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정부의 비트코인 규제 움직임에 투자자들이 반발하는 가운데 선진국들의 ‘중앙은행 발행 디지털 통화(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연구가 역설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잘나가는 선진국에서는 중앙은행까지 가상통화 발행을 모색 중인데 한국 정부는 규제나 하고 있다’라는 비아냥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복지국가 스웨덴이 조만간 국가 주도로 가상통화(디지털 법정화폐)를 발행할 것이라는 기사들이 연이어 나왔다. 초국적 금융기관인 HSBC의 애널리스트 제임스 포메로이가 최근에 낸 보고서(〈Sweden’s Big Year:Can the Economy Overcome Some Challenges?〉)를 인용한 보도다. 포메로이는 이 보고서에서 “스웨덴은 국가 자체의 암호 화폐(Cryptocurrency)를 발행하는 첫 국가가 될 것이다. 올해는 아니지만 몇 년 내로 실현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스웨덴 중앙은행이 디지털 법정화폐인 ‘e크로나’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한 것은 2017년 초다. 그해 3월 발표한 ‘프로젝트 계획’에 따르면, e크로나 시스템의 가능성(2017년), 규제 및 운영 방안(2018년) 등에 대한 연구를 거쳐 2018년 말에 발행 여부를 잠정 결정한다. 2019년에는 e크로나를 실험적 환경에서 유통시키며 제도화할지 판단하게 된다.

ⓒBertil Ericson“우리는 현금을 받지 않습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은 스웨덴의 한 카페 계산대.
스웨덴 중앙은행이 e크로나를 검토하게 된 것은 ‘미래 혁신 기술을 빨리 채택해 다른 나라보다 앞서가자’는 식의 적극적 이유에서가 아니다. 오히려 매우 방어적인 대응이다. 스웨덴에서 중앙은행권 지폐와 동전 등 ‘실물 현금’ 사용이 급격히 줄고 있어서다. 수도 스톡홀름의 경우, 대다수 소매점에 “우리는 현금을 받지 않습니다(Vi hanterar ej kontanter)”라는 안내문이 걸려 있다. 교회 헌금도 카드로 결제한다. 홈리스나 거리의 음악가들마저 모바일 카드 리더기를 갖고 다닌다. 지난해 9월 스웨덴 중앙은행이 발표한 〈e크로나 프로젝트-첫 중간보고서〉에 따르면, 소매점에서 실물 현금으로 결제하는 비율이 2010년 40%에서 2016년에는 15%로 하락했다. 여론조사에서는 소비자 가운데 3분의 2가 “현금 없이 살 수 있다”라고 답변한다. 스웨덴 중앙은행은 중간보고서에서 “스웨덴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실물 현금으로 지급할 수 없는 사회가 될 것이다”라며 대책을 모색한다. 실물 현금이 유통되지 않으면 ‘사회가 취약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물 현금 외에도 지급수단은 많고 다양하다. 은행 계좌를 통한 송금이나 신용카드 등이 가장 흔한 사례다. 특히 스웨덴의 경우, 시중은행들이 공동 개발한 모바일 결제 앱인 스위시(Swish)가 지급수단 시장에서 압도적 지위를 점유하고 있다. 전체 인구 950만여 명 가운데 절반 이상인 500만명 정도가 스위시로 상품과 서비스를 구입한다.

문제는, 실물 현금 이외 지급수단들이 사회 전체로 보면 극소수에 불과한 대자본(민간 금융기관 등)에 장악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자본들이 지급수단 독점을 악용해 초과수익을 올리려 할 수 있다. 예컨대 모든 소매 거래에서 실물 현금이 퇴출되고 스위시만 사용된다면, 민간 대자본이 수수료를 크게 올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혹은 거미줄처럼 얽힌 스위시의 결제 네트워크 어딘가에서 사고가 터져 일순간에 전국적으로 모든 거래가 마비될 위험성도 존재한다. 스웨덴 중앙은행이 앞으로 도래할 ‘무현금 사회(cashless society)’의 대안으로 e크로나를 검토하게 된 이유다.

‘실물 현금’의 대체가 아니라 보완이 목적

e크로나의 목표는 비트코인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비트코인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거래를 중앙에서 중개하는 ‘제3자(국가와 은행)’를 제거하려 한다. 이른바 탈중심화된 지급수단이다. 반대로 e크로나는 실물 현금(중앙은행권)이 사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국가(중앙은행)의 역할을 보존하기 위한 장치로 검토 중이다. 어디까지나 ‘중앙은행이 발행한 화폐(central bank money)’다. 스웨덴 중앙은행은 설령 e크로나를 발행하게 된다 해도 그것이 실물 현금을 대체하는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 e크로나는 실물 현금에 대한 ‘보완물’로 간주될 뿐이다.

스웨덴 중앙은행의 보고서에 따르면, e크로나의 유형은 대충 두 가지로 구상된다. 하나는 ‘가치 기반 e크로나(value based e-krona)’다. 카드나 스마트폰 앱에 일정한 금액을 저장하는 방법이다. 카드나 스마트폰을 잃어버리면 그 속에 담긴 금액도 날아간다. 한국에서 널리 사용되는 교통카드와 비슷하다. 다만 이 시스템의 개발·운영·보안 책임자는 민간은행이나 신용카드사가 아니라 중앙은행이다. 가치 기반 e크로나는 익명으로 설계될 수도 있고 실명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익명으로 설계된다면, 실물 현금과 똑같다. 스웨덴 중앙은행은 주로 소액 거래에 가치 기반 e크로나가 적합할 것으로 내다본다.

다른 하나는, ‘등록 기반 e크로나(register based e-krona)’다. 현재의 금융 시스템에서는, 민간(개인과 기업)이 시중은행에만 계정을 가질 수 있다. 중앙은행에 계정을 보유할 수 있는 것은 시중은행뿐이다. 이에 비해 등록 기반 e크로나에서는, 개인이나 기업이 일반은행뿐 아니라 중앙은행에도 직접 계정을 가지게 된다. 시중은행의 지급결제 시스템과 독립적으로, 중앙은행 계정을 통해 서로 e크로나를 주고받을 수도 있다(지금은 시중은행 계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종류의 e크로나 역시 모바일 기기에 저장할 수 있다. 다만 그 액수가 중앙은행 계정에 등록되어 있으므로, 모바일 기기를 잃어버려도 상관없다. 등록 기반 e크로나는 은행 사이의 대규모 자금 거래 등에 주로 활용되리라고 스웨덴 중앙은행은 내다본다.

등록 기반 e크로나는 블록체인 기술의 특성(일단 지급이 이뤄지면 기록 변조가 불가능)을 활용할 수 있다. 유럽연합 국가들의 정치·경제 현황을 보도하는 매체 〈더로컬(The Local)〉에 따르면, e크로나의 발행 가능성을 보고 미국의 비트코인 채굴 기업인 ‘The Future of Mining(채굴의 미래)’ 등이 스웨덴으로 진출하기까지 했다. 다만 등록 기반 e크로나는 비트코인과 달리 익명성을 보장하지 않고 소유자에 대한 신원 추적이 가능하며 가치 변동도 크지 않도록 관리될 전망이다. ‘제3자가 주도하는 실명 블록체인’인 셈이다. 이는 ‘뜨거운 얼음’ 같은 형용모순인데, 전자적 형태를 띠지만 법정화폐인 만큼 당연한 일이다.

스웨덴 중앙은행은 e크로나 구상을 실현할 경우, ‘가치 기반(소액 거래)’과 ‘등록 기반(대규모 자금 거래)’을 적절하게 혼합하는 형태로 구현할 계획이다. 다만 블록체인 기술 자체가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활용될지는 단언하기 힘들다. 등록 기반 e크로나 역시 여러 노하우가 있는 데다, 스웨덴 중앙은행의 보고서 역시 다음과 같이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e크로나는 공공 차원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될 수 있겠지만, 반드시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암호 화폐여야 한다는 법은 없다. 이는 어떤 기술을 사용하느냐에 달린 문제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