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서울시교육청이 주관하는 성평등 교육정책 비공개 토론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한 초등학교 교사로부터 촉발된 ‘페미니즘 교육’ 논란이 격렬하게 이어지던 때였다. 첫 번째 토론회는 중·고교생을 아홉 개 그룹으로 나눠 ‘차별, 혐오, 성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로 꾸려졌다. 토론을 진행한 퍼실리테이터(조력자)는 학생들에게 ‘성(性)’ 하면 떠오르는 걸 포스트잇에 적어 붙여보자고 제안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벽에 붙은 포스트잇을 살펴봤다. 남녀 그룹이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 여학생 그룹에서는 ‘성폭력’ ‘성범죄’ ‘성희롱’ ‘임금 격차’가, 남학생 그룹에서는 ‘남혐’ ‘역차별’ ‘야동(사이트)’ ‘몰카’ 같은 단어가 적혀 있었다. 두 그룹의 격차 앞에서 잠시 아연했다. 한 남자 중학생은 토론회 말미 “여자의 대한민국과 남자의 대한민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대한민국이 있을 뿐이다”라고 굉장히 고심해서 적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나는 현장에서 ‘두 개의 나라’를 목격했다. 교육의 개입을 긴급하고 절실히 느끼면서 말이다.
주로 시국 사건 변호를 맡으며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고 이돈명 변호사의 기일에 맞춰 천주교인권위원회는 매년 ‘이돈명 인권상’을 시상한다. 올해 수상자는 초등성평등연구회였다. 초등성평등연구회는 교과과정이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는 성평등과 여성주의 교안을 개발하고 실제 수업에 활용하고 있는 현직 초등교사 모임이다. 1월10일 시상식이 열렸지만 기념사진은 ‘신변 안전’을 이유로 공개되지 않았다. 이미 우리는 목격했다.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낸 교사들은 신상이 털리고, 비난의 대상이 되고, 모욕당하는 자리에 서 있다. 나 역시 〈시사IN〉 제520호 ‘2017 학교 보고서, 페미니즘을 부탁해’ 기사를 쓰면서 만난 교사들의 이름을 단 한 명도 실명으로 쓸 수 없었다.
성평등 교육의 필요성이 사실상 처음으로 교육계 안에서 논의되고 있다. 언제까지 교실을 이대로 방치할 건가. 나는 이 전환점의 주도권이 페미니스트 교사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얼굴을 내걸고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우리는 제대로 된 ‘시민’을 길러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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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날 수 없다. 그래도 새를 동경하다 비행기를 만들었다. 극복과 진보. 그것을 우리는 ‘역사’라 부른다. 수천 년이 흘렀지만 답보하는 역사도 있다. 남자는 여자의 삶을 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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