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28일 아침 8시, 참여자가 200여 명에 이르는 단체 카카오톡(카톡) 방에 메시지 하나가 올라왔다.

‘☞헌법 개정 국민 대토론회. 퍼 날라 주십시오. 인천으로 모여주십시오. 시간이 촉박합니다. 반성경적, 반기독교적인 동성애·동성결혼, 이슬람의 대량 유입. 독소 조항들로 가득한 개헌은 국민들이 절대적으로 반대. (중략) 연락처:윤○○ 목사/010- ○○○○-○○○○’

이날 오후 인천에서 열리는 헌법 개정 대국민 토론회(개헌 토론회) 참석을 독려하는 내용이었다. 보수 개신교계에서는 헌법 조항에 있는 ‘양성 평등’을 ‘성 평등’으로 변경할 경우 동성혼 합법화로 이어질 수 있다며 개헌을 반대한다. 또 망명권이 신설되면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급격히 유입될 거라고 주장한다.

개헌 토론회가 열린 인천문화예술회관 대강당 160석은 대부분 보수 개신교 단체 회원들이 차지했다. 토론자로 참석한 조선희 인천여성회 회장이 “성 평등으로 변경도 고려해봐야 한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자 청중 사이에서 거센 야유와 함께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고성이 튀어나왔다. 질의응답 시간이 되자 개신교 단체 회원들이 발언을 주도했다. “동성애 합법화 개헌을 반대한다”라는 주장이 반복되자, 사회를 맡은 이주영 자유한국당 의원은 한번 나온 의견은 자제해달라고 당부했다. 토론회가 끝날 때까지 비슷한 발언이 계속되었다.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듣겠다는 개헌 토론회의 취지가 무색해졌다.

ⓒ연합뉴스9월28일 인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헌법 개정 국민 대토론회’에서 개헌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인천은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전국을 돌며 진행한 개헌 토론회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8월부터 부산을 시작으로 광주·대구·청주·제주도 등 11개 시·도에서 개헌 토론회가 열렸다. 지역은 달랐지만 보수 개신교 단체가 토론회를 점거하다시피 하는 상황은 매번 되풀이되었다. 토론회에서 만난 선교사 김다니엘씨(51)는 “앞서 다른 지역에서 열린 개헌 토론회에도 모두 참석했다”라고 말했다. ‘성 평등’ 용어 변경은 개헌 논의에서 비중이 크지 않은 사안이었지만 보수 개신교계에서 조직적인 반대에 나서면서 개헌 토론회를 집어삼키는 주제로 떠올랐다. 개헌특위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한 인사는 “모든 지역에서 보수 개신교 신자가 토론회 참석자 중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라고 밝혔다.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보수 개신교계가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한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성 소수자 이슈가 본격적인 정치 의제로 등장하면서 보수 개신교 세력이 정치권에 전방위 압박을 가한 건 비교적 최근 일이다. 이런 공세는 지자체가 만드는 조례부터, 법률 제정, 인사청문회, 개헌까지 의정활동의 모든 층위에서 벌어진다.

10월19일 충남도청 앞에서 보수 개신교 단체 주최로 충남인권조례 폐지를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인권조례가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이유였다. 이 집회에는 개헌 토론회에서 등장했던 ‘양성 평등 YES, 성 평등 NO’ 피켓이 그대로 사용됐다.

ⓒ연합뉴스10월19일 충남기독교총연합회 등 기독교 단체 회원들이 충남도청 앞에서 충남인권조례 폐지를 촉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문자 폭탄’과 항의 전화로 영향력 행사

국회는 주로 ‘문자 폭탄’과 항의 전화에 시달린다. 군형법 개정안을 발의한 정의당 김종대 의원실은 항의 전화로 한동안 업무가 마비됐다. 김 의원은 지난 5월, 동성 간 합의된 성관계까지 처벌하도록 한 군형법 제92조의 6을 폐지하는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김 의원실의 한 보좌관은 “의원실에 전화기가 4대 있는데 쉴 새 없이 전화가 왔다. 어떻게 알고 전화하셨냐고 물어보면 카톡에서 봤다는 대답이 대부분이었다”라고 말했다. 군형법 개정안에 공동발의자로 이름을 올린 민중당 김종훈·윤종오 의원은 지역구에서 휴대전화 번호가 적힌 전단이 돌기도 했다. 지역 개신교 단체가 제작한 홍보지였다.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임명동의안 표결을 앞두고는 캐스팅보트를 쥔 국민의당 의원들에게도 주로 문자 폭탄이 쏟아졌다. 보수 개신교계는 헌법재판소가 지난해 군형법 제92조의 6에 대해 합헌 결정을 할 당시 김이수 재판관이 위헌 의견을 낸 것을 문제 삼았다. 김 재판관은 ‘해당 조항이 구체적 기준을 규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수 의견을 냈지만 “김이수 후보자가 동성애를 옹호한다”라는 문자가 돌았다. 국민의당 한 의원은 “당시 시간당 문자를 100통가량 받은 것 같다. 문자 예시가 돌았는지 네다섯 가지로 분류되는 유형의 동일한 문자가 계속 왔다”라고 말했다. 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시 문자’를 받기도 했다. “한번은 여기에 반대 의견을 보내라고 안내하는 문자를 받았다. 번호가 쭉 쓰여 있고 보내야 할 내용이 딸려 있었다. 실수로 문자 폭탄을 보내라고 지시하는 문자를 나한테 보낸 것 같았다.”

‘헌법 개정 국민 대토론회’ 참석을 독려하는 문자.
당초 호남 출신인 김이수 후보자 임명동의안에 국민의당 의원 대다수가 찬성표를 던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투표 결과 국민의당 의석 중 절반인 20명가량이 반대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김이수 후보자 인사청문회를 가까이서 지켜본 국회 관계자는 국민의당 의원들에게 쏟아진 동성애 반대 문자 폭탄도 한 원인으로 꼽았다. “6월 인사청문회에서는 군형법 위헌 의견이라든지 동성애 옹호와 관련해 문제 제기가 없었다. 이후 청문보고서 채택이 계속 미뤄졌는데 그사이 전국 순회 개헌 토론회가 있었다. 개헌 토론회를 계기로 보수 개신교계에서 동성애 반대가 뜨거워지면서 김이수 후보자한테까지 불똥이 튄 거다.”

보수 개신교계의 집요하고 대대적인 공세는 실제 의정활동에 영향을 미친다. 김종대 의원실은 군형법 개정안 발의 당시 최소 공동발의 인원인 10명을 채우는 데 애를 먹었다. 당시 실무를 담당했던 한 보좌관은 “보통은 공동발의 해줄 동료 의원 10명을 구하는 게 어렵지 않다. 이번에는 겨우 10명을 채웠다”라고 말했다.

지역구 의원들이 마주하는 압박의 강도는 훨씬 세다. 국회의원 처지에서 대형 교회는 단단하게 조직된 유권자 집단이다.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한 초선 의원은 “부담을 안 느낄 수가 없다. 우리 지역구는 교회 연합 예배에서 기도 제목 중 하나가 ‘동성애 반대’이다. 지역에서 직접 얼굴 맞대고 활동하는 시·구의원 처지도 고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영남권 대도시가 지역구인 한 의원실의 보좌관은 그 동네 대형교회 목사의 설교 방식을 들려줬다. “성 소수자 관련 법안이 걸려 있으면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이번 주에는 (국회에) ○○번 항의해야 하나님 앞에 올바른 신도입니다’ 이런 식으로 숙제를 내주듯 한다.”

대선 토론회에서도 동성애 이슈 활용

정치권이 보수 개신교계의 압박에 수비적인 대응으로 일관하는 건 아니다. 자유한국당은 동성애 이슈를 적극 활용해 새로운 전선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김이수 헌재소장 후보자 낙마 직후 진행된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검증 과정에서 자유한국당은 동성애 이슈를 전면에 부각시켰다. 인사청문회에서 전희경 의원은 김 후보자에게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찬반 의견을 묻는 등 여러 차례 관련 질의를 했다. 이채익 의원은 더 나아가 “성 소수자를 인정하게 되면 동성애뿐 아니라 근친상간 문제나 소아성애, 시체 상간, 수간까지 비화될 것이다. 인간 파탄은 불 보듯 뻔하다”라고 발언했다. 정우택 원내대표는 원내대책회의에서 “김 후보자는 2012년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성 소수자 인권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발제자들이 동성애 차별금지법 제정 등을 요구했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등 국민 법상식과 어긋나는 김명수 후보자의 의식에 심각성을 제기한다”라며 공세를 이어갔다.

ⓒ시사IN 조남진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이 부결되는 데도 보수 개신교계가 영향을 미쳤다는 평이다.
자유한국당은 지난 대선 토론회에서 성 소수자 이슈를 공격적으로 활용했다.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 후보는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군에서 동성애 문제가 굉장히 심하다. 국방 전력을 약화시킨다”라며 의견을 물었고 문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터진 이 발언에 문재인 후보 지지층이 분열되는 양상도 나타났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와 종북몰이의 ‘약발’은 확실히 떨어졌다. 이들 무기에 크게 의존해왔던 자유한국당으로서는 하루빨리 다음 무기를 발굴해야 할 처지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보수 진영이 종북, 주사파처럼 촛불 이전에 주로 쓰던 두려움을 또 동원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개혁 보수의 길을 가는 건 더 어려운 일이다. 두려움의 대상을 설정하고 책임 소재를 그 대상에게 돌리는 게 우리나라 보수가 정치를 하는 방식이다. 새로운 두려움을 설정해야 이 방식이 다시 작동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무기를 잃은 한국 보수는 이제 ‘동성애 반대’와 같은 정체성 이슈가 한국에서도 먹혀들지 시험하고 있다. 미국 공화당은 낙태 반대·동성애 반대와 같은 종교적·문화적 이슈를 즐겨 사용해왔지만, 오바마 정부 들어 동성혼을 인정하는 연방대법원 판결로 결정적인 패퇴를 당했다. 한국 정치는 아직 정체성 이슈로 대규모 동원을 이뤄낸 적이 없다. ‘동성애 반대’가 일부 개신교 세력의 극성맞은 외침으로 그칠지, 길을 잃은 보수의 신무기로 자리 잡을지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기자명 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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