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에 놓였거나 벽에 걸린 달력을 들춰보라. 달력 대부분에 2017년 ‘12월20일’은 빨간 날, 대통령 선거일로 표시되어 있다. 이듬해 달력이 인쇄되던 지난해 하반기까지도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지금과 같은 1년 뒤를 상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또 쉽게 상상할 수 없다. 지난겨울 촛불이 없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촛불 1주년을 맞이해 ‘촛불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지내고 있을 ‘디스토피아’를 그려봤다. 촛불이 없었다면 박근혜·최순실의 국정 농단을 끝까지 파헤치기 힘들었을 터이다. 최순실씨는 여전히 청와대 문건을 받아 빨간 줄을 긋고 청와대를 제 집처럼 들락거리고 있을 것이다. 정유라씨도 이화여대 재학생으로 삼성이 제공한 말을 타고 한창 도쿄 올림픽을 준비했을 것이다.

역사·교육·문화 부문에서도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을 것이다. 올해 국정 역사 교과서가 학교 현장에 보급되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서울 광화문광장에는 박정희 동상이 건립됐을 수도 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따라 온통 ‘우편향’ 콘텐츠가 텔레비전·서점·영화관을 점령했을 것이다.

‘만약 이런 세상이라면 우리는 어떤 기사를 쓰고 있을까’를 상상하며 창간 이래 처음으로 허구를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다만 ‘사실 기반’ 허구이다. 실제로 그런 징조가 있었고 자칫하면 일어날 수 있었던 일들을 소재로 삼았다. 디스토피아를 그려보니 ‘촛불’의 위대함을 더 깨달을 수 있었다. 촛불이 있었기에 디스토피아가 현실이 되지 않았다. 세상이 바뀌고 오늘이 변했다. 모두, 입김 서리던 지난 겨울날 꽁꽁 언 손으로 희망을 밝힌 ‘촛불 시민’ 덕분이다.

〈편집자 주〉

 

 

 

 

 

 

10월21일 폐막한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관객은 10만명도 되지 않았다. 예상된 결과였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관객 수는 16만명으로, 2015년(23만명)에 비해 30% 줄었다. 영화인들의 보이콧으로 관심도가 떨어져서다. 배우들과 감독들은 10월12일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는 대신 기자회견을 열어 박근혜 정권의 조직적 영화제 탄압을 규탄했다. 자타 공인 아시아 최대 영화제였던 부산국제영화제는 이제 정권도 영화인도 반기지 않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연합뉴스올해 10월에 열린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애국이나 안보를 강조한 영화들이 다수 제작에 들어갔다. 〈국제시장〉의 후속편 〈자갈치시장〉이 2020년 개봉을 목표로 캐스팅을 완료했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국제시장〉에 이어 〈자갈치시장〉은 1997년이 배경이다. 〈국제시장〉 주인공의 자녀들은 외환위기를 마주한다. 사치를 줄이고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해 국난을 극복하고 가족적 가치를 회복한다는 내용이다.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에서 50억원 규모의 ‘가족영화 제작지원 사업’을 신설하면서 제작비 혜택을 받았다. 파격적인 내용으로 제작 단계부터 화제를 모은 영화 〈고독한 결단〉(가제)도 거액의 제작비를 확보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모델로 한 작중 대통령이 비밀리에 핵 개발을 추진한다는 내용이다. 지난해 〈인천상륙작전〉에 투자한 회사 다수가 〈고독한 결단〉에도 투자금을 부었다. MBC 〈뉴스데스크〉는 북한 핵실험 특집 방송 말미에 이 영화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를 다뤘다.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출판 분야에서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는 기존 방침을 재확인했다. 지난 7월 발표된 세종도서(옛 문체부 우수학술도서) 목록이 일례다. 세종도서는 문체부 산하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해마다 선정하는 우수도서다. 정부는 선정된 책을 1000만원어치 이내로 사서 전국 공공도서관에 비치한다. 2017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부문에는 평단과 시장의 반응이 좋은 책들이 대거 빠졌다. 지난해 맨부커상을 받은 작가 한강의 책은 올해도 선정되지 않았다. 5·18 민주화운동을 다뤘기에 배제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세월호 참사를 다룬 책들은 2015년부터 꾸준히 쏟아져 나왔지만 올해도 세종도서 목록에 들지는 못했다.

 

ⓒ시사IN 이명익작가 한강씨

10월 마지막 주 연예계에는 마약 스캔들이 번졌다. SNS에는 “강남 모 병원에 가수 ○○○, 배우 △△△ 등이 우유 주사를 맞으러 왔다고 함” 따위의 ‘증권가 지라시’가 급속도로 유포됐다. 실명이 언급된 일부 연예인은 검찰 조사도 받았다. 11월 열리는 민중총궐기에 참여 의사를 밝힌 배우 ㄱ씨도 그중 하나였다. 조사 결과 그는 무혐의로 밝혀졌으나, 관련 기사에는 어김없이 ‘좌파 약쟁이’라는 비방 댓글이 달렸다. 그는 출연하고 있던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다. 온라인 커뮤니티 일각에서 “정부가 연예인 정치 참여를 탄압하기 위해 마약 사건을 조작했다”라는 주장이 나왔으나, 대다수 사람들은 음모론으로 치부하고 있다. 10월31일 이철성 경찰청장은 “악의를 갖고 의도적·반복적으로 가짜 뉴스를 유통하는 행위는 내사 대상이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11월 민중총궐기 집회에 전담 대책팀을 꾸려 강경 대응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박근혜표 한류 정책은 ‘기승전-송중기’

임기 말 박근혜 정부가 가장 집중하고 있는 문화 정책은 한류 수출이다. 이란 테헤란에 세워질 ‘K타워’가 대표적이다. K타워는 지난해 5월 박근혜 대통령 순방 이후 추진된 프로젝트로, 한국 드라마 상영관·태권도장·한국어학당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순방 직후 발표보다 건립이 늦어지는 데 대해 청와대는 “공사비 조달 문제로 조금 미뤄질 뿐 차질 없이 진행 중이다”라고 밝혔다. 국내에는 최근 완공된 K컬처밸리·K익스피리언스·K스타일허브 등이 막대한 예산을 지원받아 한류 산업을 담당하고 있다. K스타일허브에는 드라마 〈태양의 후예〉 주연 배우 송중기씨의 입간판이 있다. K스타일허브를 기획한 차은택 문화창조융합벨트 본부장은 “〈태양의 후예〉는 대통령이 직접 치하한 드라마다. 연말에는 송중기씨의 실물 크기 홀로그램도 들여놓을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송중기씨는 올해 초 역대 최연소로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연합뉴스2016년 4월11일 박근혜 당시 대통령과 배우 송중기씨(왼쪽)가 서울 한식문화관 개관식에 참석했다.


※실제로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관객은 19만명으로, 지난해보다 20%가량 늘었다. 지난해에 이어 봉준호·박찬욱 등 감독들이 불참했으나 배우들은 다수 영화제를 찾았다. 10월15일 현직 대통령 최초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부산국제영화제의 과거 위상을 회복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정부가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는다’라는 원칙을 천명했다.

총사업비 50억원 규모의 가족영화 제작지원 사업은 영화판을 흔들기 위한 박근혜 정부의 전략이었다. 2014년 “〈국제시장〉 같은 건전한 애국영화 제작을 독려해야 한다”라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 지시에 따랐다. 정부 예산으로 우파 영화를 만들겠다는 박근혜 정부의 계획은 국정 농단 사건이 드러나면서 어그러졌다. 지난 6월22일 영진위는 2018년부터 가족영화 제작지원 사업을 폐지한다고 밝혔다. 〈자갈치시장〉과 〈고독한 결단〉은 허구의 작품이다.

소설가 한강씨의 〈소년이 온다〉는 실제로 세종도서 선정 과정에서 검열을 받았다. “책에 줄을 쳐가며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을 검사했다”라는 한국출판문화진흥원 관계자 발언이 보도됐다. 한 심사위원은 내부 심사평에 “도서의 사상적 편향성에 대해 검토하였음”이라고 쓰기도 했다. 올해 발표된 상반기 세종도서 목록은 종전과 판이했다. 세월호 민간 잠수사를 다룬 〈거짓말이다〉, 작곡가 윤이상 선생을 다룬 〈윤이상 평전〉, 공지영씨의 〈시인의 밥상〉 등이 선정됐다. 한국출판문화진흥원은 블랙리스트와 같은 검열을 차단하기 위해 처음으로 심사위원들의 심사평·회의록을 공개했다.

국정원의 연예인 프로포폴 투약설 전파는 이명박 정부 때의 일이다. 국정원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 조사 결과 원세훈 전 원장 시절 국정원이 심리전단을 동원해 연예인들의 마약 소문을 인터넷에 유포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정원이 분류한 ‘좌파 연예인’들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 위해서다. 2012년 전후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사실 여부가 불분명한 ‘연예인 마약설’이 돌곤 했다. 이철성 청장은 실제로 지난 2월 ‘가짜 뉴스’에 대해 수사 의지를 밝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이란 K타워는 무산됐다. 미르재단이 사업 주체였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자금으로 건물을 짓고, 최순실 일가가 입점 업체를 선정한다는 계획이 드러났다. 10월13일 국토교통위 국정감사에서는 “MOU 체결 사실을 현지 담당자가 몰랐다. 대통령 순방 성과를 과장하기 위한 대국민 사기다”라는 주장도 나왔다. K컬처밸리, K익스피리언스 등 박근혜 정부의 문화창조융합벨트 사업 예산은 내년 절반 가까이 줄어든다. 문체부는 이들 사업 운영을 추진 중인 기업에 전부 일임하기로 했다. 최순실·차은택씨 등이 총괄한 문화창조융합본부는 지난 3월 폐지됐다. 지난해 6월 박근혜 전 대통령은 안종범 경제수석에게 “송중기 입간판을 K스타일허브에 만들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옥관문화훈장은 수여한 바 없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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