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무부, 은행에 2차 구제금융 제공 임박. 2009년 1월3일자 타임스.”

비트코인의 개발자인 사토시 나카모토가 ‘제네시스 블록’에 숨겨놓은 암호이다. 사토시는 비트코인의 최초 개발자이지만 정체가 베일에 싸여 있다. 일본인인지 아닌지, 개인인지 집단인지 확인된 바 없다. 그는 최초의 50비트코인을 스스로 채굴했는데, 이것을 ‘최초의 블록’이라는 뜻의 제네시스 블록이라고 부른다. 이 암호는 영국의 일간지 〈타임스〉에 실린 기사 제목인데, 기사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은행에 대한 구제금융 제공을 보도하는 내용이다. 그는 도대체 비트코인에 왜 이것을 숨겨놓았을까?

그가 썼던 다른 글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기존 화폐의 근본 문제는 신뢰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중앙은행은 화폐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신뢰를 주어야 하는데, 법정화폐의 역사를 보면 바로 그 신뢰에 대한 배신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주장처럼 기존 화폐 시스템은 신뢰에 근거해 돌아가고 있을까? 적어도 1971년 이후에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금본위제를 포기한 해다. 이 ‘닉슨 쇼크’ 이후 기축통화인 달러는 아무런 실물 연계 없이 미국 정부에 대한 신뢰에 기대고 있다.

ⓒ연합뉴스암호화폐는 수많은 사람들의 ‘분산된 인증’을 통해 거래된다. 2월2일 서울 중구 가상통화 거래소 빗썸 전광판에 표시된 가상화폐 가격.
그는 ‘중앙집권화된 제3자(정부 혹은 중앙은행)’를 신뢰해야만 작동하는 기존 화폐 시스템에 상당한 회의를 품었던 것 같다. 실제로 그가 비트코인을 개발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중앙집권화된 제3자가 없이도 작동하는 화폐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숨겨놓은 암호를 법정화폐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많은 이들이 해석하는 이유다.

그가 비트코인의 작동원리를 설명한 논문은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뢰 대신에 암호학적 증거에 입각한 지불 시스템이다.”

법정화폐에 대한 선전포고인가

비트코인은 정부를 신뢰하지 않은 채 어떻게 화폐 시스템을 운용하겠다는 말인가? 그것이 바로 블록체인 기술이다. 기술 용어를 빼고 원리를 ‘인간의 언어’로 요약하면 이렇다.

거래가 이루어질 때마다 네트워크에 들어와 있는 모든 참여자들이 자신의 컴퓨터에 내용을 업데이트한다. 거래 기록은 수많은 컴퓨터에 나누어 보관된다(분산원장·distributed ledger). 모든 거래의 내용은 모든 참여자들에게 다 보여진다(투명성). 하지만 그 거래의 당사자가 누구인지는 철저하게 보호된다(프라이버시). 거래가 반복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증한(작업증명·proof of work) 여러 개의 블록들이 체인으로 연결된다(블록체인). 가짜 거래를 시도하려는 사람이 있다 해도, 정보를 분산해 저장한 다른 모든 사람들의 탈집중화된 기록(블록체인)을 모두 조작할 수 없으므로 진실이 보호된다. 결국 분산과 탈집중화가 진실을 보장하는 셈이다.

ⓒ연합뉴스1월15일 정기준 국무조정실 경제조정실장이 가상통화에 대한 정부 입장을 발표했다.
이제 암호화폐와 그 기반 기술인 블록체인의 핵심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한다. ‘중앙집권화된 제3자’를 필요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중앙집권화된 제3자는 자신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수많은 타인들을 ‘매개(intermediary)’함으로써 돈을 벌고 힘을 가진다. 블록체인의 첫 번째 적용 영역이 왜 하필 화폐였는지도 짐작이 간다. 금융이야말로 ‘매개’를 통해 먹고사는 대표적 영역이다(financial intermediary).

우리가 신용카드 거래를 할 때마다 그 거래는 금융기관으로 보내진다. 판매자는 우리가 일정 수준 이상의 신용을 가진 사람이라는 금융기관의 확인을 받은 다음에야 우리에게 물건을 건네준다. 금융기관은 이 사실을 확인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수수료를 받아 챙긴다. 판매자와 구매자는 서로의 금융정보라는 측면에서 아무것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 금융기관만이 모든 판매자 및 구매자와 직접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행위자다. 거래를 하려면 억울해도 수수료를 떼어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암호화폐가 널리 쓰이게 되어 중앙집권화한 제3자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의 ‘분산된 인증’을 통해 거래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해보자. 금융기관은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다. 세계 최초의 비트코인 강의를 개설한 미국 뉴욕 대학 경영대학원의 데이비드 여맥 교수는 1월21일자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앞으로 결제는 은행이 아니라 정보처리 기업이 하게 될 것이다. 10년 뒤 은행이 존재할지도 불분명하다”라고 말했다.

ⓒ노원구청 제공서울시 노원구의 한 카페에서 블록체인에 기반을 둔 지역화폐 ‘노원(NW)’으로 결제하는 모습.
금융기관만 문제가 아니다. 한국은행이나 금융통화위원회는 무척 한가해질 것이고, 기획재정부나 국세청도 지금의 몇 분의 1 인력이면 충분할 것이다. 국가에서 금융통화 정책의 상당 부분이 사라지게 된다. 2011년 〈뉴요커〉에 실린 흥미로운 기사에서 조슈아 데이비스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사토시 나카모토가 세상을 운용한다면 그는 벤 버냉키(당시 연방준비제도 의장)를 해고하고 유럽중앙은행과 웨스턴유니언을 폐쇄했을 것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중앙집권화한 제3자’가 금융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통계학을 뜻하는 단어 ‘statistics’는 ‘국가(state)’와 연결된 어원을 가진다. 인구통계를 정확히 파악해야 세금을 걷고 군대를 소집하고 재정계획을 짜는 등 기본적인 통치행위를 할 수 있다.

그러니 국가는 국민에 대한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중앙집권화한 제3자’이고,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이다. 블록체인 기술이 주민등록·운전면허·학력·보험 등과 같은 데이터에 적용된다면 어떻게 될까? 행정안전부가 유명무실해질 것이다. 선거에 적용된다면? 선거관리위원회가 필요 없게 된다. 그 밖에도 상상할 수 있는 적용 영역이 무수히 많다. 국가가 거대한 독점 데이터베이스인 이상, 원론적으로 국가의 거의 모든 행위는 블록체인을 통해 분산될 수 있다. 아직은 과격한 상상이지만, 블록체인 기술은 분명히 이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블록체인 기술을 통해 지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세련된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열릴 수도 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블록체인 혁명〉의 저자 중 한 사람인 알렉스 탭스콧은 2016년 경제 잡지 〈포브스〉에 기고한 ‘블록체인 민주주의: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블록체인 덕분에 시민들은 정부의 행위를 변경 불가능한 원장(元帳·ledger)에 기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힘 있는 소수 사이의 견제와 균형을 넘어, 다수의 합의에 근거한 정책을 펼칠 수 있게 된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팰로앨토에 있는 비영리단체 지구민주주의(Democracy Earth)는 ‘소버린(Sovereign·주권)’이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소버린은 투표권을 직접 행사할 수도 있고, 대리인에게 위임할 수도 있고, 혹은 되찾아올 수도 있는 ‘액체 민주주의(liquid democracy)’와 블록체인을 결합한 아이디어다. 소버린은 코인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표(votes)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사용자들은 전자지갑에 100표를 받게 되는데, 본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안에 수십 표를 몰아서 사용할 수도 있고, 혹은 이 사안을 나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대리인에게 표를 양도할 수도 있다. 투표율은 높아지고 ‘묻지마 투표’는 줄어들며, 투표의 결과는 주권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더 세세하게 알려준다. 지구 민주주의의 모토는 ‘자기주권(self-sovereign)’이다.

남의 나라에만 있는 일도 아니다. 며칠 전 서울시 노원구는 블록체인에 기반을 둔 지역화폐 ‘노원(NW)’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만약 성공한다면 중앙정부 교부금에 목을 매지 않고도 지역민이 원하는 정책을 펼칠 수 있을지 모른다.

국가 기능 분산될 신세계의 가능성

많은 국가들이 어떤 식으로든 암호화폐를 규제하고 있다. 암호화폐가 블록체인을 작동하게 하는 인센티브로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펼쳐진 투기적 상황이 블록체인의 본질은 아니다. 최근 벌어진 비트코인 논쟁에서도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블록체인 진흥론자들조차 일정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데에 동의했다.

하지만 반대로 비트코인에 대한 평가를 각국의 재무장관이나 중앙은행 총재, 혹은 투자회사 대표에게만 물어보는 것 역시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중앙집권화한 제3자’의 특권인 ‘매개’를 통해 돈이나 권력을 얻어온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암호화폐에 비판적일 만한 인센티브가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가상통화 규제 반대 청원 제목은 ‘정부는 국민들에게 단 한 번이라도 행복한 꿈을 꾸게 해본 적 있습니까?’이다. 가상통화는 어떠한 실물에도 연계되어 있지 않다. 블록체인의 미래에 대한 장밋빛 기대에 연계되어 있을 뿐이다.

국민의 행복한 꿈도 투기적 시장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그 꿈이 쪽박이 아니라 행복한 꿈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한 가상통화 규제 여부가 아니라 블록체인의 미래를 탄탄히 준비하는 내용의 답변이 되어야 한다. 중앙집권화한 제3자가 사라지고 국가의 기능마저 분산되는 놀라운 신세계를 어떻게 주도할지 답을 내놓고 실천해가는 것이야말로 가상통화 투자자의 꿈을 행복한 꿈으로 바꿔주는 방법이다.

기자명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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