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4일 저녁 8시, 서울 연남동에 있는 카페 ‘연필 1/3’에 ‘촛불 사회자’ 세 명이 모였다. 배우 권해효씨, 전문 MC 최광기씨, 인권운동가 김덕진씨(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이들은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 무효’ 촛불집회, 2008년 5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2016년 10월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에서 사회를 봤다. 촛불 1주년을 맞아 촛불 사회자 세 사람이 한자리에 앉았다. 수십만, 많게는 100만 촛불을 앞에 두고 진행을 했던 이들답게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시사IN 조남진한자리에 모인 ‘촛불 사회자’ 3인.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전문 MC 최광기씨, 배우 권해효씨(왼쪽부터).


어떻게 촛불집회 사회를 보게 되었나?
 

ⓒ연합뉴스2008년 7월5일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권해효씨와 최광기씨(왼쪽부터).

권해효:2004년 탄핵 무효 촛불 때 세 번, 2008년 광우병 촛불의 마지막 집회 때 사회를 봤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이 통과되던 날(2004년 3월12일)에 여의도에서 드라마 촬영이 있었다. 탄핵안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여의도 국회 앞으로 달려갔다. 노무현 대통령 선거운동을 열심히 했다는 이유로 ‘문성근·명계남 등과 몰려다닌다’고 사람들이 이야기하곤 했는데, 2002년 대선 이후로 그날 국회 앞에서 두 사람을 처음 만났다. 그날 사회는 아니었고 마이크를 잡고 몇 마디 했는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웃음). 얼마 후에 시민단체들이 ‘탄핵 무효와 민주 수호를 위한’ 촛불집회를 하는데, 최광기씨와 내가 사회를 보았으면 한다고 연락이 왔다. 속으론 좀 의아했다. 왜 나를 불렀지? 탄핵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정치 대결의 장에서 대중적으로 정치와 무관해 보이는 사람으로 나를 선택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큰 대중 집회 사회는 처음이었다.

최광기:탄핵 당일 여의도에서 탄핵 시도에 항의하며 ‘16대 국회 장례식’이라는 집회 사회를 보고 있었다. 행사 중간에 문성근씨가 뛰어오더니 ‘탄핵이 됐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국회 앞으로 가자’고 울면서 말하던 기억이 난다. 이후 촛불집회 사회 제안이 왔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그러겠다고 했다. 2004년 탄핵 촛불, 2008년 광우병 촛불 때 여러 번 사회를 봤다.

 

김덕진:저는 좀 복잡한데… 2016년 촛불이 최순실 태블릿 PC에서 시작됐다고 보는 이가 있고 저처럼 백남기 농민 사망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이가 있다. 백남기 농민이 2016년 9월25일에 사망했다. 그리고 강제부검 영장이 발부됐다. 시민 2000~3000명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지켰다. 예전에 노사모 활동을 하며 2002년 대선 때 ‘희망포차’를 했던 ID ‘소나무’님이 밥차를 끌고 서울대병원으로 왔다. 시민들이 많이 와서 장례식장 밥으로 감당이 안 될 때였다. 장례식장에 먹을 게 없다고 SNS를 하니 하루에 택배 차 10대 분량의 먹을거리가 도착했다. 부검영장이 만료된 게 ‘최순실 태블릿 PC’가 보도된 다음 날이었다. 부검을 막고 장례식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차에 촛불집회 이야기가 나왔다. 실무자들이 촛불집회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나마 검증된 사람이 사회를 보게 하자는 말이 나와서, 이전에 용산참사, 쌍용차 해고 사태 때 사회를 맡아보았던 내가 사회를 보게 되었다. 15년 넘게 인권운동 현장에 있었는데, ‘덜 운동권 같다’고 사회자로 추천받다니(웃음). 본행사와 공연 사회까지 합해 15번 진행을 맡았다. 

촛불의 변화를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김덕진:처음 촛불은 2002년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 사건(효순이·미선이 사건) 때였다. ID ‘앙마’라는 분이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그해 여름 월드컵 때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했는데, 시민들은 잘 모르고 있었다. 불평등한 SOFA(한·미 주둔군지위협정) 규정 때문에 정부가 미군에 재판권 이양을 요구했지만 거절해 미군들이 미군 법정에 회부되었다. 이들이 모두 무죄판결을 받으면서 촛불이 타올랐다. 미국 대사관이 있는 광화문을 몇 번 꽉 채웠는데, 그 미군들이 무죄판결을 받고 곧바로 출국했다. 굉장히 허탈하고 박탈감을 느꼈던 집회였다.

권해효:2002년 촛불집회를 거치며 시민들이 대선 후보들에게 ‘미국과 한국의 관계에서 당신들은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할 것인가’ 질문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회창 후보의 유세 차량이 광화문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2004년 탄핵 촛불 때는 지금과 비교하면 무대가 조촐했다. 스피커도 부실했다. 사회를 보고 있으면 문자가 엄청 왔다. ‘뒤에선 안 들린다’고(웃음). 그때 촛불집회를 준비했던 활동가들이 ‘오와 열’에 대한 강박이 있어서인지, 사람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바둑판처럼 네모반듯하게 앉아서 촛불을 들었다.

최광기:첫 촛불집회 때 권해효씨가 무대 밖을 보고 오더니 ‘너무 많이 왔어, 어떡해’ 하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웃음). 2004년 촛불은 시간을 되찾는 느낌이었다. 유신 독재를 경험했던 선배 세대들도 쏟아져 나왔다. 과거 세대가 2004년을 지켰다면 2008년은 정말 새로운 세대가 주축이 되었다. 유모차 부대, 촛불소녀 등 광장에서 못 보았던 이들이 등장했다. 처음 사회를 보는데 ‘광야에서’라는 노래를 모르는 분이 많았다. 광장의 주인이 바뀌었구나 실감했다. 민주교육, 시민교육이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현장이었다.

권해효:2008년 촛불이 없었다면 2016년 촛불은 존재할 수 없었을 거다. 2008년에 촛불을 ‘학습’한 중·고생, 대학생들이 2016년에 다시 촛불을 든 거니까. 2004년에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대통령을 탄핵하려는 시도에 대해 느낀 분노를 압도적인 힘으로 보여주고자 했다면 2008년 이후로는 개인이 각자의 방식으로 항의를 표출했다.

김덕진:2008년 촛불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시민들이 아무것도 없이 광화문 사거리를 점령해버렸다. 밤새도록 삼삼오오 모여서 기타 치고 토론하고. 진짜 자유로운 영혼들이 모인 촛불이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냈다. 광우병 대책위가 만들어지고, 반발도 생겼다. 자유분방하게 우리끼리 모이는데 누군가 큰 스피커를 가지고 오고 집중하라고 하니까. 마이크와 스피커가 권력이냐는 항의도 많았다. 그래서 앞에 나가서 말하는 게 무척 두려웠던 분위기가 있었다. 조직되지 않은 대오를 처음 만난 거니까. 조직해보려고 말을 걸었다가 ‘꺼지라’는 답을 들은 셈이다(웃음). 한편으로는 이러다가 사그라지면 어쩌나 하는 조급함도 있었다.

ⓒ시사IN 윤무영2008년 6월6일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현장에서 시민들이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


권해효·최광기 두 사람은 2016년 촛불 때는 무대 아래에서 지켜보았는데.

권해효:이번에도 발언 제안이 왔는데 사양했다. 나를 객관적으로 보려고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김제동씨처럼 꾸준히 사회적 발언을 해온 사람이 무대 위에 올라가면 누구나 흔쾌히 동의한다. 내가 무대 위에 올라가면 ‘저 아저씨는 왜 올라갔지’ 생각하는 세대가 3분의 2 이상일 텐데(웃음). 그리고 무대 밑에서 촛불 현장을 보고 싶었다. 항상 세종문화회관 계단에 앉아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일본에서 시민단체 사람들이 와서 촛불집회를 보고 싶어 했다. 그들에게는 한국의 촛불이 경외의 대상이었다. 인생에서 놓치면 안 되는 기회라고 하기에 함께 다니며 가이드 구실도 했다.

김덕진:집회 끝나고 누가 촛불집회에 왔다고 목격담이 뜨면 발언을 부탁하려고 다 연락했다. 배우 박철민씨, 박찬욱 감독, 봉준호 감독, 배우 정진영씨 등. 모두 ‘그동안 열심히 해오지 못했다. 지금은 무대 아래에서 시민으로서 참여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들 김제동씨를 추천했다(웃음).

최광기:딸아이와 촛불집회에 참석했는데, 광장에서 서로 촛불과 사탕 등을 주며 마음을 나누는 모습이 새로웠다. 아이와 촛불에 대해서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집회 문화가 많이 달라졌다. 2016년 광장에 앉아 보니까, 그전에 내가 무대 위에서 못할 짓을 많이 했더라(웃음). 2008년부터는 사람들이 SNS나 팟캐스트를 통해서 이미 어느 정도 사안을 알고 스스로 판단하고 촛불집회에 온다.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계몽주의적 진행은 탈피해야 한다.

김덕진:2016년 촛불집회를 준비했던 이들 사이에서 그런 이야기가 많았다. 우리는 시민들을 대신해 무대를 세우고 스피커를 설치하고 행사 장소를 잡는, 일종의 집회 서비스를 하는 사람이지 주도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계몽성 발언 금지, “동지” “투쟁” 이런 생경한 말 금지. 3분 자유 발언을 신청하라고 하면 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최광기:시민들의 자발성이 대단했다. 들고 나온 깃발 보면 재미있고 놀라웠다. ‘장수풍뎅이 연구회’ ‘혼자 온 사람들’ 등등. 이렇게 집회를 유쾌하게 할 수 있구나. 집회 문화가 확실히 달라지는 게 느껴져서 앞으로도 기대가 된다.

권해효:정말 묘한 게 숫자가 10만, 20만이 넘어가면 분노가 재미로 바뀐다. 분노라는 게 감정이 억눌린 상태에서 발생하는데, 수많은 사람이 모이면서 분노가 녹아내린다.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이라면 그런 화학적 변화를 느꼈을 거다.

촛불 사회자로서 촛불의 느낌은?

권해효:사회자 구실이 대단한 게 아니다. 다양한 시민들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군지 찾다가 ‘너희들 올라가’ 해서 올라간 거다. 무대 위의 우리나 무대 아래 사람들이나 역할만 달랐지 시민의 한 사람으로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그럼에도 우리 세 사람이 특별한 경험을 한 것은 맞다. 단상에서 수십만명이 촛불을 한 번에 들어 올리는 순간을 지켜보는 순간, 정말 잊을 수 없다. 이런 기억도 난다. 촛불집회 사회를 볼 때 드라마 촬영 중이었는데, ‘오늘 집회에 가야 한다’고 하니 서둘러 끝내주었다. 그날 촛불집회 무대에 딱 올라가보니까 드라마 제작진이 촛불집회에 다 와 있더라. 촬영 접고 참여하기로 했다고.

최광기:2004년 촛불 즈음이 나에겐 우울한 시기였다. 다양한 인권·노동·장애인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좌절했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촛불이 희망으로 다가왔다. 광장에 모였을 때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는데, ‘우리가 모이면 되는구나’ 하는 걸 처음으로 경험했다. 내가 뭔가 다시 해볼 수 있겠구나 싶었다. 구체적 실체를 목격했을 때의 놀라움 같은 게 확 느껴졌다.

권해효:촛불 자체로는 크게 실패하지 않았다. 2004년 촛불로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이 기각되었다. 2008년 촛불 이후 이명박 정권의 행보는 정말 한심했지만 2016년으로 연결되는 힘을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이건 확실하다. 촛불이 짱돌보다 강했다.

김덕진:‘백만 사회자’라는 별명도 얻었다. 언제든지 이 정도 사람이 모일 수 있다는 경고를 정치권이 받았기 때문에 이 힘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또 가장 고마웠던 가수가 있다. 지역 촛불에서 가수 섭외해달라고 요청이 많이 왔다. 우리가 연결해드리면 모든 지역에 갔던 가수가 있는데 바로 ‘조 PD’다. 그를 기억해달라. 촛불 무대에 가수들이 많이 나오니까 저 같은 인권운동가가 연예 프로그램에도 나갔다. 이승환, 전인권, 한영애 같은 분들은 어떻게 섭외하셨습니까? 그렇게 물어서 ‘제가 섭외한 게 아니고, 자발적으로 왔다’고 대답했다. ‘개런티는 주셨나요?’ 하고 다시 물으면 ‘아니요. 그런 건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최광기:이게 달라진 거다. 요즘 촛불집회 사회자는 텔레비전 연예 프로그램에 나가고 과거의 촛불집회 사회자는 블랙리스트에 올라가고(모두 웃음).

 

기자명 차형석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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