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혼슈의 북동쪽 땅끝인 미야기 현에도 한국과 일본의 불편한 과거사를 들춰내는 표시는 있다. 미야기 현이 자랑하는 일본의 3대 절경 중 하나라는 마쓰시마는 우리말로 읽으면 송도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거류민 중 미야기 현 출신이 고향이 그리워 한국 땅 곳곳에 송도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곳이 부산과 인천의 송도이다. 특히 인천 송도는 동학 농민군을 제압하고 서해안을 누비던 일본 전함 마쓰시마호의 이름을 땄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런 얘기들에는 반론도 많지만 어쨌건 송도라는 지명의 상당수는 일본 제국주의가 붙인 것이 맞다.

미야기 현은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일본의 다이묘(大名·봉건 영주) 다테 마사무네의 근거지였기도 하다. 일본 동북 지방에서 가장 명망 높은 선종 사찰인 즈이간지에 가면 이 절의 후원자였던 다테 마사무네가 조선에서 가져왔다는, 수백 년 묵은 홍백의 매화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기품이 넘치는 이 매화나무 앞에 서면 한국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대에 짓밟히고 약탈당했던 조선의 참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ssuchol일본 3대 절경 중 하나인 마쓰시마. 크루즈를 타면 200개의 섬이 줄지어 나타난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출병한 곳이며 메이지유신 때 정한론이 나온 곳이기도 한 규슈에 이어 이곳 미야기 현에도 올레길이 생기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 자칫하면 전형적인 ‘다크 투어(쓰라린 기억을 찾아 떠나는 여행)’의 대상지로 그칠 수도 있었던 이 지역들이 앞으로 한국인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폭력과 살육의 기억이 앞서던 곳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이 평화와 치유의 의미를 되새기며 함께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걷는 길에서 사람들은 친구가 된다. 미야기 현은 사단법인 제주올레로부터 코스 개발과 운영 노하우, 철학을 배워 2018년 2~3개 코스를 개장할 예정이다. 물론 미야기 현에 자신감을 심어준 곳은 규슈였다. 규슈는 2012년 2월 규슈 올레 개장 이후 19개 코스를 운영 중이며 지금까지 올레꾼 33만명을 끌어들였다.

제주올레가 미야기 현이 내민 손을 잡은 것은 이곳이야말로 치유와 평화가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야기 현은 2011년 3월11일 강진과 함께 밀어닥친 쓰나미로 모두 9540명이 사망하고 1225명이 실종되는 큰 상처를 입었다(일본 경찰청 최근 집계). 아직도 지역 신문에는 쓰나미 복구 뉴스가 연재되고 있지만 서서히 충격에서 벗어나는 중이다. 이제 거리에서 대재난의 흉터를 발견하기란 어렵다. 물이 찼던 곳을 가리키는, 가로수나 나무에 그어진 선을 제외하고는 이제 그날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은 대부분 지워졌다.

미야기 현 관광청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오는 관광객 수도 예전 수준으로 빠르게 회복 중이다. 한국 관광객은 2010년 1만6530명에서 쓰나미 이후 5580명으로 급감했다가 2016년에는 8820명으로 늘어났다. 미야기 현 관광청 관계자에 따르면 이 지역은 사실상 쓰나미나 원전 사고의 후유증에서 벗어났지만 아직 관광객들이 위험하다고 여기는 게 문제다.

ⓒssuchol해발 1841m인 구마노다케 산 정상에 있는 거대 분화구 오카마의 모습.
미야기 현이 지방자치단체와 협력해 공간 방사선량을 연중 24시간 측정한 바에 따르면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영향권에서 거의 풀려났다. 주요 도시인 오사키 시 나루코, 게센누마 시 가라쿠와, 센다이 시, 마쓰시마초의 공간 방사선량은 0.026μSv에서 0.05μSv로 세계의 여느 대도시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미야기 현은 수돗물, 유통식품, 학교 급식 등에 포함된 방사선 물질을 끊임없이 측정하는데 모든 수치가 사고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간 상태이다. 미야기 현 측은 “절대로 안전하다고 단언할 수야 없겠지만 인체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미야기 현은 올레길을 도입해 외부 세계에 다시 안심하고 자기네 고장을 찾아도 좋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한다.

미야기 현은 서쪽으로 1000m가 넘는 고산 준봉이 늘어서고 동쪽으로 하천과 평야가 발달해 굳이 가꾸지 않아도 자연 그 자체가 아름다운 곳이다. 가끔은 곰이 민가 가까이 내려올 정도로 원시의 숲이 살아 숨 쉰다. 산 타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바다를 즐기는 사람도 모두 만족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일본의 3대 절경 중 하나라는 마쓰시마는 약 200개 섬이 줄지어 늘어선 곳이다. 처음 보면 명성이 과장됐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볼수록 마음이 끌리는 곳이라는 게 일본 사람들의 말이다. 특히 이곳의 진면목을 보려면 눈 덮인 겨울에 찾아야 한다. 마쓰시마가 ‘바다에 떠 있는 눈송이’임을 실감하게 된다. 마쓰시마의 개성 넘치는 섬들의 서로 다른 매력을 발밑으로 내려다보며 즐길 수 있는 리아스식 해안 산길이 올레길 1호 후보지이다.

ⓒssuchol센다이 시에 위치한 규탕(소 혀 구이) 전문점에서 러닝셔츠 차림의 주방장이 요리를 하고 있다.
중앙보다 변방, 소비보다 검약을 돋보이게

유명 관광지를 트로피 수집하듯 다니는 여행은 사실 올레 정신에 어긋난다. 굳이 일본의 100대 폭포 안에 든다는, 폭 6m·낙차 55m에 달하는 아키우 폭포를 보라거나, 1841m의 구마노다케 산 정상에 있는 거대한 화구호 오카마를 봐야 한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빨려 들어가면 결국 길을 잃고야 말 것만 같은 깊고 신비로운 나루코 협곡에 다녀와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도 없다. 그 대신 이곳의 꾸밈없는 사람들을 만나보라고 권한다.

소박한 노인들은 외출할 때도 20년은 입었음직한 청바지나 재킷을 아무렇지도 않게 걸치고 다닌다. 머리를 염색한 이도 좀처럼 보기 어렵다. 중·고등학생들도 외모나 교복에 신경을 쓴 흔적이 없다. 이렇게 순박한 모습의 아이들이 한국의 관광객과 눈이 마주치면 스스럼없이 인사를 건넨다. 이곳은 제주올레처럼 현지인과 관광객이 거리낌 없이 정을 나누기에 좋은 환경이다.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와는 달리 강원도 강릉 정도의 느낌이 나는 센다이 시 음식점은 양이 푸짐하고 주인장 인심도 좋다. 굳이 규탕(牛タン·소 혀 구이)처럼 유명한 음식을 찾아다닐 필요도 없다. 오히려 입맛에 맞지 않아 낭패를 볼 수도 있다. 그보다는 이름 없는 허름한 음식점에 도전해보길 권한다. 기대하지 않고 들어갔다가 만족할 확률이 꽤 높다. 질 좋은 쌀과 고구마로 빚어 종류가 다양한 지자케(지역의 곡주)와 소주가 각각 풍미가 넘친다. 노미호다이(일정한 돈을 내면 술을 종류별로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이자카야에서 호기를 부려도 좋으리라.

미인온천이라고 불리는 나루코에서도 정작 마음에 든 것은 물의 질이 아니었다. 우리네 찜질방처럼 손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잔소리를 써서 어지럽게 붙여놓지 않았다. 미끄러우니 조심하라는 말이 고작이다. 욕조 재료도 소나무나 도자기가 전부다. 원적외선이니 뭐니 하는 말은 그림자도 없다. 욕조 형태에 따라 만월, 반달, 삼각형 따위의 이름을 붙였는데 소탈하고 정겹다. 이곳은 분명히 중앙보다는 변방, 화려함보다는 소박함, 유명보다는 무명, 주류보다는 소수, 소비보다는 검약을 돋보이게 만드는 올레 정신에 어울리는 곳이다.

※ 이 취재는 미야기 현의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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