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같은 삶 살다 간 ‘시대의 아이콘’
  • 주진우 기자
  • 호수 56
  • 승인 2008.10.07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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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실씨는 “나는 외톨이, 왕따.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다”라고 쓰고는 세상을 등졌다. ‘또순이’라고 불릴 만큼 억척스럽게 ‘생존’했고, “치열함이 없으면 진실이가 아니다”라고 말했던 그녀의 삶.
   
ⓒ시사IN 안희태
10월2일 최진실씨의 빈소가 차려진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첫 만남은 설렁탕 집에서였다. 최진실씨(40)는 단골 설렁탕 집에서 국물이 적다고 불평했다. 물론 남보다 적은 양이 아니었다. 식당 아주머니가 국물 한 그릇을 더 주자 최씨는 “잘 먹어야 일도 잘하죠”라며 국물을 나눠줬다. 한 번은 스테이크를 먹는데 샐러드를 밥으로 바꿔달라고 했다. 기자에게 밥을 덜어주며 최씨는 “밥을 먹어야 힘을 쓰죠”라며 웃었다.

최진실씨는 주변을 압도하는 강한 사람이었다. 숱한 고난이 그를 강하게 단련시켰다. 그래서인지 그녀와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럴 사람이 아니다” “어이가 없다” “이유를 알 수 없다” “훨씬 더 심한 것도 이겨냈는데…”. 아이들의 성마저 자기 성을 따라 바꿀 만큼 삶에 대한 의욕이 남달랐기에 최씨의 자살에는 ‘왜’라는 의문 또한 커진다.
최씨는 ‘사는 게 전쟁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어렸을 때 그녀는 가난과 싸웠다. 아버지는 노름에 빠져 집을 나갔다. 어릴 적 반지하 단칸방에서 그녀는 홀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포장마차를 했다. 어머니가 포장마차를 끄는 것이 부끄러워 그녀는 친구들 몰래 숨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학창 시절에 쥐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가난 때문에 밥보다 수제비를 더 많이 먹었다”라는 그녀의 스스럼없는 고백은 대중의 마음을 움직였다.

학창 시절 공부는 뒷전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체육과 미술에서 수를 받았을 뿐, 대다수 과목에서는 미나 양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성적표를 직접 공개하기도 했다. ‘끼’만은 대단했다. 고등학교 시절 최씨는 선생님에게 돈을 빌려 파마를 했다. 어머니에게 ‘30만원만 투자하면 몇 배로 갚겠다’고 눈물로 호소해 무허가 업자에게 코 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최씨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공부를 잘한다고 인생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장래 희망은 연예인이었으며 나는 어렸을 적부터 꾼 꿈을 이루었다.”

‘수제비의 미학, 최진실론’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동생 최진영씨의 연예 생활을 뒷바라지하다 연예계에 데뷔했다. 1988년 데뷔 초기에는 광고 단역을 전전했다. 그러나 불과 몇 달 만에 삼성전자 광고에서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예요”라는 카피를 던지며 일약 ‘국민 요정’으로 떠올랐다. 그녀만큼 드라마틱한 등장이 없었던지라 뒷말이 많았다. 호텔 안내 데스크에서 일했던 경력 탓인지 최씨가 재벌 회장의 엘리베이터 걸 출신 애첩이라는 소문이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녀는 루머를 잠재우고 광고계를 휩쓸었다. 또 드라마와 영화의 연이은 히트를 계기로 단숨에 톱스타 자리에 올랐다. 1990년대 초반부터 최씨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중·고생 가운데 최진실 책받침과 브로마이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예쁜 사람이 있으면 ‘○○의 최진실’이라고 불렀다. 학교마다 최진실이 한 명씩 있었다. 시인 유하는 ‘수제비의 미학, 최진실론’이라는 시에서 “귀엽게 삐죽대는 최진실의 말처럼 시집가는 날 식장의 신부치고 안 예뻐 보이는 신부는 없다”라고 했다.

   
ⓒ시사IN 윤무영
서울 반포의 집에서 아들·딸과 단란한 한때를 보내던 최진실씨.
‘또순이’라고 불리던 최씨의 억척스러움은 성공의 밑천이었다. 그녀는 1993년, 1994년 2년 연속 세금을 가장 많이 낸 연예인이었다. 그러나 최근까지 최씨는 한번도 명품을 사본 적이 없다고 한다. 검소한 생활로 최씨는 저축유공자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살이 조금이라도 찌면 3~4시간씩 달리고 자전거를 탔다. 또 최씨는 대본을 놓고 작가와 자주 다투기도 했다. 그 이유에 대해 최씨는 “무례하다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왜 그렇게 궁상을 떨고 싸우냐고 물으면 이게 최진실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치열함이 없으면 진실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탄탄대로를 달리던 최씨는 1994년 시련을 맞는다. 최씨를 키워냈던 매니지먼트 업계의 실력자 배병수씨가 최씨의 운전기사 전 아무개씨에게 살해된 것이다. 최씨는 법정을 오가야 했다. 최씨에게 드리워진 악성 루머의 그림자는 잔인했다. ‘살인을 교사했다’ ‘배씨와의 비디오테이프가 나왔다’ ‘살해범 전씨가 폭로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민 배우로서 그녀의 입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살을 파고드는 루머를 그녀는 1997년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 1997년 영화 <편지> 그리고 무수한 히트작으로 잠재웠다. 한 연예 매니지먼트의 사장은 “1990년대는 완벽한 최진실의 시대였다. 다시는 이런 카리스마 있는 배우가 안 나올 정도로 최진실만의 독특한 영역을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시련을 낳은 결혼

최고의 자리에 있을 때 최씨의 혼담이 오갔다. 미국에서 유학한 재벌가의 자제였다. 사랑도 깊었다고 한다. 그런데 최씨는 2000년 야구선수 조성민씨(35)와 결혼했다. 당대 최고 여배우와 학창 시절 ‘최진실 브로마이드’를 방에 붙여놓았던 프로야구 선수와의 결혼은 달콤한 로맨스거리로 충분했다. 최씨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위해 연예 활동을 접고 도쿄로 건너갔다. 그러나 결혼 초기부터 삐거덕거리던 부부는 1남1녀를 남기고 2004년 9월 파경을 맞았다.

이별도 아팠지만 헤어지는 과정이 더 나빴다. 호화 결혼식과 파경 생중계로 최씨는 비난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헤어지는 과정에서 최씨는 조성민씨에게 두 차례나 폭행을 당했다. 피해자인데도 폭행을 유도했다는 비난이 뒤따랐다. 이미지가 바닥에 떨어져 급기야 자신이 출연한 광고업체로부터 30억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최씨는 “국민을 ‘배심원’으로 앉혀놓고 2~3년간 이혼 문제로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 과정에서 치부를 생생하게 보여줘 나도 아이들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라고 말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최진실과 절친한 모델 이소라씨는 “최진실이 밤새도록 악성 댓글 3000개를 전부 읽은 다음 바로 기절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뉴시스
동생 최진영씨.
최진실은 귀엽고 발랄한 여성의 대명사였다. 이혼 때문에 깔끔한 이미지가 손상되면서 최씨는 나락에 떨어졌다. 연예계에서 그녀를 찾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2004년 MBC의 한 국장은 “최진실은 끝났다. 귀엽고 발랄함으로 떠오르던 최진실이 이제는 가정 폭력과 이혼의 대명사가 되었는데 어디에다 쓰겠는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끝난 줄로만 알았던 최씨는 지옥에서 빠져나왔다. 2005년 <장밋빛 인생>에서 요정 이미지를 버리고 억척 주부 맹순이로 변신해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올해에는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서 아줌마의 판타지를 자극하며 ‘줌마렐라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다시 정상의 자리로 돌아온 최진실씨는 강해 보였다. 그러나 속은 여리디 여린 여자였다. 이혼 뒤 최씨는 감정 기복이 심해졌다. 컨디션이 나쁜 날은 움직이는 시한폭탄이었다. 영화배우 박중훈씨는 “최진실은 굉장히 여리고 감정적이어서 간혹 예기치 않은 실수를 한다”라고 말했다.
그녀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녀는 외로움과 처절하게 싸웠다. 최씨는 기자에게 “절망에 빠져 있다가도 아이들을 보면 용기와 희망을 얻는다. 그런데 다시 외로워진다”라고 말했다. 한 언론 인터뷰에서는 “그러니까 20년 동안 외로웠던 것 같다. 새벽 1~2시에 항상 눈이 떠진다. 이제 동이 틀 때까지 내가 혼자서 뭘 해야 되나 걱정했다”라고 말했다.

최씨는 외로움을 술과 약물로 달랬다. 이혼 후 최씨는 정신과 치료를 받고 수면제의 도움으로 잠을 이루기 시작했다. 또 괴로울 때마다 술을 마셨다고 한다. 최씨의 한 지인은 “드라마에 복귀하면서 한강에 나가 자전거도 타고 수면제도 줄이고 좋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술을 끊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술을 먹으면 새벽에 한두 시간씩 전화기를 붙잡고 지인과 통화하는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외로움과 악플에 무너지다

최씨는 절친했던 정선희씨의 남편 안재환씨 죽음에 충격이 컸다. 더구나 최씨가 사채놀이를 해서 안씨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악성 루머가 그녀를 괴롭혔다. 10월2일 새벽. 최씨는 술을 마신 다음 수면제를 먹었다. 최씨는 어머니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섭섭하다. 사채니 뭐니 나와 전혀 상관없는데 왜 이렇게 괴롭히는지 모르겠다”라고 울먹였다고 한다. 그리고 욕실로 들어가 스스로 숨을 거두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인터넷 루머는 기존의 ‘소문’과 달리 그 양과 질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루머의 내용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이어서 한 인간으로서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다”라고 말했다. 정 박사는 “연예인은 ‘나’는 없고 ‘너’가 주는 평가와 이미지를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산다. ‘존재하기 위해 가져야 할 기반’이 없는 정신건강상 취약한 직업이다. 최씨 자살을 통해 우리 사회가 반성하고 성찰해야 할 많은 함의를 찾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최씨는 “인생 살면서 실패도 하고 좌절도 할 수 있지만 절대로 지지 않겠다”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최씨는 숱하게 험한 봉우리를 넘고도 작은 언덕을 넘지 못해 무릎을 꿇고 말았다. 다만 죽는 날까지 드라마틱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만은 지켰다. 그녀의 미니 홈피에는 ‘하늘로 간 호수’라는 이름이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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