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청년들의 비정상 야근
  • 허은선 (캐리어를끄는소녀 대표)
  • 호수 530
  • 승인 2017.11.16 15: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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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최대한 일찍. 먼저 도착하면 자리 잡아놓기.’ 정시 퇴근을 자신할 수 없는 직장인들의 약속은 늘 이런 식이다. 지난 9월 어느 평일 저녁, 일본 도쿄에서 한 모임도 마찬가지였다. 도쿄의 한 선술집에 약속된 인원이 전부 모이는 데 두 시간 남짓 걸렸다.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의 한 장면.

선술집에서 오간 대화도 한국 직장인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연차를 이미 다 썼는데 남은 석 달은 어떻게 버틸지 걱정이라든가, 지금 다니는 회사가 이른바 ‘철밥통’이지만 평생을 다니기에는 지루할 것 같아 다른 회사에 이력서를 넣는다는 등…. 취기가 오른 그들의 대화를 듣다 보니 2013년 일본 NTV에서 방영된 <단다린 노동기준 감독관>이라는 드라마가 떠올랐다. 후생노동부 파견기관인 노동기준 감독서에서 감독관으로 일하는 단다린(다케우치 유코)의 활약상을 그린 11부작 드라마다. 청년들 등골 빼먹는 기업은 ‘블랙기업’, 직장 내 권력형 폭력은 권력(power)과 괴롭힘(harassment)을 합한 일본식 조어 ‘파워하라’라고 부른다는 것도 이 드라마를 통해서 배웠다. 

테이블 맞은편 20대 남녀는 2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학 동창을 떠올렸다. “걔 너무 불쌍해. 2015년 크리스마스에 사원 기숙사에서 떨어져 죽었지….” 일본 최대 광고회사 덴쓰(電通)에서 하루 20시간 이상을 근무하는 등 과로에 시달리다가 자살한 다카하시 마쓰리 이야기였다. 당시 이 젊은 여성의 죽음은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다카하시 마쓰리의 죽음 이후 정부는 덴쓰의 노동기준법 위반 혐의를 조사했다. 도쿄 노동국은 장시간 노동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과중노동박멸 특별대책반(가토쿠)’까지 투입했다. 일본 친구들도 그녀의 죽음 이후 일본 사회가 많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나는 이들의 대답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그 친구들은 지금도 여전히 야근을 밥 먹듯이 한다. 일본 사회가 느리게 변화하는 사이, 또다시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 3월 도쿄 올림픽 경기장 공사 현장감독으로 일하던 20대 남성이 자살했다. 일본 노동 당국은 장시간 노동으로 발병한 정신질환을 그의 자살 원인으로 보고 산재를 인정했다.

한국과 중국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따르면, 2016년을 기준으로 한국의 취업자 연간 노동시간이 2069시간에 달한다. OECD 평균 1763시간보다 무려 300여 시간 더 일한다. 중국 회사는 무조건 칼퇴근이란 말도 이제 옛말인 것 같다. 항저우 알리바바에서 일하는 친구도 평일 내내 밤 10시 넘어 퇴근한다. 그는 주말에도 회사에 나가 일한다. 2016년 8월8일 상하이에서는 여성 40여 명이 잠옷 차림으로 길거리에 나와 남편의 야근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잠옷 차림으로 남편의 야근 반대 시위를 벌인 중국 여성들

얼마 전 한국에서 개봉된 일본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가 입소문을 타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매일 아침 사무실에서 강제로 맨손체조를 한다. ‘마음은 버려라. 꺾일 마음이 없으면 견딜 수 있다’ ‘유급휴가는 필요 없다. 몸만 둔해진다’ 따위 사훈을 복창한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1950년대 덴쓰 전 사장이 만들었다던 ‘광고맨의 10계명’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자신을 가져라. 자신이 없기 때문에 너의 일은 박력도 끈기도 깊이도 없다.’ ‘머리는 항상 풀회전시켜라.’ 갑자기 죽은 다카하시 마쓰리가 떠올라, 그녀 대신 덴쓰에, 그리고 이 세상에 마구 따지고 싶어졌다. “사람을 좀 쉬게 해줘야 머리가 돌아가고 자신감이 생길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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