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쉐린(미슐랭) 가이드〉는 비밀의 성역인가. 심사위원들의 레스토랑 평가만 비밀리에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발간 국가의 정부기관과 미쉐린이 맺은 계약 내용도 전부 비밀에 부쳐진다. 〈미쉐린 가이드〉 한국판(서울 편)을 발간하는 조건으로 한국 정부가 예산을 얼마나 투입했는지, 재원은 어떻게 마련했는지, 계약 기간이 언제까지인지 등이 철저하게 기밀 사항이다. 〈미쉐린 가이드〉 서울 편이 대체 몇 부를 인쇄했는지조차 알려진 바가 없다.

이런 가운데 11월8일 〈미쉐린 가이드 서울 2018〉이 발간됐다. 지난해 이맘때 처음 한국판(서울)을 발간한 데 이어 1년 만에 개정판을 펴냈다. 어떤 식당이 ‘미쉐린의 별’을 받았느냐를 두고 올해도 관심이 쏠렸지만, 여전히 계약 내용에 대한 의구심은 해소되지 않았다. 이는 ‘공정하고 독립적인 식당 평가서’를 자임하는 〈미쉐린 가이드〉의 신뢰성과도 무관치 않다.

〈미쉐린 가이드〉에 광고비 명목으로 정부 예산을 집행한 한국관광공사와 한식재단(최근 ‘한식진흥원’으로 명칭 변경)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이유는 한 가지. 미쉐린과 맺은 ‘비밀유지 계약’ 때문이다. 지난달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이런 내용이 문제가 됐지만, 정창수 한국관광공사 사장은 “어느 나라도 미쉐린과의 광고 계약 내역을 밝힌 곳은 없다”라고 말했다.
 

ⓒ연합뉴스11월8일 서울 시그니엘서울에서 열린 〈미쉐린 가이드 서울 2018〉 발간 간담회에서 미쉐린 가이드 수상 셰프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런 비밀유지 계약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시사IN〉은 송기석 국민의당 의원으로부터 미쉐린과 한국관광공사가 맺은 ‘비밀유지 약정서’ 전문을 입수했다. 이와 함께 정부기관 관계자를 통해 한국관광공사와 한식재단이 미쉐린 측에 지불해야 하는 돈이 모두 20억원임을 확인했다.

〈미쉐린 가이드〉의 한국 진출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2014년 무렵이다. 그해 9월 프랑스 미쉐린 사의 한국 법인인 미쉐린코리아와 한국관광공사가 ‘비밀유지 약정서’를 체결한다. 정식 계약과 관련한 사전협약서를 주고받은 것이 2015년 8월쯤이니, 정식 계약 1년 전에 비밀 약정서부터 주고받은 셈이다.

A4 용지 9장으로 이루어진 비밀유지 약정서 내용은 이렇다. 우선 이들이 분류하는 기밀 사항은 ‘본건 거래의 사실, 본 (비밀)약정 자체’다. ‘대(對)언론, 대(對)정부기관을 포함한 일체의 제3자에 대한 관계에서 이를 기밀로 유지하고 준수’하기로 했다.

이후 내용은 주로 한국관광공사가 져야 할 ‘책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관광공사는 미쉐린의 사전 서면 동의 없이 기밀 정보를 언론에 공개하거나, 문화체육관광부와 정부기관이 그러한 언론 공개나 보도자료를 배포하도록 허용해도 안 된다.’ 상급 기관인 문체부까지 강제하는 조항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다음과 같은 조항이다. ‘관광공사는 정부의 관리감독을 받는 산하기관이나, 기밀 정보에 대한 정부기관 또는 국회에의 제공을 최소한의 범위로 한정하고, 사전에 미쉐린에게 그러한 제공 사실을 서면으로 통지하고 협의한다’라고 나와 있다. 국회 피감기관인 한국관광공사에 부적절한 처신을 강요하고 있다.
 

ⓒ시사IN 윤무영미쉐린 사의 한국 법인인 미쉐린코리아와 한국관광공사가 체결한 ‘비밀유지 약정서’. 한국관광공사는 미쉐린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 계약 관련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미쉐린 비밀유지 계약의 실체

손해 보상 항목도 빠지지 않는다. ‘관광공사의 본 약정 규정 위반으로 미쉐린의 권리가 침해되는 경우, 한국관광공사는 미쉐린이 입거나 예상되는 손해(이에 관하여는 위반의 성격에 따라 미쉐린이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한국관광공사에게 통지한다)를 전적으로 보상하는 데 동의한다’라고 되어 있다.

2014년 9월 당시 비밀유지 약정을 체결한 당사자는 미쉐린코리아 김 아무개 사장과 한국관광공사 변추석 사장이다. 변추석 사장은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후보 캠프 홍보본부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최순실씨 측근인 차은택씨의 압력으로 관광공사 사장 자리에서 중도 사퇴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인 바 있다.

이런 비밀유지 약정 자체가 상식 이하라는 지적도 있다. 한국 정부기관이 외국 사기업인 미쉐린을 상대로 의무만을 지는 ‘채권적 계약’을 맺은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한 변호사는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회와 국민이 알아야 할 내용을 밝혀야 할 정부기관이 이런 계약을 이유로 관련 내용 공개를 거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외국 사기업이 대한민국 국민보다 우선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지난 국정감사 때 국회에서 정보 공개를 요구할 당시에도 관광공사는 비밀유지 약정 의무를 충실히 따랐다. 9월22일 관광공사는 ‘비밀유지와 관련한  일부 내용을 제3자(국회)에 제공함에 대한 동의 요청’을 미쉐린에 보냈고, 미쉐린은 ‘필요 한도로 공개하되, 공개 시 당사에 그 내용을 알려주기 바란다’라는 답신을 보낸다. 이후 10월10일 한국관광공사는 국내 법무법인에 법률자문까지 한 끝에 추진 경과 등 일부 내용을 공개했다. 그러나 핵심 사항인 예산 집행 내역 등은 끝까지 공개하지 않았다.

대체 미쉐린과 맺은 계약 내용은 어떤 것일까. 〈시사IN〉은 송기석 의원실 관계자가 한국관광공사 측 계약서를 열람한 내용과 정부기관 관계자로부터 확인한 내용을 종합해 그 내용을 파악했다. 우선 가이드 제작에 소요되는 예산은 총 150만 유로다. 한국 돈 약 20억원이다. 발간 부수는 6만 부인데, 계약 기간 5년(2016년부터 2020년까지) 동안 나눠서 발간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쉐린 가이드〉에 투입되는 예산 20억원
 

 

가장 중요한 예산 집행은 한국관광공사와 한식재단이 맡기로 했다. 관광공사와 한식재단은 2015년 11월 음식 관광 활성화를 위한 양해각서 (MOU)를 체결하고 〈미쉐린 가이드〉 제작에 필요한 돈을 50대50으로 나눠 내기로 한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각각 10억원씩 지출하는 셈이다. 두 기관은 2015년 선급금 명목으로 10만 유로(약 1억3000만원)를 지불하고, 이후 매년 30만 유로(약 4억원)씩 지급하기로 약속했다(마지막 해인 2020년에는 20만 유로). 지난해 〈시사IN〉이 정부기관 관계자의 증언을 토대로 내보낸 보도(제480호 ‘〈미쉐린 가이드〉에 나랏돈 4억원 썼다’ 기사 참조)는 2016년 한 해 지출에 불과했던 셈이다.

한국관광공사가 지난 10년 동안 국내외 출판물에 광고비 명목으로 지출한 돈은 건당 최저 25만원에서 최고 6000만원이었다. 이런 전례에 비춰봤을 때 〈미쉐린 가이드〉 제작에는 이례적으로 큰 금액을 지출했다. 더욱이 관광공사는 이런 금액을 지불하고도 〈미쉐린 가이드〉를 5000부밖에 수령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 필요할 경우 직접 유상 구매해야 할 처지다.

나랏돈이 크게 들어갔지만, 〈미쉐린 가이드〉는 엄연한 상품이다. 시중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정가 2만원에 팔린다. 게다가 미쉐린은 가이드북 발간 이후 각종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달 용산 아이파크몰에서 미쉐린에 등재된 레스토랑 19곳이 참여하는 ‘미쉐린 가이드 고메 페어 2017’을 개최했다. 지난 7월에는 미쉐린 ‘1스타’를 받은 식당의 셰프를 초대해 1인당 25만원짜리 다이닝 행사를 열었다. 앞으로 이런 사업은 다각도로 진행되리라 보인다.

‘미쉐린 지지자’들은 “정부기관이 한식당 홍보를 위해 돈을 쓸 수도 있는 것 아니냐”라고 주장하지만, 이처럼 불합리한 비밀유지 약정까지 해가며 나랏돈을 쓸 이유가 있는지 의문이다. 지난 국정감사에서 드러났듯 지난해 가이드북에는 30군데가 넘는 오류가 발견됐다. 계약 내용에 따라 올해도 〈미쉐린 가이드〉에 수억원의 나랏돈이 지급될 예정이다.

 


 

한식재단 왜 진흥원으로?

미쉐린에 광고비를 집행하는 정부기관은 한국관광공사와 한식재단이다. 2015년 맺은 양해각서에 따라 두 기관이 150만 유로(약 20억원)를 5년 동안 분납한다. 그런데 최근 한식재단이 이 양해각서 파기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재단 안팎에서는 〈미쉐린 가이드〉에 앞으로 지출해야 할 비용이 부담스러워 발을 빼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관광공사로서는 펄쩍 뛸 수밖에 없다. 한식재단 측은 “확실하게 결정된 것은 없다. 계획대로 올해도 미쉐린에 광고비를 집행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최근 한식재단은 ‘한식진흥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를 두고도 해석이 분분하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0년 출범 초기부터 ‘김윤옥 여사 사업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지난해 미르재단과 관련한 구설에 오르는 등 논란이 잇따르자 간판을 바꿔 달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한식재단이 한식 자체에 대한 홍보에 치중했다면 진흥원은 한식당 컨설팅 등 외식 산업 강화에 주력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식진흥원이 국내외 한식당과 더욱 밀접한 관계가 되리라는 이야기다. 〈미쉐린 가이드〉 같은 외국의 영향력 있는 매체에 기대지 않고도 국내 유명 레스토랑 등 외식업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할 길도 열렸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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