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하나. 2016년 6월21일 세종시 국토교통부 브리핑실. 파리공항공단엔지니어링(ADPi)의 장마리 슈발리에 수석 엔지니어가 섰다. 그는 영남권 신공항의 타당성을 검토한 결과, 부산이 지지하는 가덕도 안과 대구가 지지하는 밀양 안이 모두 타당성이 없다며 신공항 백지화를 발표했다. 부산과 대구는 큰 상처를 받았지만 수도권 여론은 시큰둥했다. 수도권 여론은 선심성 지역공약에 가깝게 신공항을 바라봤다. 비용편익 분석 결과를 놓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장면 둘. 2017년 11월29일 국회 귀빈식당.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김동철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광주와 목포를 잇는 호남선 KTX 노선을 수정해 무안국제공항을 경유하도록 했다고 발표했다. 무안공항은 “탑승 실적이 무안해서 무안공항” “볕 잘 드는 활주로에 고추라도 말리자”따위 조롱을 받으며, 토건 예산 실패의 아이콘으로 낙인찍혀 있다. 거기에 노선 변경 비용 1조원을 더 붓겠다는 합의에 수도권 여론은 싸늘했다.

둘은 서로 전혀 무관한 장면이다. 하지만 백지화와 추진으로 결과만 달리 나왔을 뿐, 맥락을 따져보면 사실상 하나의 사건이나 다름없다. 두 장면이 왜 같은 사건인지, 두 장면이 한국 사회의 거대한 계약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는지를 짚어보면, 지방 재생이라는 화두가 얼마나 복잡하고 구조적으로 얽힌 과제인지 보인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무도 서명한 적 없이 반세기를 이어온 어떤 계약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경제사나 지리경제학 연구자들은 이 계약을 ‘불균등 발전’이라고 부른다. 정치경제지리학 연구자인 박배균 서울대 교수(지리교육과)가 공저 〈국가와 지역〉에서, ‘공간’이라는 렌즈를 사용해 제시하는 일련의 분석 틀이 유용하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소수 거점 지역에 핵심 산업을 집중하는 ‘몰빵 전략’을 택한다. 수도권과 동남권(부산·경남 일대)은 산업화의 양대 거점이 된다. 경부 축(서울-부산 축)에 산업을 몰아주는 불균등 발전 전략은 한국의 산업화를 견인했다.

그러나 이 시기 개발국가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선진 복지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던 1960~1970년대 개발국가는 선택과 집중으로 만들어낸 부를 골고루 나눌 합리적 시스템이 없었다. 선택에서 소외된 지역들의 불만이 갈수록 커졌다. 역설적으로, 쿠데타 정부는 민주 정부보다도 이런 불만에 오히려 더 취약하고 민감하다. 정치적 정통성이 부족한 쿠데타 정부는 성과에 대한 작은 불만에도 정당성이 흔들릴 수 있어서다.  

1960년대 후반 경부고속도로 건설 논쟁은 당대의 구도를 압축해 보여준다. 이 사례는 물동량 폭발을 내다본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과, ‘반대를 위한 반대’에 그친 김대중 신민당 의원의 근시안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보수층이 즐겨 인용한다. 실상은 그보다는 복잡하다. 1960년대 맥락에서 경부고속도로 계획은 지역 차별의 상징이었다. 호남선 복선화 계획은 이런저런 이유로 무한정 지체하면서, 복선 철도가 있는 경부 축에 다시 고속도로를 깔겠다는 계획을 정부가 내놓자 호남 소외론은 폭발했다. 1968년 2월, 김대중 의원은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제시대에 일본이 대륙에 진출하기 위해서 남북 종단 교통 체제가 되어 있다. 그래도 가장 발달된 그 노선에 다시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니, 급한 것은 뒤로 미루고 안 급한 것은 먼저 하고 있다.” 자원 배분의 중복과 특정 지역 집중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이 관점은 당대 여론에서 거세지고 있었다.

ⓒ연합뉴스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운데)가 테이프를 끊고 있다.

불균등 발전 전략은 박정희 정권에 정치적 부담을 안겼다. 정권은 두 갈래로 대처해나갔다. 우선 지역주의 동원 전략으로 불만에 찬 호남을 고립시켰다. 지역주의 투표 성향은 1967년 대선부터 눈에 띄었고 1971년 대선이 되면 완연해졌다. 그와 동시에 지역균형 정책을 도입했다. 1971년 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에 지역균형 정신이 반영되었고, 1972년 유신헌법에는 지역균형이 헌법적 가치로 격상된다. 반대편에서는 야당과 재야 세력이 소외된 호남을 정치적 주체로 불러냈다. 

정권의 달래기식 지역균형 정책과 야권의 소외된 지역 동원 전략이 결합하면서, 소외 지역에 국가 예산이 전략적으로 배정되기 시작했다. 핵심은 토건 예산이었다. 특히 지역의 유력자들이 토건 예산을 선호했다. 사람에 대한 투자는 사람이 움직이는 순간 다른 지역으로 사라지지만 토건은 지역에 고인다. 지역 유력자들에 더해 지방 관료, 정치인, 지역 언론인이 토건 동맹을 구축한다.

이제 선택된 지역과 나머지 지역의 계약이 완성된다. 정부의 ‘몰빵 전략’을 용인하는 대가로, 소외된 지역은 토건 예산을 받을 암묵적 권리를 얻었다. 지역마다 토건 동맹이 구축되고, 중앙으로 보낸 정치인을 움직여 자원 쟁탈전을 벌인다. 지역구 의원은 토건 예산 확보 능력으로 재선 여부가 갈리게 된다. 2010년대가 되어서도 지역 언론의 핵심 관심사는 SOC(사회간접자본. 사실상 토건의 대체어다) 예산을 얼마나 확보했느냐에 쏠린다. 토건 예산을 관장하는 국토교통위원회(국토위)는 각 정당이 권역별로 대표 의원을 선정해 보내는 독특한 관례를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국토위로 간 의원은 자기 권역의 토건 예산을 확보해 각 지역구에 배분한다.

공간을 경계로 맺어진 이 ‘20세기형 공간 계약’은 덜컹거리면서도 꽤 오랫동안 작동했다. 하지만 결국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수도권은 집중과 토건을 교환하는 이 거래에 더 이상 동의하지 않는다. 고도성장은 이미 멈췄다. 지방으로의 자원 배분에 갈수록 인색해진다. 지금은 중앙정부가 불균등 발전 전략을 주도하기는커녕 오히려 강력한 수도권 억제 전략을 펼친다.  

KTX 호남선이 무안공항을 경유하기로 한 결정 이후 수도권 여론이 계속 나빠지자, 호남 지역지인 〈전남일보〉는 지난 12월8일자 사설에서 “그 돈(추가 건설비 1조원)은 호남 차별 시정 비용으로 봐야 한다”라고 항변했다. 20세기형 공간 계약을 정확히 보여주는 문장이다. 하지만 수도권 여론은 더 이상 소외된 지역에 빚을 졌다고 느끼지 않고, 떠나온 고향의 부흥에도 예전만큼 열렬한 관심은 보이지 않는다.

비용편익 분석이 20세기 공간 계약을 대체했다. 그리고 비용편익 분석이 지방 토건사업의 손을 들어주는 사례는 웬만해서는 없다. 이미 사람과 돈이 유출될 대로 유출된 지방에서 편익이 비용을 초과하는 사업을 찾기는 어렵다. 김해공항이 과포화를 코앞에 뒀는데도 영남권 신공항 프로젝트는 비용편익 허들을 넘지 못했다.

수도권으로 집중 혹은 토건으로 보상

더 나아가 ‘집중과 토건의 거래’는 내재적인 모순도 안고 있었다. 이 거래는 지방이 중앙 자원 쟁탈전에 모든 역량을 쏟아붓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지방은 자생력과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토건동맹은 중앙의 자원에 접근하는 능력이 핵심이다. 지방 정치인은 중앙정부와 교섭해 예산을 따오는 ‘로비스트’가 되었다. 중앙정부 고위 관료들의 출신 지역 정보는 늘 중요한 뉴스로 다뤄졌다. 자원 쟁탈전에서 그 지역의 능력을 예측하게 하는 지표였기 때문이다. 정치도 관료조직도 언론도 자생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는 거의 발전하지 못했다.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졌다.

이렇게 해서 20세기 공간 계약은 낭떠러지로 내몰렸다. 출구가 있을까. 보수의 대안은 간단명료하다. 효율과 형평이 부딪치고 있다면, 효율이 우선이다. 효율 없는 형평은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효율적인 수도권에 자원을 집중해 더 높은 생산성을 뽑아낸다. 거기서 발생한 수익으로 지방을 지원하면 된다. 보수적인 학자들과 언론이 줄기차게 제기하는 수도권 규제완화론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알기 쉬운 공간 계약 파기론이다.

지적 족보도 있다. 지리경제학·노동경제학·도시경제학 등 관련 학문에서 ‘집적의 힘’은 인기 있는 주제다. 더 혁신적이고 지적으로 활발한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일수록 혁신이 발생할 가능성은 비약적으로 올라간다. 하버드 대학의 에드워드 글레이저,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의 엔리코 모레티 등 손꼽히는 젊은 경제학자들이 집적의 힘을 입증하는 연구 결과를 쏟아내고 있다. 한데 뭉칠수록 기업은 노동자를, 노동자는 기업을 찾기가 쉬워진다. 뭉칠수록 지식이 빠르게 전파된다. 이 모든 조건이 혁신에 기여한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 수도권 규제완화론의 힘이 빠졌다. 논쟁 구도가 ‘효율이냐 형평이냐’에서 ‘지방 생존이냐 소멸이냐’ 구도로 넘어가 버리면서다. 한국의 지방 문제는 효율과 형평의 저울질과는 차원이 다른 단계로 이미 진입했다(〈시사IN〉 제538호 ‘지방 소멸’ 커버스토리 참조).

아무리 확고한 효율론자라도 지방 소멸을 국가의 미래로 설정하기는 곤란하다. 일단 위헌이다. 헌법 제120조 2항은 “국토와 자원은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국가는 그 균형 있는 개발과 이용을 위하여 필요한 계획을 수립한다”라고 균형발전을 국가의 의무로 규정해두었다.

대도시권의 활력과 경쟁력을 유지시켜주는 기반이 지방인데, 그 지방이 소멸하면 대도시까지 연쇄 붕괴할 가능성이 높다. 2014년 지방 소멸 담론을 유행시킨 마스다 히로야의 〈지방 소멸〉은 단순 명쾌한 논리를 제시한다. 대도시권은 집값이 비싸고 생활비가 높아 젊은이들이 자리를 잡다 보면 출산 적령기를 지나치기 쉽다. 도쿄의 출산율은 일본 최저다. 대도시는 자체 인구 재생산보다 지방으로부터의 인구 유입에 의존하는데, 지방 소멸은 이 재생산 고리가 끊어진다는 의미다. 2016년 서울의 합계출산율은 0.94명이다. 합계출산율이 1명보다 낮은 광역단체는 서울밖에 없었다.   

대도시는 지방의 인구뿐만 아니라 소득도 빨아들이고 있다. 김재훈 강원대 사회학과 교수는 논문 ‘2000년대 지역 간 성장 격차’에서 2010~2014년 5년간 역외소득 유출입 현황을 보여준다. 위 〈표〉를 보면, 서울은 한 해 평균 52조4250억원을 다른 지자체에서 빨아들였다. 5년간 총액으로 262조원에 달한다. 경기도의 역외소득 유입도 연평균 27조4850억원에 달한다. 한 해에 80조원이 서울경기로 흘러 들어가는 셈이다. 

사람과 돈은 대도시, 특히 서울이 빨아들인다. 서울의 하위권 대학이 지방 거점 국립대보다 입학 커트라인이 높은 상황은 한 세대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뉴스도 아니다. 100대 기업 본사 중 84곳이 서울·경기에 있어서(2014년 기준) 지방에서의 영업이익을 흡수한다. 반면 폐기물과 혐오시설은 지방이 감당한다. 집중의 혜택을 받는 지역은 사람과 돈을 공급해줄 광대한 배후지를 필요로 한다. 지방이 소멸한다는 것은 그 배후지가 사라진다는 의미다.

이렇게 해서 20세기형 공간 계약과 알기 쉬운 계약 파기 전략이 둘 다 기각된다. 그러면 남은 길은 하나다. 집중의 혜택을 소외된 지방에 되돌려 주되, ‘집중과 토건의 교환’과는 다른 21세기형 공간 계약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재계약이냐다. 20세기형 공간 계약과 알기 쉬운 계약 파기 전략은 둘 다 지방의 자생력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공간의 재계약은 지방이 자생력을 갖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있다. 중앙 자원 쟁탈전으로 지방을 유인하는 방식은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 그런 방식을 수도권 여론은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지역 이기주의가 창궐할 위험도 있다.

그렇다면 지역 방방곡곡에 그야말로 ‘골고루 나눠주는’ 방식은 성립하기 어렵다. 일자리든 혁신이든 일정 수준의 규모와 집중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결과가 지지하고 있다. 200곳이 넘는 기초지자체의 ‘균등 발전’은 달성할 수 없다. 오히려 지방에서 규모와 밀도를 가진 거점을 만들어내야 공간의 재계약이 성립할 수 있다.

그다음부터는 정답이 나와 있다고 보기 어렵고, 상상력과 도전적 기획의 영역이다. 정치권과 학계에서 흥미로운 재계약안들이 등장하고 있다. 앞서 있는 곳은 충청권이다. 2017년 대선 민주당 경선 레이스에서 안희정 캠프는 ‘권역지방정부’ 공약을 만지작거렸다. 17개 광역단체로 쪼개진 지방정부들을 5~7개 정도의 권역정부로 묶는 구상이다. 이 공약은 경선 국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으로 일단 보류했다.

권역정부 아이디어의 뿌리는 노무현 정부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무현 정부는 행정구역보다 상위의 경제단위를 설정하고 권역별로 특화 산업이 작동하는 구도를 구상했다. 이 구상은 이명박 정부에서 5+2(수도권·충청권·호남권·대구경북권·동남권+강원·제주) 광역경제권 전략으로 발전된다. 2010년 지방선거로 충청남도에 안희정 지사가 취임한 이후, 충남도는 이 아이디어를 이어받아 권역정부 구상을 꾸준히 다듬었다. 2011년에는 권역지방정부의 장점과 이행전략을 다룬 연구 〈지방정부 주도의 분권정책 실행 방안〉을 내놓았다.

안희정 지사 1기에 충남부지사로 재직하며 논의 과정을 잘 아는 김종민 의원(더불어민주당)은 권역정부 구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전·충남·충북이 한데 묶이면 얼추 550만 인구가 나온다. 500만명이면 덴마크나 핀란드와 같은 강소국 규모다. 구직자에게는 기회의 규모, 기업에게는 시장의 규모가 지금과 차원이 달라진다.” 그러면 권역정부는 자기 책임하에 권역에 맞는 혁신을 실험해볼 수 있고, 중앙정부는 업무 부담이 크게 가벼워지면서 외교·국방·복지 등 중앙정부 본연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위험도 덜어진다. 

다음 단계로 권역정부 아래에 생활경제권 단위로 광역권을 설정한다. 충청의 경우 5개 정도가 합리적이라고 김 의원은 본다. “내 지역구인 논산·계룡·금산 중에는 생활권이 대전과 묶이는 곳이 많다. 그런데 대전광역시와 행정구역이 달라 협업이 안 된다. 대전은 기업 요구로 산업단지를 닦고 싶어도 땅이 없는데 바로 옆에 붙은 계룡시는 땅이 놀고 있다. 이런 비효율이 전국의 광역시권마다 벌어진다. 광역시를 폐지하고 생활권 단위로 광역권을 설정해야 한다.”

이 재계약 구상에서, 지방은 20세기 공간 계약과는 전혀 다른 거래에 직면한다. 이제 권한과 책임이 맞교환된다. 권역정부에 자치입법·자치재정·자치조직권을 주자는 구상이다. 급진적으로는 이 권역정부가 조세 자율성까지 상당 수준 가져가는 모델도 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연방제에 가까워진다.

이런 권역정부가 전국에 5~6개가 있다고 가정하자. 최상의 시나리오는 이렇다. 권역정부끼리의 혁신 경쟁이 작동한다. 규제를 잘 정비한 권역정부는 기업 유치와 일자리 창출로 상을 받을 것이다. 이를테면 택시 면허 문제에 창조적 해법을 내놓은 지방정부는 우버와 같은 공유교통 서비스 사업을, 규제에 막힌 다른 권역보다 먼저 안착시킬 수 있다. 혁신적 기업가들이 일종의 ‘정부 쇼핑’을 통해 혁신을 지원해줄 정부를 고르는 풍경도 등장할 수 있다. 5~6개 정도의 미래 성장 모델을 한 나라 안에서 실험해볼 수 있다면, 대외 상황 변화에 대응하는 국가 전체의 능력은 극적으로 올라간다. 반도체 불황이 닥칠 때 다른 모델이 준비되어 있는 국가가 된다.

‘권역정부’와 ‘압축도시’가 대안으로 부상

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 고한석 부원장은 권역정부 구상의 의미를 확장하자고 주장했다. 지방분권이나 민주주의 확충이라는 의미를 넘어, 서울과 경쟁하는 메가시티 육성, 권역정부 끼리의 혁신 경쟁, 복수의 경제성장 모델 확보라는 ‘혁신 성장 전략’으로 보자는 관점이다. 지방분권이 ‘나눠주기’가 아니라 ‘파이 키우기’로 갈 수 있다는 의미다. 최상의 시나리오로 작동한다면, 이 공간의 재계약은 중앙정부의 과도한 권력집중과 지방정부의 무기력을 동시에 제거할 수 있다.

물론 아직은 아이디어 차원에 그친다. 실현 가능성도 의심스럽다. 지방정부를 통합하는 권역정부 구상은 17개 광역 지자체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이다. 김종민 의원은 올해 지방선거가 끝나면 충청권 통합 운동을 펼 생각으로, 대전시장과 충남·충북지사 후보군들을 연쇄 접촉하고 있다. 전국 동시 실시는 현실성이 없으므로, 꾸준히 논의를 쌓아온 충청권에서 권역정부 모델을 선도적으로 만들고, 성공 사례를 보여서 다른 지역의 변화를 견인하자는 구상이다. 후보들 중 몇몇은 이미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한다.

학계에서도 흥미로운 재계약 구상이 나오고 있다. 마강래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최근작 〈지방도시 살생부〉에서 ‘압축도시(compact city)’라는 화두를 던졌다. 핵심은 신도심 개발 등으로 지나치게 확장한 지방도시의 인구와 기능을 최대한 원도심으로 모으는 것이다. 이렇게 ‘압축’하면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용이 크게 떨어진다. 인구가 모여 살면 상권이 활성화될 가능성이나 작은 혁신이라도 발생할 가능성이 지금보다는 올라간다.

ⓒ연합뉴스6월14일 문재인 대통령(앞줄 오른쪽 두 번째)이 시장·도지사들과 간담회를 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지방도시에는 인구 유입이 없기 때문에, 신도심 개발은 원도심을 텅 비게 만든다. 시소 효과만 나타나고 비용만 증가한다. 하지만 20세기 공간 계약은 토건 예산이 본질이었다. 신도심 개발은 그것이 감당 가능해서가 아니라 20세기 공간 계약의 본질이었기 때문에 계속되었다. 압축도시 전략은 지방이 이 계약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토건과 확장을 포기하는 대신 밀도를 얻는 거래다. 

 

박배균 교수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흥미로운 재계약을 제안했다. “문재인 대통령 공약인 소득주도 성장론은 가난한 사람은 소득이 늘 때 저축보다는 소비를 하는 성향이 높으므로, 가난한 사람 주머니를 채워주면 선순환이 일어난다는 접근법이다. 이걸 공간 재계약에 적용시키면 어떨까? 가난한 공간의 주머니를 채울수록 선순환이 일어난다고 바꿔보면? 복지 재정을 지방부터 확충하는 거다. 교육과 복지와 문화를 지방에 더 많이 공급해서 지방의 삶의 질을 먼저 높이는 역발상이다. 일자리가 있어야 지방이 산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꼭 그렇기만 할까? 제주가 산업단지여서 젊은이들이 가서 사는 게 아니잖나.”

20세기 이탈리아의 혁명가이자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옛것은 죽어가고 있으나 새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를 위기라고 말했다. 한국의 공간 계약만큼 이 말이 어울리는 상황도 흔치 않다. 20세기 공간 계약은 파산했다. 알기 쉬운 계약 파기 전략은 지방 소멸의 시대에 더 이상 대안이 되기 어렵다. 공간 재계약은 도망갈 길 없는 우리 시대의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명확한 대목은 여기까지다. 어떤 재계약인가에 정답은 아직 어디에도 없다.

백가쟁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2018년 상반기는 개헌론의 소용돌이도 예정되어 있다. 다수 여론의 관심은 권력구조 개헌의 방향에 쏠려 있다. 하지만 공간의 재계약은 설계하기에 따라서 대통령의 권한 범위마저도 부수적 이슈로 만들 수 있는 거대한 주제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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