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곡성 서봉마을 ‘길작은도서관’ 김선자 관장은 도서관 정리를 도와주던 할머니들이 책을 거꾸로 꽂는 것을 보았다. 할머니들은 글을 몰랐다. 김 관장은 할머니들을 불러 모아 글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글을 쓰게 해 시집 〈시집살이, 詩집살이〉를 2년여 전에 펴냈다. 이번에는 눈을 주제로 시를 쓰고 그림까지 그리게 해 그림책을 출간했다.
충남 부여 송정 그림책마을에서 주민들이 자기 이야기를 실은 〈내 인생의 그림책〉을 만들고, 강원도 원주 그림책도시에서 시민들의 이야기를 그림책에 담아내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게 대표적이다. 지역 시민활동으로 시작된 이 작업은 문화산업 아이템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눈이 사뿐사뿐 오네〉가 이룬 성취, 그 책에 보내는 독자의 반응을 보니 더욱 그랬다.
“나 같아” “우리 엄마 같아”
평균연령 70대 후반인 할머니 작가의 시는 특별한 언어적 기교를 구사하지 않았다. 시적 장치가 따로 있지도 않다. 그 시에는 놀라울 정도의 농밀함이 깃들어 있었다. 할머니들은 즐거웠던 유년기, 혼란스러웠던 결혼 생활, 어려웠던 시집살이, 가난의 서러움, 먼저 간 남편에 대한 야속하고 그리운 마음을 너덧 줄에서 열 줄 남짓 시구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압축해 담았다. 밀도 높은 할머니들의 삶과 마음이 지극히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 숨 쉬듯 편안하게 스며 있었다.
강연 중 이 책을 읽을 때 다른 그림책에서는 나오지 않던 반응이 쏟아졌다. “나 같아” “우리 엄마 같아” “우리 이모 같아” “우리 할머니 같아”. 이런 짙은 공감은 편안하고 일상적인 수다에서는 나오기 어렵다. 뭔지 모르지만 ‘시’를 써야 한다는 목표로 집중하고, ‘눈’이 주제어가 되어야 한다는 한계 안에서 선택하고 버리고 다듬으면서 연마된 언어에서만 나올 수 있다.
‘눈이 하얗게 옵니다/ 시를 쓸라고 하니/ 아무 생각도 안 나는/ 내 머릿속같이 하얗게 옵니다.’ 이 첫 페이지에서 손뼉을 딱 치고 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독자가 있을까. 천진하고 자유로운, 아이들 그림 같은 할머니들의 그림 앞에 미소 짓지 않을 독자가 있을까. 그렇게 읽는 이를 끌어들이는 일곱 할머니의 일곱 생이, 나와 내 엄마와 내 할머니의 생과 하나가 된다. 내 생을 되돌아보며 나누고 싶다면, 그림책 작가가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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