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렵 전국의 논은 텅 비어간다. 봄에 논갈이로 시작해서 가을에 수확한 벼를 말리기까지, 200여 일에 걸친 고단한 노동이 쉼표를 찍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 시대 농사꾼에게 수확의 기쁨 따위는 없다. 곧 전국의 농사꾼들이 거리로 나설 때가 온다. 애써 수확한 쌀을 길바닥에 부리며 올해도 어김없이 ‘아스팔트 농사’를 지을 것이다. 올해 쌀 수매가가 예년보다 올랐다는 소식이 들리지만 농민들에게는 부족하다. 사람들은 농민이 징징대면 정부가 달랜다며 눈살을 찌푸린다.

우리 민족에게 생명줄이나 다름없던 쌀은 이제 천덕꾸러기다. 언론에서는 쌀의 영양을 강조하는 공익광고가 이어지지만, 정부는 남아도는 쌀을 어쩌지 못해 골머리를 앓는다. 한편으로는 사라진 우리 토종 벼를 복원해 농업에 접목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우리에게 쌀과 농민은 무엇이었고, 또 무엇이 되어가고 있을까.

한 사내가 아직 추수 전인 논에 섰다.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김태호 교수다. 언뜻 농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그는 우리 쌀의 역사를 붙들고 있는 젊은 학자다. 한국과학기술사를 전공한 그는 2009년 통일벼의 개발 과정과 쌀 증산운동에 관한 박사 논문을 썼고, 이후 8년 동안 이 주제를 가다듬어 올봄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라는 책을 펴냈다.

ⓒ김흥구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가 누렇게 익은 벼 사이에 서 있다.

주석과 참고문헌 일람만 53쪽에 달하는 묵직한 저작인데도 책은 입소문을 탔다. 이유는 간단했다. 과학기술 영역에서 근대 이후 우리 쌀의 역사를 다룬 책은 이 책이 유일하다. 게다가 상당히 재미있다. 일제강점기부터 2000년대까지, 우리 쌀의 운명이 어떻게 사회 현실과 맞물려 흘러왔는지 생생하게 드러낸다. ‘벼를 사료 삼아 쓴 한국 현대사’라는 평가가 손색이 없다.

예컨대 1970년대 통일벼 도입을 둘러싼 논란을 설명한 대목을 보자. “농촌진흥청 간부들은 1971년 2월5일 박정희를 포함한 정부 각료와 경제계 인사 39명이 참석한 가운데 통일쌀 밥의 시식회를 열었다. 대통령이 참석한 시식회였음에도 맛이 ‘좋다’는 28%, ‘보통이다’가 67%, ‘나쁘다’도 5%였다. 하지만 박정희는 맛이 ‘좋다’에 기표한 뒤 무기명으로 진행되었던 시식 설문지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이렇듯 쌀은 과거 정부가 사활을 걸고 움켜쥐려 했던 존재였다. 지금은 ‘사라진 퇴물’ 취급을 받는 통일벼는 맛이 떨어진다는 약점을 극복하고 쌀 생산량을 크게 늘려 ‘기적의 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농민들은 반강제로 통일벼를 재배해야 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한국 농업의 발목을 잡았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 한국 농업을 이야기하면 공허하다는 게 김태호 교수의 생각이다. 인터뷰 내내 김 교수의 말에는 우리 농업과 농민에 대한 신중함과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왜 쌀을 연구하게 됐는가?

나는 ‘과학사학자’다. 한국과학사가 최근 많이 팽창했음에도 질문은 편향되어 있었다. 우리가 어떻게 잘살게 됐을까, 삼성과 현대는 어떻게 성공했을까. 이런 질문만 던진다. 그 과정에서 양보하고 희생한 건 뭘까, 라는 질문은 부족했다. 나는 농업과 기능올림픽을 떠올렸다. 지금이야 지방 뉴스에나 가끔 나오는 이야기지만, 과거에는 달랐다. 쌀 생산량이 얼마나 늘었는지, 기능올림픽에서 누가 어떤 메달을 땄는지가 중요한 이슈였다. 과거 한국 농업의 상징이 통일벼였다. 관련 연구가 과학사 쪽에서는 물론이고 국사학계에도 없더라.

지금 우리는 통일벼를 획일화의 상징이자, 우리 쌀 문화를 망친 주범이라고 이야기한다.

통일벼는 대단히 효과적으로 농민을 장악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정부 주도로 개발에 성공한 만큼 정부 지침을 따르지 않으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품종이었다. 못자리 만들기부터 거름 주는 시기까지 정부가 지침을 내렸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오늘날까지 이야기되는 많은 문제가 이때 태동했다.

통일벼가 우리 농업에 끼친 영향이 무엇인가?

예컨대 추곡수매제(정부가 매년 농가로부터 정해진 가격에 쌀을 사들이는 제도로 2005년 폐지되었다) 같은 정책에 대한 농민들의 인식이 생겨났다. 당시 통일벼 보급을 위해 정부가 고미가 정책을 추진하면서 농민들은 ‘쌀은 국가가 책임져준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양파 파동이나 고구마 파동 때는 국가가 쌀만큼 책임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농민을 비난할 수는 없다. 다른 길을 막아놓고 쌀농사에 매달리는 구조를 만들어낸 건 국가다. 추곡수매든, 직불금이든, 휴경보상이든 농민이 의존하는 구조를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왜 이렇게 농민이 의존적이냐고 비판하는 건 공정하지 않은 것 같다.

통일벼가 없었다면 우리 쌀의 현실이 좀 달라졌을까?

통일벼에게 그런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통일벼는 당시 역사적 소임을 했을 뿐이다. 이미 일제강점기에 품종개량이라는 명목 아래 1451종에 달했던 우리 토종 벼가 사라졌다. 일제의 책임일까? 당시 쌀 생산량 증대를 위한 품종개량은 근대국가가 응당 해야 할 과업이었다. 한반도뿐 아니라 일본 본토와 일본 식민지인 동남아시아에서도 이루어졌다. 오히려 인구로 보면 동남아시아의 인디카종 쌀을 개량하는 게 우선이었다.

해방 이후 냉전 시기에 미국이 벼농사 연구기관을 설립했고, 그것이 통일벼 개발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미국 록펠러재단과 포드재단이 1960년 필리핀에 국제미작연구소(IRRI)를 세웠다. 식량난을 염려하는 선한 동기와 공산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미국이 추진했던 ‘녹색혁명’은 사실 ‘적색혁명’을 막아내는 방파제였다. 미국은 쌀 생산량을 늘려야 아시아가 공산화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농민이 배가 불러야 마오쩌둥의 선동에 넘어가지 않으리라고 봤다. 통일벼를 개발한 허문회 박사가 실제 연구를 수행한 곳이 바로 국제미작연구소였다. 열대형인 인디카와 온대형인 자포니카 쌀을 교배해 통일벼(IR667)를 만들어냈다.

ⓒ김흥구서울 종로구 보안여관에서 ‘먹는 게 예술이다. 쌀’ 전시가 11월4일까지 열렸다.
사라진 토종 벼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 쌀의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했던 순간은 언제였나?

1977년 통일벼가 세계 최고 수준의 수확량을 기록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쌀 자급’을 선언한 때다. 그해 14년 만에 쌀막걸리 제조 금지가 풀렸다. 박정희는 녹색혁명이 절정에 달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실제로 농가에서는 통일벼 생산 목표를 설정해 강제로 각서를 쓰게 하고, 거부하면 영농자금 지원을 끊는 일이 빈번했다. 겨우 1년 뒤인 1978년 ‘노풍 파동’이 터진다. 새로 개발한 통일벼 신품종 ‘노풍’의 66%가 도열병에 감염되고 말았다. 부실한 사전 대책과 무리한 재배가 낳은 결과였다. 유신 정권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벌어진 이 사건으로 농민도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후 통일벼 재배 면적은 점점 줄어들었다.

문제는 이후 한국 농업이 별다른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소농 중심의 농업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국 소농 중심 구조가 문제라는 이야기는 이미 1960년대에도 나왔다. 규모가 작아서 농기계가 못 들어가니 문제라는 식이었다.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온 이들이 이런 주장을 펼쳤다. 중요한 게 있다. 이런 소농 구조가 유지되어온 이유는 딱 하나다. 우리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다. 농사지을 땅은 농사꾼만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토지개혁에 맞서 대한민국이 생길 때 맺은 사회계약이다. 이런 사회계약을 깨자고 말하지는 못하면서, 구렁이 담 넘어가듯 농업 구조를 바꾸자고? 그건 역사를 보지 않으려는 것이다.

요즘 토종 벼에 대한 관심이 높다. 토종 벼를 복원하려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다.

사투리 수집에 비할 수 있겠다. 국가가 사투리를 권장하지는 않지만, 연구 영역에서는 높은 가치가 있다. 그런데 토종 벼 연구가 꼭 정부 주도 품종 개량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다. 농촌진흥청이나 다국적 자본도 토종 벼를 연구한다. 우리가 많이 먹는 흑미도 일본이 토종 벼를 연구하다가 개발했다. 일본에선 흑미를 ‘고대미’라는 이름으로 마케팅했다.

과학사학자로서 직시하는 우리 농업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국가와 농민의 관계가 너무 일방적이다. 그동안 늘 국가가 ‘하우스 지어라’ ‘닭 쳐라’ ‘통일벼 심어라’ 명령만 했다. 요즘 정부는 ‘스마트팜’을 하라고 권한다. 읍내에서 커피 마시면서 스마트폰 앱으로 비닐하우스를 관리하라는 건데, 그런 설비를 갖추려면 보통 5억원 정도 든다. 다 빚이다. 농업과학의 역사에서 농민은 아무런 지분이 없었다. 그나마 유의미한 틈새를 만들어낸 곳이 한살림 같은 유기농 운동 단체였다. 1980년대 이후 화학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으면서도 우렁이농법과 쌀뜨물발효액(EM)을 이용해 성과를 보여줬다. 일종의 대항담론을 만들어냈다.

우리 쌀과 농업에 미래가 있을까?

나는 농촌 문제의 큰 책임이 도시에 있다고 본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책임을 나눠야 할지 이야기해야 한다. 살충제 달걀 파동에서 봤지만, 더 안전한 먹을거리를 달라고 요구만 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지금 우리 농촌에도 척박한 현실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함께해야 한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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