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만난 그녀는 몹시 불안한 상태였다. 줄담배를 피워댔다. 그는 아파트 회사 측에 대해서 행복한 주부의 이미지 연출에 누가 된 것을 미안해했지만, 한편으로는 피해자로서 불가항력적인 상황이었던 것을 감안하지 않는 것에 억울해했다. 그의 이런 심정은 비단 그 회사를 향해서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막상 사건이 터졌을 때 여론은 당연히 ‘최진실이 어떻게 했기에’ 하고 여자를 의심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더구나 인기를 생명으로 하는 그녀의 직업에 이런 분위기는 치명타였다. 냉혹한 세상의 살벌한 칼바람 앞에 어린 자식들과 앞으로 살아갈 일이 까마득했을 것이다.
그녀는 서점에서 내 책을 두어 권 구해 읽었노라고 했다. 그녀는 똑똑했다. 책의 내용과 논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세상을 잘 몰랐다고, 그저 나만 열심히 살면 되는 줄 알았다고 했다. 나는 내 자신의 이혼 경험에 비추어 대중에게 알려진 상황에서는 부담이 크긴 하지만 결국 이것은 ‘길들여진 자신’과 ‘주체적인 자신’의 싸움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녀는 금방 공감했다. 그녀와 몇 시간 이야기를 하면서 내 마음속에서 그녀를 도와야겠다는 열의가 싹텄다. 사실 그를 만나기 전에 사람들로부터 ‘연예인이 여성의식이 얼마나 있겠냐, 급하니까 일시적으로 이용하려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들은 터였다. 나는 이미연·김미화·이경실 등 성공적 극복 사례를 이야기하며 그래도 세상이 많이 변하고 있다고,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당당해져야 한다고, 여성운동권에서도 여성 연예인의 인권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 기꺼이 도울 것이라고 격려했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투지를 보이던 그녀가 아이들 이야기에서는 눈물을 보였다.
“모든 여성 연예인은 우울증에 노출돼 있다”
최진실 사건을 계기로 여성운동계에서는 여성 연예인에 대한 언론 보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간담회를 열어 개인의 아픈 사생활을, 그것도 피해자를 흥미 위주 가십으로 팔아먹는 일부 언론의 상혼을 비판했다. 익명성을 방패 삼아 무책임하고 무자비한 공격성을 양산하는 인터넷상의 마초이즘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대중, 언론계, 문화예술계, 상업자본주의, 도처에 퍼져 있는 여성에 대한 보수성과 남성우월주의 때문에 억울해도 참아야 하는 것이 여성 연예인이다.
피해자인 여성 연예인을 공격하거나 희생시키지 말라는 요지의 그 간담회가 실제로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손배청구 건은 사그라졌고 최진실은 다시 드라마와 광고에 나왔다. 나는 그녀가 잘 사는 줄 알았다. 자신도 한부모가 되었으니 한부모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여성운동도 후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굳이 연락하지 않았다. 얼마 전 한 여성단체 후원 바자회에 기꺼이 물품을 기증해 ‘짭짤한 기여’를 했다는 후문에 언젠가 그녀가 자진해 잠재된 여성의식을 드러낼 것이라 내심 믿었다.
최진실의 자살 소식에 평범한 사람의 첫 반응은 ‘애들은 어쩌고’이다. 다음은 ‘연예인이 그렇게 정신적으로 허약하다니까’이다. 내가 보기에 최진실은 허약하지 않았다. 과감하게 자식의 성씨를 바꾸고 근거 없는 해코지에 적극 대응했다. 그런데 어찌 이리 허무하게, 그것도 자식에 대한 양육과 상속 대책도 없이 사라져버렸단 말인가. 일부에서는 각종 억측이 난무한다. 오래전 살해당한 매니저까지 거론되고, 우울증을 앓았다거나 자살한 다른 연예인의 이름도 오르내린다.
최진실은 자기 안에 두 개의 자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둘이 오랫동안 만들어낸 깊은 골 속에서 자아가 상실된 어느 한 순간 실족사한 것이다. 그 둘 중에 어느 하나만을 택할 수 없는 것이 여성 연예인의 운명이라면 그의 자살은 예정된 것이었으리라. 그리고 이것이 어찌 최진실에게만 국한될 것인가(한 여성 영화 피디는 “모든 여성 연예인은 일종의 직업병으로 우울증에 노출되어 있다”라고 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나는 ‘여성 연예인에게 여성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할리우드의 명배우 캐서린 헵번은 젊은 시절 바지를 입고 라이프 잡지 사진을 찍었다. 부러지게 가는 허리와 각선미가 여배우의 상징이던 당시로서는 혁명이었다. 그녀는 늙은 나이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쭈그렁 할머니가 된 오드리 헵번,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어린이를 안은 채 연민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는 젊어서와는 또다른 아름다움을 남기고 떠나갔다. 타인의 눈에 보이는 자신이 아니라 ‘자기로서의 자기’를 보여줄 수 있는 내공이 그들의 카리스마이며 아우라이다.
최진실에게는 연예인 이전에 여성으로서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 여성의식이 필요했다. 그녀가 정신적인 주체성을 키울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여성학을 공부하게 하고 의식 있는 여성들과 연대하도록 적극적인 프러포즈를 하지 않은 게 가책으로 오래 남을 것 같다.
최진실씨, 이제 저승에서 편하게 자연인 여성으로 살기를,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고 했던 카피의 굴레에서 이제 놓여나기를, 그리고 당신을 ‘용기 있게 삶을 개척한 여성’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끝으로 세상에 부탁드린다. 그녀의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그녀의 죽음에 여성 연예인에 대한 환상과 기대에서 파생된 무책임한 덧칠을 하지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