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의 촛불집회가 의회의 대통령 탄핵안 의결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한국 현대사에도 손에 꼽힐 드라마였다. 촛불 1주년을 맞이해 〈시사IN〉은 우상호 의원을 만났다. 박근혜 게이트가 불거지기 시작한 지난해 8월께부터 12월9일 국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까지, 숨 가쁘게 달려갔던 시절의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였다.

이 인터뷰는 탄핵 드라마의 한 주인공이 내놓은 ‘주관적 재구성’이다. 정치적 편향이나 자신에 유리한 해석이 섞였을 수 있다. 그래도 가감 없이 기록했다. 탄핵을 주도한 여러 주인공들의 주관이 기록으로 축적될수록, 우리는 일련의 과정을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탄핵 과정을 주도했던 제1야당 원내대표만큼 깊은 몰입과 강한 주관을 보여줄, 기록의 축적을 시작해줄 적임자는 없다. 인터뷰는 10월25일 국회에서 90분 동안 진행했다.

ⓒ시사IN 신선영우상호 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학생운동을 할 당시 6월항쟁의 한가운데 있었고, 국회의원이 되어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다.


탄핵으로 가는 길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2016년 4월 총선에서 우리가 이기고, 7월쯤부터 최순실 관련 제보들이 들어왔다. 8월 중순에 비공개로 최순실 TF를 꾸렸다. 조응천·손혜원·도종환 의원 등이 멤버였다. 각자 제보받은 걸 모아서 전체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서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해임건의안 전선을 쳤다. 국정감사 전에 여야 대치를 확 끌어올릴 목적으로 던진 카드다. 그때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김재수를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묻기도 했다. 야권 공조 와중에도 최순실 건만은 우리가 공유를 안 했으니까, 나는 “그런 게 있어요”라고 얼버무렸다.

당시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국감을 파행으로 끌고 갔다.

비공개 TF의 활약으로 매일같이 1면에 최순실이 등장했다. 청와대가 확 긴장했다. ‘국감 파행시켜라’는 오더가 와서 이정현 대표는 단식하고 정진석 원내대표는 국회의장과 싸우고 그랬다. 우리가 의도를 알잖나. 단독 국감을 밀어붙였다. 정세균 국회의장에게는 미리 보고했다. 우리의 다음 스텝을 알기 때문에 의장이 버텨주었다. 단독 국감에서 황당한 사건이 계속 나왔다. 결국 청와대가 새누리당을 다시 국회에 들어가라고 시킨다. 아주 우왕좌왕했다. 그게 3주일쯤 굴러가면서 상황이 최고조에 올랐을 때 JTBC의 태블릿 PC 보도가 나왔다.

그때부터 탄핵을 준비했나?

촛불집회가 시작되면서 당의 노선을 정할 필요가 있었다. 전략을 총 3단계로 짰다. 1단계, 대통령 2선 후퇴를 요구한다. 바로 탄핵으로 내달릴 수는 없었다. 진보-보수 진영 대결로 가면 ‘50대50’ 싸움이다. 결국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키려면 새누리당에서 40석이 넘어와야 하는데, 처음부터 진영 대결이었으면 비박계가 오겠나. 진영 대결 인상을 주지 않도록 대선 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 측에도 물러서 있는 게 좋겠다고 전했고, 당시 문 전 대표 쪽도 납득했다. 보수도 우리 주장에 동조할 절충안으로 접근하는 게 핵심 기조였다.

10월부터 새누리당 비박계에 공을 들였나?

아니다. 그때는 계속 청와대를 만났다. 대통령이 직접 약속하는 2선 후퇴라면 우리도 받는다고 했다. 그러자 대통령이 국회에 와서 “국회 추천 총리가 내각을 통할하도록 하겠다”라고 하나 마나 한 말을 했다(11월8일). 정진석 원내대표를 만나서 “이런 말로는 절대 안 되니 전권을 넘긴다는 확실한 말을 해야 한다”라고 했다. 청와대가 그게 그 뜻이라고 한다고 했다. 말이 되나(웃음). 이건 결국 탄핵으로 간다는 생각에 그 시점부터 비박계를 접촉했다.


당시 비박계의 기류는 어땠나?

바로 탄핵으로 가는 것은 부담스러워했다. 자진 사퇴를 권유해보겠다고 하더라. 좋다, 그러면 우리는 탄핵 얘기는 안 하고 “하야하라”로 간다고 했다. 이게 우리 입장에서는 2단계였다. 일단 비박계가 움직일 공간을 열어줬다. 이 국면에서 새누리당 원로들이 내놓은 안이 ‘4월 사퇴, 6월 대선’이다. 이건 정치 일정이 명확하고 예측 가능해지는 장점이 있다. 이 안을 대통령이 받으면 우리도 받는다고 비박계에 전했다. 촛불 민심에 욕을 먹더라도 설득할 각오였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는 타협 가능한 장면을 전부 놓치면서 상황을 최악으로 끌고 갔다.

만약 사태 초기에 2선 퇴진 요구를 받아들였다면, 첫째, 야권이 분열된다. 둘째, 제도권은 거국 내각을 꾸릴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촛불과 야당이 분열된다. 촛불이 과격해질 것이고, 중도층과 보수층이 이탈할 것이다. 촛불이 고립될 때쯤 자기 지지 세력을 결집해서 되치기를 노릴 수도 있다고 봤다. 그러면 우리가 불리했을 거다. 특히 온건하게 가는 전략을 세웠던 우상호는 굉장히 불리해진다. 박근혜라면 그런 승부수도 던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안 하더라. 알고 봤더니 마지막까지 이탈 표가 25명 선이라서 탄핵소추안 국회 통과가 어렵다고 엉터리 보고를 받고 있었다. 국회에서 벌어지는 일인데도 새누리당보다 국정원이나 우병우 라인의 보고서를 더 신뢰했던 것 같다.

결국 조기 퇴진 안도 없던 일이 되었다.

그다음은 3단계, 탄핵 당론 확정이다. 거기서부터 12월9일(탄핵소추안 상정일)까지는 다른 길은 없고 다만 새누리당 이탈 표가 얼마나 되느냐 숫자 싸움이었다.

 

11월29일 박 대통령이 “퇴진 시점을 국회가 정해달라”라고 공을 넘겼다. 비박계가 흔들렸나?

꽤 흔들렸다. 하루에도 몇 명씩 나갔다 들어갔다 나갔다 들어갔다…. 우리가 매일 표를 세보는데 아무리 해도 안정적인 숫자가 안 나왔다. 비박계 모임이 40명에서 25명까지 왔다 갔다 하는데, 피가 바짝바짝 말랐다. 그 고비에서 촛불집회가 아주 큰 힘이 되었다.

당시 광장에서는 비박계가 결국 막판에 탄핵 반대로 돌아서리라는 걱정이 많았다.

촛불 시민들도 정작 촛불이 정치권에 어느 정도나 압박이 되는지 실감하지 못했다. 시민들 상상 이상이다. 헌정 중단이 올 수 있고, 유혈 사태나 엄청난 국가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새누리당 의원도 당연히 고민을 한다. 또 하나, 일단 탄핵소추안에 찬성한 새누리당 의원들은 우리보다 더 열심히 탄핵 운동을 한다. 탄핵소추안이 부결되는 날에는 박 대통령이 반드시 보복할 테니, 이 사람들은 돌아서려야 돌아설 수가 없다.

마지막 일주일의 격동을 짚어보자. 비박계가 12월7일까지 대통령에게 4월 조기퇴진을 선언하라는 최후통첩을 하고 야 3당에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때 야 3당이 12월2일 탄핵소추안 상정을 시도했다가 불발됐다. 만약 12월2일에 상정했으면 가결됐을까?

그때 우리 계산으로는 진짜 한두 표 차이였다. 12월2일 상정으로 가자고 정한 건 원내대표 협의가 아니라 당 대표 협의였다. 추미애 대표는 국민을 하루라도 더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고 2일을 강하게 얘기했다. 국민의당은 박지원 원내대표가 비상대책위원장도 겸하고 있어서 대표 협의에도 나갔는데, 박 대표 판단은 비박계가 12월7일까지 기다려달라는데 2일이면 위험하다는 거였고.

 

ⓒ시사IN 조남진지난해 12월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가결되자 국회 앞에 집결해 있던 시민들이 기뻐하고 있다.


한두 표 차이였다면 박지원 대표 얘기가 맞는 말 아닌가?

박지원 대표가 추 대표랑 싸우고 화가 나서 나한테 전화를 했다. “야, 너도 알잖아. 2일로 하면 비박계 상당수가 못 들어오잖아.” 틀린 말이 아니지 사실(웃음). 표를 세는 처지에서 12월2일은 아슬아슬했다. 다만 박 대표는 광장의 여론도 고려했어야 하는데 그걸 하지 않고 ‘너무 현실적인 판단’을 한 거지.

그런데도 추 대표는 12월2일 강행을 주장했다.

12월2일 상정안이 나오면서 비박계 분위기가 나빠졌다. “우리 표 필요 없냐. 왜 이렇게 궁지로 모느냐.” 내가 던진 물밑 메시지는 이랬다. “말은 저렇게 해도 어차피 12월2일 상정은 못한다. 결국 12월9일로 간다.” 일단 올리고, 표에 확신이 없으면 미루면 되니까. 국민의당이, 밖에서 나온 말처럼 탄핵소추안 통과를 훼방 놓으려 한 건 아니었고, 그날 대표들 사이에 언쟁이 좀 심했다. 꼼꼼하게 전략을 세우는 자리도 아니었고. 12월2일이냐 9일이냐는 전략적 견해차라기보다, 누가 탄핵을 주도하는 세력인지를 놓고 벌인 두 분의 주도권 다툼이었다. 그 결과로 박지원 대표가 욕을 좀 과하게 먹었다.

박지원 대표는 “탄핵 국면을 개헌 국면으로 바꾸려는 것 아니냐”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그것도 과잉 해석이었다. 박지원 대표가 개헌에 관심이 있지만, 그렇다고 민심을 모르는 분이 아니다. 물론 박근혜 청와대가 개헌 카드로 야권을 흔들려고 시도한 건 맞다. 민주당 안에서도 어차피 탄핵이 안 될 거라면 개헌을 받고 타협하자는 중진 의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대세를 바꿀 가능성은 없었다.

최후의 순간에 박 대통령이 ‘4월 퇴진안’을 받았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

우선 절대 받을 리가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탄핵이 되지 않을 거라고 대통령이 오판하고 있었으니까. 만에 하나 받는다고 해도 탄핵소추안 상정은 할 생각이었다. 거기서 부결된다 해도 조기 퇴진은 확보한 상황이니까.

12월2일 상정이 불발되고 12월3일 촛불집회에 232만명이 나왔다.

너무 감사해서 큰절을 하고 싶더라. 비박계를 한 명 한 명 끌어내는 일이 원내 작업만으로는 너무 어려웠다. 청와대, 국정원, 여당 지도부가 전방위로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누구누구 표 확보했다고 청와대에 계속 보고가 올라가고. 그럴 때 그 촛불은 결정타였다. 그날 이후로 표 계산에 여유가 생겼다.

우상호 원내대표를 향한 촛불의 감정도 좋지는 않았다.

문자 메시지 폭탄도 어마어마하게 받았다. 그런데 그건 또 묘하게 도움이 됐다. 정진석 원내대표나 비박계가 나랑 있을 때 문자 폭탄 한탄을 하면 “그거 나도 받았어” 이러면서 막 보여주고. 그러면 또 이게 동질감이 생긴다. ‘우리 기다리느라 얘도 고생하네’ 뭐 이런(웃음). 인터넷 기사의 댓글은 뭐 당연히 험악했다.

서운했나?

전혀. 내가 광장에 서 있어도 그렇게 말했을 거다. 1987년 6월항쟁 때 나도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 같은 제도권 정치인들에게 불만이 많았다. 광장은 빠르게 끓고 제도권은 느리다. 하지만 둘은 같이 가야 한다. 제도권이 손을 빼면 투쟁은 결국 무위로 간다. 6월항쟁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만약 광장의 정서를 잘 모르는 원내대표였다면 오히려 그 에너지에 놀라서 같은 속도로, 강경·선명 노선으로 달렸을지 모른다. 그랬으면 그 개인은 영웅이 되겠지만 새누리당 분열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다.

 

 

ⓒ연합뉴스지난해 12월9일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오른쪽)와 우상호 당시 원내대표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두고 국회에서 열린 비상 의원총회에서 논의를 하고 있다.

탄핵소추안 의결 당일은 어땠나?

아침 회의에서 최종 상황 보고를 했다. “222표에서 226표 사이입니다.” 220표 아래로 내려갈 일은 없었다. 234표가 나오는 걸 보고, 이건 민심의 압박을 못 이긴 새누리당 의원이 추가로 더 나왔구나 싶더라. 주변부 친박계까지도 일부 넘어와야 나오는 숫자였다. 표 계산으로는 여유가 있었는데도, 혹시 부결되면 어떡하지, 그 중압감은 말도 못할 정도였다. 일어나서 세월호 가족에게 손을 흔들고 나오는데 다리가 휘청휘청했다.

표는 어떻게 세는 건가? 새누리당 의원들이 자기 투표 의사를 와서 밝히진 않을 텐데.

영업 비밀인데(웃음). 첫째, 직접이든 간접이든 언론에 뜻을 공개하는 분들은 거의 확실하다. 이분들은 ‘동그라미’에서 절대 안 흔들린다. 둘째, 비박계에서 탄핵소추안에 적극적인 사람들한테 개별로 접촉해서 묻는다. 당신 말고 또 누구냐. 그렇게 추가로 ‘동그라미’를 찾는다. 비박계 탄핵파들은 탄핵에 실패하면 자기들은 죽는다고 생각해서 우리보다 더 열심히 만나고 다녔다. 그들을 통해서 내가 파악할 수 없는 명단을 확보한다. 그런데 이름은 절대 얘기 안 해준다. “두 표 더 왔어.” 여기까지만 말해준다. 그러면 또 우리는 우리 정보에 있는 사람들을 떠본다. “수도권 재선이랑 충남, 맞지?” 셋째, 거의 맞겠다 싶은 의원은 직접 접촉해서 확인한다. 그러면 비밀로 해달라면서 확인해준다. 또 동그라미. 그런 식으로 조그만 정보 조각이라도 긁어모아서 쭉 얼개를 맞춰간다. 국회의원 표 세기가 얼마나 어렵냐면, 자기 당 의원들끼리 하는 원내대표 선거에서 자기 찍어줄 표도 항상 틀리게 센다(웃음).

1987년 6월항쟁과 2016년 촛불집회는 어떻게 달랐나?

그때는 20대고 워낙 경황이 없었다. 한열이(이한열 열사)가 병원에 있어서 울면서 다닌 기억밖에 안 난다. 이번에는 목표를 세우고 전략을 쭉 짜서, 그 전략대로 와서 성과를 냈으니까. 그때는 죽을 수도 있다는 거였다. 항상 광주가 떠오르니까, 목숨을 걸고 절실하게 뛰어다녔던 싸움이고. 이번에는 정치 생명을 걸고 욕 먹어가면서도 전략을 들고 조여 들어간 싸움이었다.

1987년 6·29 선언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을 것 같다.

그때 우리는 이겼다는 생각을 안 했다. 게다가 결국 그해 대선은 졌으니까. 탄핵을 성공시키고 정권 교체까지 완성한 순간, 6월항쟁이라는 미완의 승리에, 30년 만에 종지부를 찍는 느낌이 들었다. 운명이라는 게 참, 학생운동 때는 6월항쟁의 한가운데 있었고, 국회의원이 되어서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주도하는 자리에 있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두 개의 큰 정변을 온몸으로 겪었다. 이게 내 운명인가 싶었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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