물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구도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우선 PC가 너무 비싸졌다. 암호화폐 붐으로 채굴장이 부품을 대량 구입하면서 공급이 부족해졌다. 일부 그래픽카드 모델은 한 달 만에 두 배 가까이 값이 올라, 부품 하나가 닌텐도 스위치보다 비싼 지경에 이르렀다. 실제로 지난해 7월 미국 디지털 웹진 〈메이크유즈오브 (Makeuseof)〉는, 그래픽카드 값 폭등의 해결책 중 하나로 ‘게임기 구입’을 제시했다. 수치상으로는 PC보다 성능이 부족하더라도, 게임기는 게임에 최적화되어 있기에 플레이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게이머에게 암호화폐 열풍은 닌텐도 스위치를 이른바 ‘가성비’ 높은 선택으로 만들었다.

ⓒ닌텐도 제공4월에 출시될 예정인 닌텐도 라보는 가상에 현실을 투영하는 방식의 게임이다.
스마트폰 게임이 부딪힌 벽은 더 본질적이다. 조작 방식에 한계가 분명하다. 스마트폰은 대개 터치스크린으로 조작한다. 가정용 게임기가 많게는 20개 버튼까지 쓰는 반면 터치스크린은 화면을 가리기 때문에 복잡한 입력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최근 출시된 스마트폰 RPG 다수는 ‘자동 사냥’ 방식을 쓴다. 버튼 하나를 누르면 캐릭터 혼자서 움직이는데, 편리하지만 쉽게 질릴 수밖에 없다. 반면 닌텐도 스위치는 ‘조이콘’이라는 이름의 조작 도구로 세밀한 컨트롤을 극대화했다. 게이머 처지에서는 6.2인치 액정에 입력기기도 달려 있는 휴대용 게임기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가장 큰 비교우위는 닌텐도의 역사와 함께한 독점 콘텐츠다. 그간 닌텐도는 젤다·마리오·포켓몬스터 등 프랜차이즈 게임의 메인 시리즈를
한 번도 다른 기기에 내준 적이 없다. 〈포켓몬 고〉처럼 타사에 IP(지적재산권)를 빌려주거나, ‘외전’ 격 작품에 한해 다른 플랫폼으로 출시했을 뿐이다. ‘젤다를 하려면 닌텐도 게임기를 사라’는 폐쇄적 방침으로 지켜온 프랜차이즈 게임들이야말로 닌텐도 스위치가 건네받은 가장 큰 유산이다. 닌텐도 스위치의 열풍 역시 젤다와 마리오라는 ‘쌍끌이’ 덕이라는 시각도 보인다. 한 게임업계 관계자는 “초반에 ‘현찰’을 몰아 쓴 면도 있다. 닌텐도 스위치가 롱런하려면 이 기기만의 특장점이 나와야 한다”라고 평했다.

오는 4월 출시될 닌텐도 라보(Labo)는 닌텐도 스위치의 새 트레이드마크 후보로 꼽힌다. 라보는 닌텐도 스위치에 연동되는 장난감으로, 도면이 그려져 있는 골판지이다. 골판지로 조립한 피아노·낚싯대·오토바이 핸들 등은 닌텐도 스위치에 연결한다. 건반을 치면 소리가 나고, 낚싯대를 던지면 화면에 물고기가 보인다.
〈포켓몬 고〉와 같은 증강현실(AR) 게임이 현실에 가상을 접목하는 반면, 닌텐도 라보는 가상에 현실을
투영하는 것이다. 레지 피세메 미국 닌텐도 사장은 닌텐도 라보를 두고 “가상현실에 대한 경쟁적 대답이 아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독특한 무언가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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