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헐벗지 않는다.’ 중견기업 3년차 직장인 최아름씨(가명·27)는 11월 초 사내 성희롱 예방교육 자료에 쓰인 문구를 보고 눈을 의심했다. 강사가 제시한 ‘성희롱을 예방하는 규칙 1조’에 ‘회사에서 헐벗지 않는다’라고 쓰여 있었다. 교육 자료에는 “성희롱을 가능하게 하거나 부추기는 조직 구성원들의 생각과 태도, 그리고 성희롱을 예방할 수 있는 조직 구성원들의 생각이나 태도가 중요하다”라고 적혀 있었다. 교육을 잘 받았는지 확인하는 문제로 ‘성희롱의 피해자가 되지 않는 방법 5가지를 쓰시오’가 나왔다.

또 다른 성희롱 예방교육 자료에는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기’라는 제목으로 남녀의 차이를 설명했다. “여자는 열을 받거나 스트레스를 느끼면 들어줄 사람을 찾아 나서고 그 사람을 앞에 놓고 한없이 얘기를 한다” “남자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술을 마시거나,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다” 따위다. 성희롱 원인이 피해자에게 있다는 논리와, 남녀를 이분법적으로 가르고 고정관념에 가두는 교육 내용에 최씨는 화가 났다. 최씨는 “정식으로 회사에 항의하고 싶었지만, 인사상 불이익을 받거나 ‘찍힐까 봐’ 두렵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신선영지난해 고용노동부에 접수된 직장 내 성희롱 진정 건수 556건 중 형사처벌 대상 사건은 29건이었고 실제 기소된 경우는 단 1건이었다.

박윤희씨(가명·27)도 신입 사원으로 연수 교육을 받을 때 비슷한 일을 겪었다. ‘창의적 아이디어 강의’라는 제목의 교육 시간에 강사는 “남자와 여자를 각각 사물에 비유하라”는 과제를 던졌다. 강사가 던진 예시는 “여자는 자전거 같다. 밟을수록 잘 나간다”였다. 사원들은 이를 따라 “여자는 팽이 같다. 칠수록 잘 돌아간다” 따위 답변을 발표했다. 이런 비유가 모욕적이고 성차별적이라는 문제 제기를 한 박씨에게 “유난 떤다” “너 페미나치(페미니즘과 나치의 합성어)냐”라는 비난이 돌아왔다.

이른바 ‘한샘 성폭력 사건’ 이후 비슷한 폭로들이 잇따르고 있다. 11월4일, 현대카드 위촉계약직원이라고 밝힌 한 여성이 ‘한샘 사건을 보고 용기내서 글을 올립니다’라는 제목으로 입사 한 달째에 참석한 회식이 끝난 뒤 상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글을 온라인에 올렸다. 한림대성심병원에서는 간호사들에게 사내 행사에서 선정적인 옷과 춤을 강요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씨티은행에서는 여직원들의 신체 부위를 찍은 몰래카메라가 적발됐다. 현대카드 사건의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피해자나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신입 사원 등 젊은 여성이고, 직장 내 상하 관계라는, 자기 의사 표현이 억압당한 상황 속에서 일어났다는 점이다.
 

한 회사 성희롱 예방교육 자료에 ‘회사에서는 헐벗지 않는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직장 내 성폭력의 경우 가해자 대부분이 피해자보다 직급이 높다. 서울여성노동자회가 지난해 직장 내 성희롱 내담자 23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가해자가 상사였다고 응답한 사람이 61%, 사장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23%였다. 사내에서 가장 직급이 낮은 신입 사원일수록 성희롱 피해를 많이 호소했다. 전국 여성노동자회 10개 지부 통계에 따르면 근속년수가 짧을수록 직장 내 성희롱 상담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직장 내 성폭력의 딜레마는 ‘위계’에서 주로 발생한다. 어제의 가해자가 상사나 사장이면 오늘 회사에 출근해 가해자들의 업무 지시를 거부하기 힘들다. 피해자가 업무를 처리하며 보인 ‘온순한’ 태도가 향후 법정에서 합의에 의한 성관계의 증거로 쓰이기도 한다. 서울여성노동자회 김정희 상담팀장은 “성폭행이나 성희롱 피해를 당해도 이후 회식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다음 날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웃으면서 인사했다는 사실을 상대편에서 ‘성폭행이 아니었다’는 증거로 쓰기도 한다. 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ㄱ씨는 상사와 해외로 출장을 갔다가 성폭행을 당했다. 경찰은 무혐의 결론을 내렸다. 가해자인 상사와 귀국 비행기를 같이 탔기에 합의에 의한 성관계로 보인다는 이유였다. 출장이라 회사에서 마련한 비행기를 탄 게 ‘합의’의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회사에 가면 웃고, 집에 오면 울고”

ㄴ씨는 상사에게 술자리를 강요당한 끝에 모텔로 끌려갔다. 그녀는 성관계를 강요하는 상사와 실랑이하는 과정을 녹음했다. 강간 미수 및 성희롱으로 고소하려 했을 때, 녹음을 들은 변호사가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ㄴ씨가 차분하고 상냥한 말투로 상사를 달랬기 때문이다. 자기 나름으로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효과적인 방법을 쓴 것이었지만 변호사는 연인 사이의 ‘밀고 당기기’로 오해를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취업난 속에 겨우 잡은 직장을 잃고 싶지 않아 피해 자체를 숨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ㄷ씨는 상사에게 성폭행을 당했지만 “회사에 가면 미친년처럼 웃고 집에 와서 3시간 동안 울면서” 1년6개월 동안 회사를 다녔다(이상은 서울여성노동자회 실제 상담 사례다).

지난해 고용노동부에 접수된 직장 내 성희롱 진정 건수 556건 중 형사처벌 대상 사건은 29건이었다. 하지만 실제 기소된 경우는 단 1건이었다. 기소 건수가 극히 적은 이유는 피해자가 조사받는 과정에서 회사로부터 회유나 입막음을 당하는 것과 무관치 않다. 한샘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법률대리를 맡은 김상균 변호사(법무법인 태율)는 “사건 초기에 피해자가 쓴 진술서가 회사에 불리하다며 회사 측에서 수정을 지시했다는 정황이 담긴 증거 자료가 있다”라고 밝혔다.

결국 대다수 직장에서 성폭력 가해자는 회사에 남고 피해자는 회사를 떠난다. 서울여성노동자회의 지난해 실태조사에 따르면 직장 내 성희롱 발생 후 피해자의 72%가 퇴사했다. 이 가운데 82%가 6개월 이내에 퇴사했다. 한샘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ㄱ씨도 11월23일 사직서를 제출했다.

전문가들은 피해자들에게 사회가 강요하는 ‘피해자성’에 갇히지 말라고 조언한다. 김정희 서울여성노동자회 상담팀장은 “성폭행을 당할 위기에 놓였을 때 가장 추천하는 방법은 112에 신고하는 것이다. 신고한 흔적이라도 남기면 나중에 가해자가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고 주장하기 어렵다”라고 조언했다. 피해자를 보호하는 법적 제도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성범죄 피해자는 고소장 접수 단계부터 국선변호인을 요청할 수 있다. 피해자가 원한다면 여자 경찰에게 조사를 받을 수 있고, 경찰청 내부의 심리 보호 상담을 받을 수도 있다. 직장 내 성폭력 및 2차 불이익으로 인한 우울증 등 정신적 피해는 산업재해가 인정돼 치료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

지난 11월9일 국회는 한샘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사업주의 성희롱 피해자 보호조치를 강화하는 내용을 담은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개정안에 따르면 사업주는 성희롱 사실 확인을 위한 조사와 동시에 근무 장소 변경 또는 유급휴가 부여 등 피해자에 대한 보호조치를 해야 한다. 사업주가 성희롱 발생 사실을 신고한 노동자와 피해 노동자에게 불리한 처우를 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또 사업주가 성희롱 조사나 피해자 보호조치, 가해자 징계조치를 하지 않으면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 처분을 받을 수 있다.

기자명 신한슬 기자 다른기사 보기 hs51@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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