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빛 PD가 떠난 자리, 또 다른 ‘이한빛들’이 여전히 밤샘 촬영 중이다. 6월13일 CJ E&M은 고강도 장시간 노동의 괴로움을 호소하며 지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한빛 PD의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방송 제작 환경의 개선을 약속했다. 청년유니온, 다산인권센터,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 언론개혁시민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불안정노동철폐연대 등 5개 시민단체로 이루어진 ‘tvN 사망사건대책위 방송제작환경제도개선 연구모임’은 방송업계 종사자들의 노동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4월부터 3개월간 온라인 제보센터를 운영하고 심층면접을 진행했다. 드라마 업계 종사자 106명이 설문에 참여했고, 연출팀·촬영팀·스크립터·조명·방송의상·미술소품 등 다양한 직군의 정규직 및 프리랜서 13명이 인터뷰에 응했다.

1년차 촬영팀 막내부터 20년차 연출자까지, 이들이 증언하는 드라마 제작 환경은 ‘재난 현장’에 가까웠다. 촬영에 돌입하면 하루 평균 19.18시간 일했고, 평균 휴일은 주 0.9일이었다. 인터뷰는 주로 새벽 넘어 이루어졌다. 촬영에 쫓겨 본인의 처우에 관해 목소리를 낼 시간이 없었다. 그간의 조사에 대한 결과 보고가 9월20일 국회에서 열렸다. 이날 자리에는 이한빛 PD의 유가족도 참여했다.

ⓒ시사IN 이명익9월2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드라마 제작 현장의 노동실태 개선 토론회가 열렸다.

“방송사는 전권을 외주제작사에 주기 때문에 팀을 꾸리는 것부터 외주제작사 권한이고 일이다.” 촬영 7년차 ㄱ씨의 말처럼 1990년대 후반부터 외주 제작이 활성화되면서 외주제작사가 현재 대부분의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 외주제작사가 특정 작가의 작품과 배우 섭외를 조건으로 방송사에 편성을 요청하면 방송사가 가부를 결정하는 식이다. 방송사와 외주제작사가 계약을 맺고 방송사 PD가 연출을 맡는다. 현장 스태프의 80~90%가 외주 노동자다. 인력은 연출팀(지휘 라인의 연출자, 인력관리·비용 등을 담당하는 제작팀, 조연출팀), 미술팀(세트·분장·미용·의상), 기술팀(영상·녹화·조명·음향·카메라)으로 나뉜다. 올해 방영된 드라마(지상파 3편+케이블 방송 1편)를 기준으로 한 편당 투입되는 스태프는 총 90~180명 정도다.

계약은 주로 두 가지 방식이다. 모든 스태프가 외주제작사와 계약을 맺거나, 각 스태프 부문장(촬영감독, 조명감독, 음향감독)이 본인 팀의 막내 임금까지 통으로 계약을 한다. 후자의 경우 임금 배분에 기준이 없다. ㄱ씨는 “만일 4500(만원)으로 계약한다면 촬영 감독이 자신이 생각하는 임금을 제외한 나머지를 나눠주는 거다. (중략) 원칙대로라면 촬영감독이랑 계약서를 써야 한다. 물론 그런 경우는 없다. 계약서를 쓰자고 하면 ‘얘 뭐야’ ‘얘 빼’ 이렇게 된다. 계약서를 쓰기 시작하면 자기가 원하는 만큼 챙기지 못한다. 심지어 촬영감독이 특수장비를 쓰고 싶다고 하면서 조수들의 임금을 깎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계약서를 쓰는 경우도 있지만 고의든 실수든 사고가 발생할 경우 외주제작사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조항이 버젓이 포함되어 있다. 제작 과정에서 방송사의 책임을 묻기 어려운 구조다.

첫 촬영은 대체로 1회 방영 한 달 전에 시작된다. 후반부로 갈수록 분량도 늘고 대본 집필이 늦어지면서 ‘생방송’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돌입한다. 스태프들의 대기 시간도 무한정 길어진다. 이 과정에서 장시간 근로 문제가 고질적으로 발생한다. 근로기준법의 법정 근로시간은 하루 8시간, 주 40시간을 넘지 않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드라마·영화 제작 현장에서는 근로기준법 제59조 ‘근로시간 및 휴게시간의 특례’ 조항에 따라 ‘대표성 있는 근로자 대표와 서면 합의를 한 경우’ 주 12시간을 넘어 연장 근로가 가능하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서면 합의 없이 무제한 노동이 이뤄지고 있다. 촬영 1년차 ㄴ씨는 “가장 길게 일을 할 때는 아침 7시에 시작해서 오후 4시에 끝나고 오후 6시에 다시 모이라고 했다. 촬영팀 모두 찜질방에 가서 단체로 씻고 나왔고 그렇게 40시간 가까이 일을 했다. 그때는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였다”라고 말했다. 최대 50일 연속 일한 이들도 있었다. 잠은 이동 중에 잤고, 식사 시간에 쉬었다. 아예 촬영 현장 인근에 10만원대의 잠만 자는 고시원을 잡아둔 경우도 있다. 택시비를 아끼기 위해서다.

ⓒ시사IN 포토4월28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CJ E&M 사옥 앞에서 열린 이한빛 PD 추모 문화제.

꿈 없으면 감내할 수 없는 열악한 구조

제작진 일부는 드라마 편당 받게 되는 임금액 자체는 낮지 않다고 답했다. 쓸 시간이 없어서 통장 잔액이 쌓인다. 하지만 노동시간을 고려하면 최저임금과 비슷하거나 미달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연출팀 ㄷ씨의 경우 월급으로 300만원 정도를 받는다. 야근수당은 따로 없다. 계산해보니 최저임금 미만인 시급 5500원이 나왔다. 외주업체가 늘면서 지불능력이 떨어지는 소규모 업체가 임금 체불을 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현장에선 스태프의 식사비를 축소하면서 비용을 절감하기도 한다.

드라마 제작 여건상 프리랜서들은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4대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고 장비를 고장 내면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 연출자의 판단에 따라 중간에 팀이 교체되는 일 역시 비일비재하다. 이한빛 PD가 조연출로 참여했던 tvN 〈혼술남녀〉도 그랬다. 촬영 10년차 ㄹ씨는 “잘린다는 게 우리가 생각하듯이 탁 자르는 게 아니라, 제작사 또는 본사에서 압박이 들어왔을 때, 비용을 줄여야 되는데 이 촬영감독 계속 쓸 거냐 그랬을 때 커버를 안 해주는 거다. 그러면 윗선에서 결정해서 통보를 한다. 실제로 50부작짜리 주말 드라마인데 24회 찍고 나왔다”라고 말했다. 프리랜서 신분이지만 현장에서는 방송사나 제작사의 업무 지시를 받기 때문에 ‘근로자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요구도 있다.

일상적인 인권침해도 심각한 수준이다. ㄷ씨는 “여자 조연출들이 메인 PD한테 상습적으로 추행을 당했다. 무릎 위에 앉히고 귓불을 만지고 팔을 주물럭거리면서 친해서 그렇다고 말했다”라고 말했다. 중견 배우들의 성추행을 진술하는 이도 있었고 남성 문화에서 살아남기 위해 음담패설을 더 강하게 하는 여성 조연출에 대한 목격담도 있었다. 실수가 있을 때 욕설과 폭언, 신체적 위해가 가해졌고, 연출자의 발 씻을 물을 ‘대령’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제작 환경의 열악함을 알고도 드라마 제작 현장에 유입되고 있었다. 이유는 뭘까? 우연한 계기도 있지만 꿈을 좇는 경우도 많다. 드라마 제작 현장을 그린 KBS 〈그들이 사는 세상〉(2008)의 대본을 접하고 드라마 연출의 꿈을 키운 외주제작사 소속 제작팀 1년차 ㅁ씨는 1년 새 많은 경험을 했다. 그는 “제작팀은 스태프들의 온갖 어려운 일을 처리해야 하는, 화풀이 대상이 된다. ‘누구야, 이런 것 좀 해야 하지 않겠어? 김밥에 참치가 없잖아’라는 이야길 주로 듣는다. 본인들도 살아야 하니까 나한테 화풀이 겸 토로를 한다. 해결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상황이 반복된다. (중략) ‘너 말고도 하고 싶은 사람 많아’가 대다수의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촬영 당시 조명 크레인에 머리를 부딪혀 머리가 심하게 부었지만 쉴 수 없었다. 첫 작품이고 막내인 데다 촬영이 진행 중이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처우를 견디지 못하는 이들은 떠나고 드라마에 애정 있는 사람들이 남아 현장이 잘 변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안은정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는 “방송계 종사자들의 노동이 ‘열정노동’으로 상징되는 건 꿈이 없으면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열악한 구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한빛 PD의 아버지 이용관씨는 “방송 산업에 켜켜이 쌓여 있는 적폐가 너무 많다는 게 실태조사 과정에서 밝혀졌다. 청년들이, 특히 화면 뒤의 수많은 방송 노동자들이 희망을 가지고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 PD의 유족들은 CJ E&M이 전달한 위로금을 방송업계 노동자들의 쉼터를 건립하는 데 쓰기로 했다. 지난 8월부터 문화체육관광부와 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사와 외주제작사 간 불공정거래 실태조사를 진행 중이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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