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남자들의 일원인 내가, 오히려 그녀들의 말을 빌린 적이 있다. 키가 작았던 나는 남중, 남고를 다니며 괴롭힘을 당했다. 구타의 짧은 고통은 견딜 수 있었다. 다만 색색의 볼펜이 가득했던 내 필통을 그들이 창밖으로 집어던졌을 때, 묵묵히 그 필통을 다시 주워오지 못했던 비겁함, 스스로를 부정했던 시간, 그것이 가장 아프고 만성적인 통증이었다. 그러던 스무 살, 벨 훅스의 〈행복한 페미니즘〉을 읽었다. “차이가 차별이 되어선 안 된다.” 나조차 부정했던 내 모습을 온전히 떠받쳐주는 부력의 주문이었다.
〈엄마는 페미니스트〉는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소꿉친구에게 보내는 열다섯 장의 편지를 엮은 짧은 책이다. 친구의 딸을 페미니스트로 키우기 위한 제안. 비밀결사를 조직하자는 것도 아닌데 책에선 시종일관 속삭임이 들린다. 마침표마다 힘줘 찍었을 게 분명한 단호함까지 느껴진다. 그건 아마도 지구 저편 나이지리아의 두 소꿉친구에게도 ‘페미니즘’은 스스로의 삶 그리고 이어질 딸들의 인생을 수호해줄 비밀의 주문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 엄마가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는 유일한 호신술로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한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나이지리아의 현실에 절망하면서도 페미니즘이 결국 태도와 관계, 윤리의 문제임을 차분하고도 낙관적으로 들려준다. 그래서 그녀의 첫 번째 제안은 엄마 스스로 ‘충만한 삶을 살 것’이다. 〈행복한 페미니즘〉을 통해 페미니즘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있다면, 〈엄마는 페미니스트〉는 그 이야기를 ‘누가, 어떤 목소리로’ 하는지 보여준다.
서점의 유아교육 코너에 이 책은 없다. 어떻게 하면 아이를 영재로 키워 (물론 ‘엄마’의 노력으로) ‘좋은 대학’에 보낼 수 있는가를 성마르게 떠들어대는 말들 사이에 이 책의 자리는 없다.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남자 페미니스트가 무엇인지 나는 아직도 말하지 못한다. 빌려온 말로 대답하긴 겸연쩍은 질문들이다. 하지만 곧 태어날 생명의 무한함을 내 욕망 안에 가두려는 부모들의 태도를 비판할 때, 엄마가 된 배우자를 둔 남성들에게 조언할 때, 나는 자연스레 이 책에 가득한 페미니즘의 언어를 감히 다시 빌릴 것이다. 언젠가 아빠가 아들에게 나지막이 들려주는 페미니즘의 언어가 통용되려면, 우린 지금 이 책을 읽고 또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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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렇게 신음하는 낙동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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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과 77년생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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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82년생 김지영〉 서평 쓰기는 한바탕 전쟁 같았다. 한 줄 쓸 때마다 방송 관련 전화가 걸려오고, 방송작가 노조(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카톡방에는 새로운 메시지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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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이 보내는 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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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조국을 찾고 싶다.” “대한국민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한다.” 이는 107년 만에 발견된 연해주 ‘성명회(聲明會) 선언서’ 내용 중 일부이다. “나라를 잃어 나라가 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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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페미니즘을 받아치다 [독서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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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소설가)
대부분의 전국 단위 종합 일간지는 연말이면 의례히 ‘올해의 책’을 선정한다. 〈중앙일보〉 손민호 기자의 말에 따르면, 2017년 출판계는 어느 해보다도 페미니즘 열풍이 거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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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 존재하는 ‘두 개의 나라’ [프리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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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호 기자
지난해 11월 서울시교육청이 주관하는 성평등 교육정책 비공개 토론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한 초등학교 교사로부터 촉발된 ‘페미니즘 교육’ 논란이 격렬하게 이어지던 때였다. 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