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살고 볼 일이다.”

10월 24일, 언론노조 MBC본부 파업 집회가 열린 서울 상암동 본사 로비를 찾아온 ‘예은 아빠’ 유경근씨의 말입니다. 지난 몇 년, 세월호 유가족들은 매일같이 상암동 MBC를 찾아와 ‘진실을 인양하라’ ‘유가족 두 번 울린 MBC 보도 사과하라’고 피케팅을 했어요. 그때만 해도, MBC 직원들에게 힘내라고 응원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거죠. 유경근 4·16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파업에서 이기고 돌아가면 MBC가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히는 데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하셨어요. 아이들의 이름표를 단 엄마 아빠들이 파업 중인 MBC 노동자들을 위해 세 곡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약속해〉 〈손을 잡아야 해〉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그날 로비를 가득 메운 MBC 직원들은 부끄러움과 고마움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3년 전, 2014년 11월4일에 블로그에 올린 글이 있어요.

ⓒMBC 노조 제공10월24일 세월호 유가족들이 서울 상암동 MBC를 찾아 노조 파업을 응원했다.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쓸까, 책을 볼까, 절을 할까, 이도저도 못하고 한동안 번민만 했습니다. 글을 쓰면 날선 울분이 터져 나올 것 같았고, 책을 읽으면 현실을 두고 비겁하게 도피하는 것 같았고, 108배 절을 하자니 수행도 수양도 안 될 것 같더군요. 요 며칠 페이스북을 들여다보기가 참 힘듭니다. MBC에서 같이 일하던 PD나 기자들이 농군 학교, 사업 부서로 쫓겨났어요.

이제 그들은 또 한동안 자문하면서, 자책하면서 힘든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내가 누구에게 잘못했을까?’ 이 두 가지 질문을 품고 사는 삶은 지옥입니다. 우리는 공포 영화에서 이 두 가지 질문을 만납니다. 일본 영화 〈링〉에서 주인공은 묻지요. ‘무엇을 했기에 죽었을까?’ ‘살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할리우드 영화 〈스크림〉은 아예 공포 영화의 공식을 가지고 놉니다. 사는 사람과 죽는 사람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아주 악독한 살인마를 만나면, 그런 기준은 의미 없어요. 그냥 다 죽이니까요.

드라마 제작사무실이 있는 일산 드림센터에서 근무하다 상암동 신사옥으로 옮겼습니다. 상암동에 간 후로, 한동안 웃음이 많이 줄었습니다. 평소에 저는 늘 웃고 다닙니다. 저처럼 외모가 부족한 사람이 표정마저 울상이면 봐주기 힘들거든요.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늘 발랄하게 웃는 표정으로 다닙니다.

그런데 상암 신사옥에 간 후, 승강기에서 같이 파업했던 동료를 만나 반갑게 인사를 했다가 살짝 당황하는 후배의 표정을 보고 잠시 ‘음?’ 했더랍니다. 왜 그러지? 아마 승강기에 같이 탄 이들 중에 보도국 간부가 있었나 봅니다. 저는 보도국의 높은 분들 얼굴을 몰라 가끔 그런 실수를 합니다. 그때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반갑게 웃으며 인사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피해를 줄 수 있는 일이구나.

그다음부터는 그냥 눈인사만 하고 지나가고요. 가능하면 웃지 않고 조용히 다닙니다. 기가 죽어 어깨가 팍 꺾인 교양국 동료나 기자 후배를 보면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와락 안아주고, 등 한번 세게 두들겨주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나 저는 참습니다. 그런 게 아마 전과자의 설움인가 봅니다.

저는 그렇게 조용히 눈치 보며 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바깥에서 ‘엠신’ 소리를 들으며 손가락질을 받아도 그냥 참고 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난달(2014년 10월)에 교양제작국이 없어지고, 이번 주(2014년 11월4일)에 PD들이 농군학교 교육발령을 받았습니다. 파업이 끝난 지 벌써 2년이 넘었는데, 이 집요한 복수는 아직도 끝이 나지 않는군요.

공포 영화에서 궁극의 공포는 끝난 줄 알았던 영화가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죽은 줄 알았던 살인마가 살아나는 일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속편으로 돌아오고 막 그럽니다. 그게 가장 큰 공포예요. ‘끝난 줄 알았지? 아직 끝난 게 아니거든?’ 그럴 때마다 관객은 몸서리치며 비명을 지르죠. 그래봤자 영화입니다. 불이 켜지면 간담 한번 쓸어내리고 극장을 나오면 그만이에요. 내가 사랑하는 회사가, 이런 끔찍한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변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을 모르겠습니다.

ⓒ연합뉴스11월8일 김민식 PD(맨 오른쪽) 등 전국언론노조 MBC본부 노조원들이 방송문화진흥회 임시 이사회에 참석하려던 김장겸 MBC 사장(가운데)에게 질문하고 있다.
“MBC를 더 사랑해야겠습니다”  

답이 보이지 않을 때는 질문을 바꿔봅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잘못했을까?’ 이런 질문만 되뇌면 공포 영화의 주인공처럼 내내 쫓기게 돼요.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를 보니 경제학은 이렇게 묻는 학문이랍니다. ‘누가 이득을 보는가?’

질문을 바꿉니다. 이런 발령을 내어서 이득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MBC를 망가뜨려서 이득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무엇보다,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MBC를 박차고 나가면 가장 기뻐할 사람은 누구인가?

자, 다시 답이 보입니다. 무엇을 하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MBC를 포기하는 일입니다. MBC에 대한 믿음을 버리는 일입니다. 회사를 더 사랑해야겠습니다. 내가 더 오래 다닐 거니까요. 그들보다 내가 더 오래 이곳을 지킬 거니까요. 마지막 엔딩은 우리가 먹어야죠. 우리가, ‘죽은 줄 알았지? 짠!’ 하고 나타나야죠. 다시 돌아옵니다. 그때까지 이 악물고 웃으며 버팁니다. 전 요즘, 다시 웃으며 회사를 다닙니다.

3년 전, 이 글을 쓸 때가 생각납니다. 무척 힘든 날이었는데요, 1년 후 2015년 10월 저 역시 회사의 보복성 인사 조치로 송출실로 발령이 납니다. 때려치우고 나갈까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지만 차마 나갈 수 없었어요. 1년 전에 블로그에 올렸던 저 글이 나의 각오가 된 것이지요.

싸움은 하나의 엔딩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김장겸 사장의 퇴진이 끝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예은 아빠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랜 세월 많이 노력해야겠지요.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공영방송 MBC의 재건’이라는 진짜 해피엔딩을 위하여 끝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겠습니다.

기자명 김민식 (MBC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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