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객지〉가, 내가 읽은 첫 황석영 책이었던 듯싶다. 1979년 무렵, 대학 시절이었다. 〈객지〉에 수록된 〈장사의 꿈〉 〈한씨연대기〉 〈삼포 가는 길〉은 연극으로, 영화로 다시 보았다. 그 후 40년 가까이 황석영의 독자로, 황석영의 세계를 누리며 살아온 셈이다. 〈장길산〉 〈무기의 그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열애〉 〈오래된 정원〉 〈손님〉 〈강남몽〉 〈여울물소리〉.

그가 75세에 내놓은 자서전 〈수인〉은 그 자체가 하나의 대하소설이다. 70년에 걸친 시간 배경, 지구를 몇 바퀴 도는 활동 반경, 그가 쓴 소설들만큼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 〈수인〉은 마치 〈장길산〉처럼 읽힌다. 방황하는 성장기, 중이 되어 도를 닦기도 하고 사회 밑바닥을 헤매다 다양한 직업·계급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결국 의기투합해 사회의 모순과 불의에 대항하는 이야기. 새삼 장길산이 황석영의 아바타였구나 싶다. 긴급조치, 계엄령, 위수령의 시대. 위험하고 각박했던 때 황석영이 만나고 의지했던 친구들, 염무웅·구중서·여운·최민·김지하·손학규·박윤배…, 또는 유치장과 공사판이나 공장지대에서 만난 장씨나 이씨나 김씨들…. 황석영이 장길산과 다른 건 교유 범위가 국제적이라는 점. 가령 그가 ‘오에 선배’라고 부른 오에 겐자부로 등.

“파란만장 황석영”이라는 카피대로 그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식민지와 해방, 월남, 전쟁과 피란, 4·19와 5·16, 고교 중퇴와 공사판, 베트남 파병, 유신 반대운동과 광주항쟁, 그리고 방북과 망명. 그는 어머니 손잡

〈수인〉
황석영 지음
문학동네 펴냄
고 월남했고 피란길에 죽을 고비를 넘겼고, 4·19 때 고교생으로 광화문에 나갔고, 베트남 전쟁 때 해병대 병사로 거기 있었고, 톈안먼 사태 때 톈안먼 광장에 있었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브란덴부르크 광장에 있었다.

매일 아내가 차려주는 아침밥 먹고 서재로 들어갔다가 저녁에 거실로 퇴근하며 단정하게 생활했던 이청준 같은 작가가 있는가 하면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이슈들을 육탄으로 정면돌파하고 현장을 누비면서 그 역마살이 소설이 된 황석영 같은 작가가 있는 것이다. 냉전 시대 한국에 그처럼 사회 이슈와 대결한 작가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황석영은 방북과 망명으로 다른 참여파 동료들을 족탈불급으로 따돌려버렸다.

황석영의 오랜 독자들에게 〈수인〉은 작품들 태생의 비밀을 알려주는 일종의 ‘메이킹 다큐’로서 흥미롭다. 개인적인 얘기 한마디. 1990년 내가 〈한겨레신문〉 기자일 때 그가 독일 망명 중에 소설 〈흐르지 않는 강〉을 연재하면서 마감 시간 어기고 펑크도 내다가 연재를 중단해서 담당 실무자인 나를 괴롭혔는데, 〈수인〉을 읽고서 그 사정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것.

기자명 조선희 (소설가·전 서울문화재단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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