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연호를 셈한 이래 격동의 한 해 아닌 해가 있었을까. 92년 전에도 지구는 격동 중이었다. 1926년 6월10일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 행렬은 시위와 동맹휴학으로 번진다. 연말에는 나석주 의사가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를 습격해 총격전을 벌이다 자결한다. 게다가 당시 일본 경제는 공황의 목전에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일제는 국가보안법의 전신인 치안유지법을 빼어든다. 마르크스 사상을 공부하던 교토 제국대학, 도시샤 대학 학생들이 첫 희생양이었다. 반제국주의 운동에 대한 사법 폭력의 수위가 달라질 것임을 예고한 셈이다.

그래도 일상은 흐른다. 서민 대중은 명절을 통해 일상의 간난신고를 위로하게 마련이다. 이때 따끈한 떡국 한 그릇이 명절 분위기를 북돋고 사람을 다독인다. 1926년 설날은 태양력 2월13일이었다. 이날의 풍경은 〈동아일보〉 1926년 2월14일자에 게재된 사진에 이렇게 요약된다. “오늘은 내 철이야! 작일(昨日, 어제)의 떡국집.”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동아일보〉 1926년 2월14일자 기사에 실린 떡국집 배달부의 모습.

왜 아니랴. 이 집은 유리문에 쓴 대로 떡국집이다. 만두에 장국도 판다. 설날의 주인공이 될 만하다. 18세기 문헌에도 떡국이 보인다. ‘책만 보는 바보’라 불렸던 실학자 이덕무(李德懋·1741~1793)가 남긴 한마디는 이렇다. “세시(歲時)에 흰떡을 쳐 만들고 썰어 떡국을 끓인다. 추웠다 더웠다 하는 날씨 변덕에도 잘 상하지 않고 오래 견딜 뿐 아니라 그 조촐하고 깨끗한 품이 더욱 좋다.” 흰떡의 소담함을 이보다 더 잘 그리기도 어려울 테다. 이처럼 조선 후기의 많은 문헌이 떡국을 설날의 대표 음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기계가 없던 시절, 떡을 어떻게 뽑았을까? 김매순(金邁淳·1776~1840)의 〈열양세시기〉는 이렇게 기록했다. “손으로 비벼 둥글고 긴 문어 다리 모양을 낸다. 이것을 권모(拳模)라고 한다.” 권모란 ‘비비는 손동작’을 말한다. 가래떡은 당시에는 권모, 문어다리 떡 등으로 불렸을 것이다. 흰떡은 어떻게 떡국이 되는가. 〈열양세시기〉에 이어진다. “먼저 장국을 끓이다가 국물이 펄펄 끓을 때 떡을 동전처럼 얇게 썰어 장국에 집어넣는다. 떡이 끈적이지도 않고 부서지지도 않으면 잘된 것이다. 그런데 돼지고기, 소고기, 꿩고기, 닭고기 등으로 맛을 내기도 한다.” 오늘날의 떡국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이즈음 만두 또한 서울 이북 지역에서는 겨울 별미로 자리를 잡는다.

다시 사진으로 돌아가자. 배달 심부름을 가는지 소년은 식기를 목판에 받쳐 들었다. 그 곁에 ‘음식점 영업’ 안내가 또렷하다. 여기서 “추웠다 더웠다 하는 날씨 변덕에도 잘 상하지 않고 오래 견딘다”라는 기록이 새삼스럽다. 보관하기 좋은 재료야말로 설비가 시원치 않은 시대에 음식점주가 탐낼 만한 재료 아닌가. 이렇듯 떡국은 지난 요식업사에서 일상의 대중음식 노릇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새해에 떡국을 먹으며 온기를 나눈다

하지만 당시 설날은 집안에서 집안사람끼리 모이지, 나가서 외식하는 날이 아닌 시절이다. 장사가 될 것 같지 않아 기자가 왜 굳이 문을 열었는지 물었다. 주인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오늘 떡국을 먹지 못하면 까닭 없이 섭섭하다 하여 부모를 떠나 시골서 올라온 학생들의 주문이 하도 많기에 이렇게 문을 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 아닙니까. 하숙집에서 떡국까지 끓여주는 집이 어디 쉽습니까.”

92년 전 음식점 주인장의 한마디 앞에서, 문득 미식도 탐식도 부질없어진다. 못 먹으면 까닭 없이 섭섭한 음식이 있는 법이다. 고단한 이웃의 마음을 헤아린 그 말에 깃든 온기가 각별하다. 그렇게 우리는 새해에 떡국을 먹는다.

기자명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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