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극심한 우울증을 앓다 지난 10월2일 세상을 떠난 고 최진실씨.
한국으로 치면 〈연예가 중계〉쯤 되는 미국 텔레비전 프로그램 ‘ET(Entertain-ment Tonight)’에 희한한 장면이 나온다. 한 연예인이 거리에 나섰는데,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얼굴뿐 아니라 온몸이 완전히 가려져 있다. 그는 커다란 우산을 썼으며, 우산 아래로 긴 장막을 둘러쳐서 외부 시선을 철저히 차단했다. 주변에서 함께 움직이는 보디가드가 그를 안내해서 길을 이끌었다.

 이것은 물론 중무장을 하고 길거리에 진을 친 파파라치 때문이다. 대중의 관심을 끄는 연예인이 있는 곳이면 지옥까지라도 카메라를 들고 따라갈 자세가 되어 있는 이들은 연예인 처지에서 보면 여간 골칫덩이가 아니다. 연예인도 사람인지라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사람도 만나며 살아야 하는데, 도무지 가만히 놔두지를 않는다.

그래서 연예인들은 맑은 날에도 우산을 쓴다. 약물중독 치료소에서 나오던 린제이 로한도 검은 우산을 썼고, 요가를 하러 가던 제시카 비엘도 커다란 골프 우산을 들었다. 철없는 브리트니 스피어스는 우산을 휘둘러 파파라치의 자동차를 패며 화풀이하기도 했다.

수백만원을 웃도는 파파라치의 카메라에 대항하는 수단이 기껏해야 우산 나부랑이라는 것은 좀 슬픈 현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연예인이 연예인인 이상 감당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연예인은 카메라가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 연예인은 다른 직종, 예컨대 국회의원이나 문화부 장관으로 직업을 바꾸지 않는 한, 어쩔 수 없이 언론에 노출되고 세인의 입에 오르내려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대중 스타와 언론은 불편한 공생 관계라 할 수 있다. 

현미경으로 찍어 만화경으로 보여주는 언론

그러나 인기를 먹고사는 스타 자리를 떠나 자연인으로 돌아간 연예인은 어떨까. 혹은 죽음으로 돌아간 연예인은 어떨까.

최진실은 한 새벽에 바람처럼 떠났지만, 산 사람들은 그이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도무지 보내려 하지 않았다. 그이를 보내지 않는 것은 추모의 마음이 아니라 산 사람의 욕심 때문이다. 덕분에 그이는 죽고 나서 더 맹렬히 살았다.

언론의 이상을 간명하게 압축하자면 ‘냉정한 관찰자’가 될 것이다. 최진실이 40년 살아온 세상을 떠나는 과정을 보도하는 언론은 냉정하지도 않았고 관찰자에 머무르지도 않았다. 언론은 누구보다 먼저, 누구보다 지나치게 흥분했다. 빈소를, 장례식장을, 마지막 떠나는 순간까지를 어지럽히는 언론은 이미 관찰자라고 하기 어렵다.

파파라치의 장비가 값비싼 것은, 멀리서 연예인의 콧털까지 잡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최진실의 죽음에서 콧털을 잡아내려는 시도를 놓고 파파라치와의 차이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파파라치도 나름 고생을 한다. 잠복도 하고 날밤도 샌다. 그러나 그러한 노고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언론인으로 존경을 받지 못한다. 노고가 오로지 상업적 목적만을 위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최진실이 떠나는 과정에 극단적인 현미경을 들이댄 일부 언론은 그 결과를 만화경처럼 보여주었다. 국민의 사랑을 받던 연예인이니 언론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를 넘어서, 한 개인의 불행을 흥행거리로 만드는 언론의 모습에서는 상업성밖에 읽히지 않는다. 이들은 입으로는 추모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파파라치의 진면목을 그대로 드러낸 셈이다.

연예인도 사람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점을 기억한다면, ‘화장장 생중계’는 나올 수 없다. 연예인도 가족이 있고 친지가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본질은 제쳐놓고 흥밋거리로 가득 채운 ‘최진실 특집’ 기사 뭉치 따위는 나올 수 없다. 공인인 연예인은 카메라를 달게 받아야 하지만, 죽어서까지 그럴 의무는 없다. 이것은 의무와 권리 이전에, 죽음에 대한 예의, 인간에 대한 예의의 문제이다.

기자명 허광준 (위스콘신 대학 신문방송학 박사과정)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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